novel

Arcadia

barde 2013. 5. 25. 03:56

오래전 어느 작은 마을에 있었던 일이다. 마을에는 사람이 건너지 못할 정도로 넓지는 않지만 실개천보다는 훨씬 넓은 강이 하나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강을 “아르카디아”라고 불렀는데,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강의 이름의 유래가 된 한 소년에 관한 이야기다.


마을에 사람이 지금보다 적게 살았을 때, 사람들은 밭을 일궈 농사를 짓거나 마을 주위를 둘러친 숲에서 나무를 캐고 살았다. 대부분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았으므로 글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 중에는 유달리 머리가 좋은 아이가 있어,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곧잘 글을 읽거나 낡은 종이에 목탄으로 글을 쓰거나 했다. 소년이 바로 그런 유에 속했다. 소년은 걸음마를 뗄 때부터 글자가 적혀 있는 물건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소년의 부모는 소년이 세 살이 되자 마을에서 유일하게 책이 보관되어 있는 곳인 촌장의 집에 소년을 맡기고 일을 하러 나갔다. 촌장은 늙어서 아내도 죽고 자식들은 모두 대도시로 떠나 홀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므로, 아이 하나 맡는 일을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촌장은 되도록이면 아이와 놀아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이는 책 읽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일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촌장은 주로 아이에게 글을 가르치고 책을 읽어 주었다. 아이는 해면이 물을 흡수하듯 놀랄 만한 속도로 지식을 흡수해 나갔고, 촌장은 아이의 재능에 놀라 한 가지 생각을 품었다. 촌장이 자신의 생각을 소년의 부모에게 열심히 설명했을 때, 그들은 거기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소년은 자라서 장차 나무꾼이 될 것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촌장은 부모의 무관심함과 자신의 무능력에 좌절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년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점점 더 어려운 책을 읽어 나갔다.


계절은 여름,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대고 녹음이 눈을 아찔하게 하는 푸름을 드러내는 철이다. 소년은 이제 자기 앞가림을 할 줄 아는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 아침이 되면 부모보다 일찍 일어나 말끔히 세수를 하고, 아침상 차리는 일을 도운 뒤 자기 몫의 장작을 패었다. 그 뒤 시간은 저녁놀이 지기 전까지 자유시간이었다. 장작을 패자마자 소년은 곧바로 촌장의 집으로 달려갔는데, 이제는 많이 늙어버린 촌장을 보기 위함도 이유였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책을 읽기 위함이었다. 이제 촌장의 집에 보관되어 있는 책 중 소년이 한 번이라도 읽지 않은 책은 없었다. 그러나 읽었던 책을 다시 읽어도 소년은 전혀 싫증을 내지 않았다. 촌장은 책을 즐겨 읽는 소년을 위해 마을 밖으로 볼일을 보러 나가는 사람에게 책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지만, 얇은 이야기책이 아니면 평범한 사람의 여비로는 구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새로이 촌장의 집 서가에 꽂히는 책들은 주로 소년소녀들을 위한 이야기책이었다. 소년은 그중에서도 특히 하나를 책 모서리가 닳도록 읽었는데, 바로 <아르카디아의 아이들>이라는 모험 가득한 이야기책이었다. 아르카디아라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낙원으로 모험을 떠나는 일곱 아이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내용만으로는 별 특별할 게 없었지만 그 분위기와 짜릿한 모험이 소년의 관심을 끌었을 것이다. 소년은 이미 다 읽어서 내용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껴 읽는다는 마음으로 자기 전에 불빛 아래 조금씩 책장을 넘기며 아르카디아에서 소년소녀들이 겪는 모험을 조금씩 음미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촌장의 집에만 있는 게 지루하여 옆에 책 하나를 끼고 마을 어귀로 산책하러 갔다. 어릴 적부터 뛰놀던 길이라 눈을 감고서도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소년이 특히 좋아하는 곳은 강물이 조용히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강변이었다. 그곳에서 책을 읽으면 어느 곳보다도 집중이 잘 됐다. 그래서 소년은 마음이 답답할 때마다 강변으로 가 풀이 흔들리는 모습이나 가끔 배가 하류로 내려가는 모습을 보며 책을 읽었다. 소년이 열중해서 책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강물이 출렁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에 정신이 든 소년은 읽던 책을 내리고 강을 바라보았다. 바라보는 시선의 끝에서, 무언가 흐느적거리는 형체가 올라왔다. 흐느적거리는 형체는 물을 뚝뚝 흘리며 머리카락이라고 생각되는 투명한 무엇을 걷어 올렸다. 놀란 소년은 한순간 도망치자는 생각을 했지만, 몸이 생각에 따라주지 않았다. 소년이 우물쭈물하던 사이에 형체는 점차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다. 키가 큰 어른의 모습을 한 형체는 점차 강 밖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소년은 책을 바닥에 내려놓고 도망칠 준비를 했다. 그러나 형체는 강과 땅이 만나는 곳에서 더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고 말하는 편이 적당할 것이다. 소년은 몸을 살짝 돌려 강 주위를 계속 맴돌고 있는 형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제는 아까처럼 투명하지 않았고 흐릿하게 색깔이나 외곽선이 보였다. 궁금증이 든 소년은 조심스레, 형체를 계속 주시하며 강변 아래로 내려갔다. 가까이 내려가 보니 형체는 소년보다 머리 하나 정도 키가 컸고, 머리카락 사이로 귀로 보이는 것이 그 끝만을 뾰족하게 내놓고 있었다. 입은 옷은 전반적으로 초록빛이었으며, 손가락이 유달리 가늘었다. 형체는 소년을 발견하자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두 팔을 흔들었다. 그러나 소년은 그것의 의도를 알아챌 수 없었다.


