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에 대한 잡상; 죽음
요즘은 읽으라는 책은 안 읽고 만화만 줄기차게 보았다. 본 만화를 나열해 보자면 진격의 거인 10권(역시 인기가 좋으니까 바로바로 나온다), 바라카몬, 빈란드 사가 1-6권, 은수저 5권 그리고 가장 재밌었던 3월의 라이온 1-8권이다. 바라카몬은 요츠바랑을 벤치마킹한 재밌는 일상 만화다. 비록 주인공이 서예가라는 흔치 않은 직업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요츠바랑과 마찬가지로 섬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에피소드 형식으로 다루고 있다. 애들과 웃고 떠드는 개그에 주파수가 안 맞는다면 별로 재미없어할 지도 모르겠다. 요츠바랑을 재밌게 봤다면 아마 이것도 재밌게 볼 수 있을 거다.
진격의 거인은 화가 가면 갈수록 느끼는 것이지만, 인물들이 처한 상황이 너무나 뜬금없는 상황이다 보니 다들 정신이 살짝 나가 있다. 그러나 살아남기 위해선 제정신으로 있을 수 없다. 나는 진격의 거인의 이 분위기, 약간 정신나가 있으면서도 비틀려 있는 분위기가 좋다. 작가가 복선을 회수해 가면서 분위기를 어떻게 잘 이끌어 갈 수 있을지가 주목된다. 10권임에도 불구하고 1권부터 눈에 띄였던 잔선은 그대로 남아 있다. 신인의 패기라고나 할까, 나는 지금에 와서는 이 잔선이 묘하게 작중의 분위기와 대응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호불호로 따지자면 호에 가깝다.
빈란드 사가는 같은 작가(유키무라 마코토)의 중편 플라네테스를 보고 마음에 쏙 들어서 보게 된 만화다. 역시나 나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중세는 좀 딱딱한 감이 없지 않다 보니 지루한 면도 있다. 그래도 바이킹들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무대라 활기차고 박력 넘친다. 거기다 아버지의 원수와 같이 행동하는 노르딕 소년이라니...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한 가지 주시할 점은 4권까지는 필름 느낌이 나게 컬러 작업을 했는데, 5권부터 그것이 디지털 작업으로 바뀌었다. 둘 다 멋지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디지털 세대인 나에게는 후자가 더 익숙하다. 그러나 그림체는 플라네테스에서 보여줬던 그대로다. 이 또한 작가의 매력이 아닐까 한다.
은수저야 뭐, 유명한 만화니까 생략하도록 하고, 3월의 라이온 이야기를 해 볼까. 전작 <허니와 클로버>는 읽지 못했기 때문에 뭐라 말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3월의 라이온 하나만 가지고도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3월의 라이온에는 프로 장기 기사인 주인공이 나온다. 무려 중학생 때 프로 데뷔를 한 주인공은, 그러나 불우한 가정사를 가지고 있다. 이야기는 주인공이 한 가정을 만나 서로가 서로를 치유해 나가는 과정을 따뜻한 필치로 담고 있다. 주인공 키리야마에게는 의지할 가족이 없고(양아버지는 있지만), 카와모토 가는 엄마와 아버지가 없다. 둘 다 일반인의 입장에서 보면 불행하기 그지없어 보이겠지만, 만화는 이 가정을 얕보지 말라는 듯 씩씩하게 그려놓았다. 보는 내가 봐도 가정에서 뿜여져 나오는 힘이 느껴질 정도다. 그럼 이제 글 제목이기도 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 보기로 하자.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사건이다. 나는 죽을 리 없어 하고 생각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고나 질병으로 인해 바로 세상을 떠나버리는 일도 허다하다. 이건 죽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라서, 사람들은 불안해하며 점을 보거나 건강검진을 받거나 보험에 들거나 한다. 죽음이 있고 나서, 남겨진 사람들은 자신의 남은 몫을 살아 나가야 한다. 키리야마는 양아버지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가족의 빈 자리를 완전히 채울 수는 없었다. 계속 지분거리는 누나에, 게임에 빠져 있는 남동생까지... 그에게 있어서 부재는 우선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 갑자기 가족이 죽어버렸다. 누구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키리야마 또한 새로운 가족에 들어가 부재를 메워 보려고 하지만, 계속해서 돌아오는 어색함에 장기에 몰입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져버린다.
3월의 라이온에서 펼쳐지는 프로 장기의 세계는 냉혹하기 그지없다. 자신이 실력을 쌓아 다른 사람을 이기지 못하면 그대로 낙오당하고 만다. 프로의 세계에서, 패배는 곧 낙오다. 키리야마는 가족을 잃고서도 양아버지의 도움으로 장기계에 입문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양누나와 갈등이 생긴다. 급기야 집에서 나온 키리야마는 대국료를 가지고 혼자 생활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제 키리야마에게는 누구도 의지할 사람이 없다. 그러다 그는 카와모토 가를 만나게 된다. 카와모토 가 또한 ‘부재’를 가지고 있다. 어머니의 부재, 아버지의 부재. 하지만 씩씩해서 눈물이 날 정도로, 이 가정은 팔을 걷어붙이고 열심히 살아간다. 따뜻한 저녁밥에 시끌벅적한 가정... 사이에 낀 키리야마는 어색해한다. 어색함을 지워 나가는 과정이 이 만화의 묘미다. 키리야마는 점차 마음을 타자에게 열어간다.
키리야마에게 부재가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면, 카와모토 가에 있어서는 그림자였다. 아버지는 다른 여자를 만나 떠나버리고, 어머니는 그만 병에 걸려 일찍 죽어버렸다. 남겨진 세 자매는 할아버지와 함께 그저 열심히 살아갈 수밖에 없다. 노력하고 노력해서 그림자를 묻어버릴 정도로.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 그림자는 무슨 짓을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부재는 끊임없이 같은 자리로 돌아온다. 아버지, 어머니의 빈 자리를 대신하는 아카리는 세 자매 중 가장 슬픈 존재다. 하지만 누가 눈물을 닦아줄 수 있을까? 키리야마는 세 자매의 눈물을 닦아주고 서로의 부재를 메워줄 수 있을까? 아직 답은 나와있지 않다. 우리는 그저 키리야마와 가정의 앞날을 응원해 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