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달리다
밤을 달리다, 라는 거창한 제목을 달았지만, 실제로는 그냥 추운 밤골목을 말 그대로 ‘달렸을’ 뿐이다. 왜 달렸는지는 묻지 말라, 그냥 달렸다. 가끔은 이렇게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리를 달리고 싶어서, 달린다고 뭐가 좋아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작정 달린다. 이러다 보면 숨은 숨대로 차고 추운 밤공기는 내 얼굴을 사정없이 때리고 지나쳐 가지만, 그게 나중에 가면 작은 쾌감을 안겨주기 때문에 달린다. 아, 그러고 보니 나는 이 쾌감 때문에 달리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역시 그건 아니다. 맞더라도 아니라고 하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나는 말을 하기 위해 몇 가지 단계를 거치지만, 글을 쓸 때는 그 ‘단계’란 게 보통 네 단계 정도로 구성되는 것 같다. 처음에 서두를 단다, 그리고 둘째로 주춧돌을 놓는다, 그리고 셋째로 기둥과 함께 지붕을 얹는다. 마지막으로 결론을 제시한다. 일종의 서론 - 본론 - 결론이다. 기승전결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다만 여기서 다른 점은 본론 - 결론에서 전개의 비약을 펼친다는 것이다. 읽는 독자들은 눈치채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본론에서 비약하지 않으면 결론을 내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 글은 단지 ‘재미없는’ 글이 될 뿐이라, 내 쪽에서 오히려 사양하는 편이다. 뭐, 사양한다고 해서 글이 완성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렇게 해야 속으로 만족감이 든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질 때도 더 좋다는 느낌이다. 실제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거야 내가 알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근데 내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더라? 아, 여행 얘기.
홋카이도 여행 얘기는 이미 했으니까 넘어가고, 지금 라디오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온다. 진행자의 목소리가 꽤나 크다. 단지 볼륨을 높인 것이겠지만. 여하튼, 최근에 갑자기 스위스에 가고 싶어서 비행기표를 검색하기도 하고, 스위스 패스를 알아보기도 하면서 욕망을 잠재웠더랬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유가 없는 게 아니다. 내가 스위스에 다녀오지 않았더라도, 스위스에 ‘다시’ 가고 싶다고 생각했을까? 스위스에 체류한 기간은 일주일 가량에 불과하지만, 그 시간 동안 내가 경험한 것은 그 일주일을 제외한 나머지 기간에 맞먹는다. 내가 스위스에서 체류했던 도시를 하나하나 읊어보자면, 로잔, 인터라켄 그리고 루체른인데, 그 중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바로 인터라켄Interlaken이었다. 융프라우 바로 밑에 있는 마을이 바로 인터라켄이다.
여기에는 특히 휴가철에 아시아인들이 많이 찾는데, 그 중에서 수가 가장 많은 것은 아마 한국인이 아닐까 한다. 중국인도 물론 많겠지만. 여기서 있었던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하자면, 중간에 융프라우로 올라가는 열차를 탔을 때 일인데, 창가 쪽에 앉아 있는 한 대만인? 동양인이 카메라를 들고 열심히 장엄한 풍경을 사진으로 담고 있었다. 나는 애매한 자리에 앉아서 밖을 보면서 dp2s를 들고 사진을 찍고 있는데, 갑자기 그 사람이 내게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는 거다. 그래서 나는 사양 않고 창가에 서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이 동양인은 나중에 정상에 올라갔을 때도 만날 수 있었는데, 그 순간에도 열심히 만년설이 쌓인 산을 향해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아마 다시 찾아오기 힘든 곳의 풍경을 사진으로나마 담아두고자 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내가 그의 사정을 알 리는 없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왠지 그런 느낌이 든다.
지금 폴 드 만의 『독서의 알레고리』를 곁에 두고 있는데, 서론만 읽었을 뿐인데 결론을 알 것만 같은 이 기분은 뭘까. 그리고 내가 지금 하는 얘기도 그와 비슷한 얘기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 간단해 보이지만, 실은 이게 복잡한 문제다. 내가 상대방의 진짜 마음, ‘의도’를 결코 알 수 없다는 것. 알려고 하지만 차마 알 수 없다. 아니, 처음부터 그쪽에서 자신의 마음을 연다고 해도, 나는 그의 의도를 100% 파악할 수 없다. 여기에는 아주 깊은 어긋남이 있다. 나는 이것을 종종 우물이라고 표현하지만, ‘우물’이란 쉽게 와 닿지 않는 표현임에는 분명하다. 이 또한 마찬가지로 내 의도를 상대방이 제대로 알 수 없는 한 가지 예가 아닐까. 그래서 나는 때때로 언어의 난관에 부딪히게 되는 것이다. 내가 어떤 말을 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제대로 나의 말을 받아들이는 경우란 거의 없다는 것. 그리고 나는 언제나 ‘전달’에 실패하고 만다는 것.
우리가 ‘미적분’으로 잘 아는, 뉴턴과 그것을 가지고 다투기도 했던 라이프니츠는, 『모나드론』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모든 존재의 단순 실체인 ‘모나드’라는 개념을 기초로 존재론과 인식론 및 신학과 우주론을 서술한다. 한 마디로 거의 모든 것에 대해 이 ‘모나드’라는 개념을 가지고 말한다고 보면 되겠다. 그래서 이 모나드라는 게 무엇이냐고 하면, 일일히 설명하자면 너무 많은데, 한 마디로 개체의 가장 단순한 단위라고 보면 되겠다. “모나드는 공간적 크기가 없으며 연장과 모양을 지니지 않는다”라고 라이프니츠는 말하지만, 유물론적으로 생각하면 이 전제는 기각당한다. 왜 그런지는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판명한 지각을 가지고 기억하는 모나드를 영혼, 의식이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모나드론이 재밌어지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경우에서다. 하나는 인간의 의식이 하나의 ‘익명’으로 표현되는 넷-공간에서이고, 다른 하나는 이와 같은 생각에 따른 모든 개념들-인류보완계획, 일반의지 2.0 등-에서다.