첫날은 소년에게 수많은 의문과 경이로움을 남긴 채로 지나갔다. 소년은 촌장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강에서 이상한 사람을 봤다고 떠들어댔다. 촌장은 소년이 헛것을 봤나 하고 가볍게 여겼지만, 소년이 계속 그 얘기를 하는 것을 보고는 진짜로 뭔가를 봤다고 생각했다. 소년이 이야기하는 내용을 자세히 들은 촌장은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을 요정이라고 결론 내렸다. 물론 요정이 실재한다고는 촌장도 믿지 않았지만, 유년기에 종종 요정을 보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요정이라는 촌장의 말에 반짝이는 눈을 크게 떴다. 요정이라니? 이야기 속에나 등장하는 신비로운 생명이 아닌가. 불의 요정, 나무의 요정, 숲의 요정... 소년은 이제까지 이야기 속에서 등장했던 수많은 요정을 욀 수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 자신이 본 것은 물의 요정이란 말인가? 두근거리는 소년의 마음은 오직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촌장만이 느낄 수 있었다. 촌장은 되도록이면 부모에게 요정을 봤다는 얘기를 하지 말라고 했다. 어차피 안 믿어줄 것이기 때문인데다가, 책을 많이 읽어 머리가 이상해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촌장의 말을 새겨들어 비밀을 오직 그하고만 공유했다. 그 뒤로 일 년 동안은 요정을 볼 수 없었다. 소년은 한층 자라 이제는 아예 책을 구하러 다니려고 했고, 부모는 소년이 책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겉으로는 집안일에 열심히 참여했으므로 뭐라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가나 싶었다.


여름이라 그런지 강의 물살은 더욱 풍부하고 기운차 보였고, 주위로 자라 있는 갈대나 이름을 받지 못한 풀들도 바람에 사락사락 흔들리며 상쾌함을 더했다. 소년은 이제 소년과 청년의 사이에 서 있었다. 저 강을 넘으면 청년이 될 것만 같았다. 아니, 이 강보다는 더 넓고 깊은, 여기서 100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 바깥을 흐르는 강을 넘어야 청년이 되는 것일까? 소년이 들고 있는 책은 한 소년의 반생을 다룬 책이었다. 소년은 책에 등장하는 소년에 공감하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그처럼 학교에 들어가 제대로 된 공부란 것을 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학교도 40마일 떨어진 곳에 있었다. 부모에게 사정해 본다면 아주 가망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우물쭈물하는 소년의 마음은 똑 부러진 결정을 아직 못 내리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일 년 전 그때처럼, 갑자기 강에서 물살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년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재빨리 뛰어갔다. 그곳엔 일 년 전 기억에 남아 있는 요정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흐르는 강물 위에 요정의 얼굴이라고 생각되는 흐릿한 반영이 남아 있었다. 소년은 풀밭에 무릎을 꿇고 요정이 무슨 말을 하지나 않을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실제로 무어라 말하기는 했다. 그러나 소년이 ‘말’을 알아듣기까지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중간중간 말을 멈추기도 하면서 요정은 아마도 소년을 향해 이야기를 해 나갔는데, 정리해 보면 “이제 물의 요정이 머물 곳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소년은 내용을 이해하자 매우 놀랐다. 그래서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요정을 닦달했으나, 요정은 마지막으로 시간이 없다고 말하고는 곧 사라졌다. 일 년을 기다린 소년의 허무함은 더욱 커졌다. 책을 읽을 마음도 그다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촌장에게 자신이 또다시 요정을 만났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그 이후로 일주일에 세 번은 강변으로 가서 혹여 요정이 나타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주위를 서성거렸다. 그러나 사흘이 지나도, 석 달이 지나도 요정은커녕 강물이 출렁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적잖이 실망한 소년은 다시금 책 읽기에 몰두했다. 열심히 책을 읽고 있자면 요정이 마음속에서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강 가까이 다가갈수록 흐릿하던 요정의 얼굴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떠올라, 소년은 이제 강변으로 가는 발걸음을 끊어버렸다. 혼자서 책을 읽을 장소는 강변 말고도 어디든지 있었다. 소년은 때로는 숲 어귀에서 책을 읽기도 하고, 어떤 때는 책을 구한다는 이유로 이웃 마을까지 걸어가 도서관에서 자신이 읽지 못한 책을 하루종일 읽기도 했다. 실제로 발품을 팔다 보면 책을 몇 권 구하기는 했다. 그러나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게 훨씬 편하다는 사실을 소년은 깨달았다. 그렇게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던 소년은 어느 날 익숙한 서가에서 미처 눈치채지 못한 한 권의 책을 발견했다. 책의 제목은 <강에서 요정을 보았다는 이들의 경험담>이었다. 소년은 제목을 보자마자 이 책을 절대 들어서 펼쳐선 안 된다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손은 멋대로 움직여 책을 서가에서 끄집어내 책장을 펼치고 있었다. 저자가 책을 쓰게 된 이유와 감사 인사가 이어진 다음 첫 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불의 요정은 까다롭고 / 물의 요정은 온유하다 / 숲의 요정은 장난기 가득하고 / 흙의 요정은 침착하다 / 공기의 요정은 변화무쌍하고 / 돌의 요정은 인내한다” 요정의 성정을 간략하게 적은 시였다. 저자는 시를 인용한 뒤에 이렇게 적는다. “그러나 과연 물의 요정을 온유하다고만 평할 수 있을까? 여기 수십 명의 사람으로부터 수집한 경험담이 있다. 그들은 제각기 자신이 요정으로부터 받은 인상을 담담히, 혹은 놀람이 담긴 어조로 말하고 있다.” 소년은 선 채로 책을 계속 읽어 내려갔다.


어느새 해가 지고 도서관도 닫을 시간이 되었다. 학교의 교사를 동시에 맡고 있는 신부가 열쇠를 짤랑대며 낡은 문을 끼익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소년은 이제 막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신부는 마을에 이 정도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놀랍게 여겨, 가방을 메는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인가?”

“아니요, 다니고는 싶지만요.”

소년은 인사를 하고 재빨리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소년을 궁금하게 여긴 신부는 발걸음을 옮기는 소년을 붙잡았다. 좋아하는 책이 뭔가? 소년은 짧게 생각한 뒤에 이렇게 답하고는 도서관을 나왔다. <아르카디아의 아이들>이요. 신부가 그 책을 알 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소년은 씁쓸한 마음으로 여관으로 향했다. <강에서 요정을 보았다는 이들의 경험담>은 소년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경험담 중에는 소년이 겪은 것과 비슷한 경우도 있었지만, 물에서 목소리를 들었다는 이들부터 요정과 강을 걸었다는 이들까지 제각기 다양했다. 그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하나 있었는데, 요정이 어린 아이를 홀려 강으로 빠뜨린다는 이야기였다. 책 속에서 말하고 있는 사람은 실제로 그것을 보았다고 했다. 잘못 본 게 아니냐고 저자가 재차 물었지만, 똑똑히 이 두 눈으로 보았다고 말하면서 굳게 믿었다. 소년은 정말로 요정이 아이들을 길동무로 잡아가는 경우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아이가 강에 빠진 데에 요정을 덧붙인 것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상실감에 애먼 요정을 탓하는 것이다. 소년은 요정이 그런 짓을 할 리는 없다고 믿었다. 그리고 다시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이제 요정 따위에 신경쓸 나이는 지났다고 자신을 다독였다. 언제까지고 요정을 믿고 살 순 없었다. 여관 침대에서 팔베개를 하고 누워 소년은 자신의 미래와 과거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촌장은 마을로 들어오는 길에서 소년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는 기쁜 나머지 달려가 소년을 껴안았다. 이 주일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고 소년이 설명했지만, 촌장은 그런 것은 전혀 상관없다는 모습이었다. 여하간 이번에도 소년은 책을 몇 권 정도 가지고 돌아왔다. 그의 집으로 향하는 길에 촌장은 이제 집에 책을 꽂아둘 곳이 없다고 농담조로 말했지만, 소년은 그 말을 통해 자신이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아차렸다. 처음 마을을 떠날 계획을 촌장에게 속삭였을 때, 촌장은 반대하지도 않고 찬성하지도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날이 갈수록 소년의 계획은 점차 구체적으로 변해갔다. 촌장은 도저히 어렸을 때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는 소년의 현재 모습을 보며 세월을 느꼈다. 그리고 떠나는 소년과 마을에 남는 자신을 대비해 보며, 젊었을 때의 꿈과 널뛰던 마음을 되새겨 보았다. 그는 소년이 결국엔 떠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소년의 계획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마음 한편이 허전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마을에 돌아온 소년을 저녁 식사에 초대한 자리에서 촌장은, 자신의 짧지 않은 생애와 한 아이를 보고 품었던 희망에 관해 이야기했다. 소년은 조용히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알 수 없는 미래와 함께 촌장에 대한 고마움을 느꼈다. 촌장은 식사의 끝에 가져갈 책이 있으면 지금부터 천천히 골라 두라고 말했다. 소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가 담긴 잔을 비웠다. 밤이 깊었고, 상현달 아래 촌장은 소년의 가는 길을 배웅했다.