첫 번째의 경우는 너무 진부하므로 우선 넘어가기로 하자. ‘넷‘이라는 개념이 아직 진부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넷을 혐오하거나 아니면 ‘웹’을 이용해서 뭔가를 팔아먹으려는 사람일 것이다. 둘 다 내 글의 독자일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따라서 두 번째 경우로 넘어가자면, 이 ‘일반의지’라는 개념이 문제가 되는데, 현대에 와서 이 ‘일반의지’라는 개념은 전혀 다른 맥락 아래에서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루소가 살던 시대에 ‘일반의지’라는 개념은 그런 뜻에서 사용되지 않았다. 여기서 말하는 ‘그런 뜻’이라는 것은 지금 우리가 잘 이해하고 있는 의식(의지)의 산술적, 통계적 총합을 말한다. 단적으로 말해서 인간의 의식을 하나로 통합하는 일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가능하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가상현실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다. 물리적으로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몇 사람의 랜덤한 사람을 모아서 하나의 의견으로 일치를 보려 해도,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의견의 일치는 불가능해지고 만다. 하물며 의식에서야! 하지만 허구 아래에서는 무슨 일이라도 가능하다. 그리고 상상력의 극단이라고 한다면, 인류보완계획이라는 장대한 이념이 있다.
여기서 이념을 이데올로기로 이해해도 좋고, 아니면 한자 뜻 그대로 理念이라고 이해해도 좋다. 하지만 인류보완계획이라는 개념은 그 둘을 넘어선다. 어떤 뜻에서 넘어선다고 말하고 있는가? 바로 ‘실천‘이라는 뜻에서다. 인류보완계획은 거의 성공할 뻔했다. 마지막에 가서 실패하고 말지만, 전 인류의 의식은 LCL로 환원되어 릴리스의 알(검은 달)이라는 그릇 안에서 하나가 될 뻔했다. 에반게리온에 따르면 그렇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신지라는 녀석이 정신을 차려서, 인류보완계획은 실패로 끝나게 된다. 만약 정말로 모든 인간의 의식이 하나가 되기를 원했던 사람이 있다면, 신지는 자신이 대표하는 인류의 적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신지를 옹호하고 싶은 사람도 있다. (나는 사실 신지가 뭘 하든 상관없다는 쪽에 가깝다. 이는 안노 히데아키가 뭘 만들든 상관없다는 말과 거의 비슷하다.) 그 사람들은 인간은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고, 모나드는 다른 모나드에 완전히 접속할 수 없다고 말한다. 모나드와 모나드의 교통transportation만이 가능할 뿐이다. (그런 뜻으로 말하지 않았다고? 무슨 상관인가.) 그런데 이번엔 ‘교통‘이라는 개념이 또 문제가 된다. 합일이 아니면 교통이다? 대체 무슨 소릴까.
여기서 잠깐 물질대사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사전적으로, 물질대사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생물체가 몸 밖으로부터 섭취한 영양물질을 몸 안에서 분해하고, 합성하여 생체 성분이나 생명활동에 쓰는 물질이나 에너지를 생성하고 필요하지 않은 물질을 몸 밖으로 내보내는 작용.” ‘교통‘이라는 낱말은 정확히 여기에 대응한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교통이 있음으로 해서 물질대사가 가능해진다. 교통이 없으면 물질대사도 없다. 혈액이 산소와 영양소를 세포로 재깍재깍 운반해 주지 않으면, 물질대사는 정지하고 생명체는 죽음에 이른다. 아주 불행한 결말이다. 인류보완계획은 여기에 뒤집힌 전망을 제시한다. 모든 인간이 교통하는 대신, 이렇게 하면 어떤가. 그냥 아예 하나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교통의 필요성은 깔끔하게 사라진다. 그리고 이미 존재는 완전해졌으므로, 물질대사가 정지해 생명이 죽음에 이르는 위험도 사라져버린다. 신이 바로 그러한 것처럼. 나는 신지가 왜 갑자기 정신을 차려서 인류보완계획을 중지시켰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신지의 생각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그리고 이 글은 짐작을 길게 풀어쓴 것에 다름 아니다. 쓸데없는 소리를 덧붙이고 또 덧붙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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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한 부분은 언어 속에 기록되기는 한다. 하지만 그 부분은 또한 언어의 말소 순간이기도 하다.
말에 들어 있는 이 밤의 끝자락을 우리는 강박관념obsession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모사가는 화가의 붓놀림이나 저술가의 문체를 모방하며 차이가 안 보일 정도로 감쪽같이 해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들의 강박관념만은, 그들에게 최초의 지문이 봉함되어 있는 이 침묵 쪽으로 끊임없이 되돌아오게 하는 이 강박관념만은 결코 제 것으로 할 수 없을 것이다.” 1
나는 낮에 언어를 충분히 재현하는 데 실패했다. 그래서 이와 같은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밤을 달리는 일에는 일종의 포기가, 재현되지 않음을 고집하는 강박이 드러나 있다. 나는 나의 트윗과, 문장과, 글을 우습게 여길 수 있다. 그러나 내게 자꾸 강박을 가져오는, 내가 가지고 있는 한줌 식견으로는 알 수 없는 타자만큼은 우습게 여길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어김없이 내가 쓴 글을 우습게 여기고, 가치 없는 글로 치부한다. 마치 내가 이런 글을 쓰기를 전혀 바라지 않았다고 보이기를 바라는 것처럼.
- 환대에 대하여, p. 9-10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