기슭에 댄 나룻배가 강물이 출렁임에 따라 흔들렸다. 달은 새하얀 빛으로 어둠을 가르고 있었고, 주위에 움직이는 것은 곤충과 풀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소년은 한 손에 책을 낀 채로 강변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눈길이 지난 15년간 살아왔던 마을을 어루만졌다. 어렸을 때의 희미한 기억, 열중해서 빠져들었던 이야기, 특별한 날에만 먹을 수 있었던 맛있는 음식... 무수한 상념이 소년의 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다. 하지만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것은 왜일까. 자신의 마음을 반추하고 되짚어 봐도 미련 같은 건 없었다. 늙은 촌장이 마을에 혼자 남게 되면 쓸쓸할까봐? 그는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소년은 촌장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기억했다. 그리고 그와 나눴던 수많은 대화를 되짚어 보면서, 얼마쯤 그렇게 초점을 먼 곳에 두고 있었다. 다시 배가 흔들리면서 노를 연결한 이음매가 삐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년은 표지가 바래고 귀퉁이가 헐어 있어 매우 낡아 보이는 책을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 살며시 내려놓고는, 사뿐 뛰어 나룻배 위로 올랐다. 노를 젓는 법은 예전에 촌장에게서 배워 두었다. 가까운 나무에 묶어둔 밧줄을 푼 뒤에, 그는 상류 쪽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노를 젓기 시작했다. 노가 물살을 가름에 따라 배는 천천히, 천천히 하류를 향해 내려갔다. 흘러간 배가 어디에 닿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곳엔 분명 자신을 받아들여 줄 학교가 있을 거라고, 소년은 막연하게 믿고서 노를 저었다. 수면에 닿아 부서지는 달빛은 은빛으로 반짝였다.


수확이 끝난 가을은 풍요와 여유로움의 계절이다. 강의 물살은 한층 줄어들었고, 강가에서 흔들리는 갈대는 따스한 햇볕 아래 하얗게 세었다. 소년의 부모는 책을 구한다고 떠난 소년이 한 달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이상하게 생각하고는 마을 밖으로 떠나는 사람들에게 소년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촌장에게 물어도 마땅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던 부부는 마을 곳곳을 뒤지며 소년의 간 곳을 묻고 다녔다. 그러다 정육점을 하는 한 사나이에게 딸이 강변에서 책 하나를 주워왔다는 말을 들었다. 바로 <아르카디아의 아이들>이었다. 어머니는 슬퍼했고, 아버지는 착잡해했다. 사내의 딸이 경박하게도 물의 요정이 소년을 데리고 갔다는 말을 꺼냈다. 아직 젊은 사내는 딸을 다그쳤지만, 책이 강변에서 발견됐다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은 소년의 실종에 애석해하며 책이 발견된 장소에 모여 부모를 위로하고 사라진 소년을 애도했다. 촌장은 맨 뒤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애도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예의 소녀가 지루한 얼굴로 촌장에게 다가왔다. 소녀는 촌장에게 물었다.

“그 오빠는 정말로 물의 요정이 데려간 걸까요?”

“글쎄다. 그럴지도 모르지.”

소녀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촌장은 한결 가벼운 목소리로 답했다. 갈대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떠나는 이에게 인사라도 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