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해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단편 중에 가장 인상깊었던 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아사'하는 네 젊은이를 다룬 글이었는데, '현실적으로' 사람이 하나씩 죽어가는 모습을 담담히 묘사한 게 지금도 기억난다. '죽음'에 비하면 존재란, 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바꿔 말하면, '죽음' 이후에야 존재자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고, 여기까지 도달하는 데는 다양한 길이 있겠지만, '죽음 이전'에 존재자가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죽음'에 걸맞는 '필사적인' 노력과 비장함이 없으면 안 된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죽는다는' 게 삶을 이해하는 데는 큰 도움을 줄 수 없을지 몰라도, 존재자가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각인시키는 데는 죽음만한 것이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따라서 누군가가 자살한다고 해서, 반드시 슬퍼할 이유는 없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죽음'에 대한 내 생각은 그 이후로 완전히 바뀌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사는 '실감'이 언제나 그 곁에 있기 때문이고, 특히 '죽음'에 이르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그것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불행하다'는 것에 대해서도, 그다지 비장함을 느낄 수는 없다. 어차피 누군가가 조용히 죽는 것을 다른 사람이 미리 알고 막을 수는 없고, '죽음'을 미리 막는다고 하더라도, 그 누구도 '죽음이 주어지지 않은 삶'에 대해 책임질 수 없으므로. 반대로 말하면, '죽음'이 주어져야지만 타자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죽음이 없으면 책임도 없다.
어제는 이런 트윗을 했는데—엄밀히 따지자면 어제와 오늘에 걸쳐서지만—나는 이 트윗을 흔히 볼 수 없는 진지함을 담아서 썼다. 그러나 언제나 진지함은 '농담'으로 치환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거기에 별 유감은 없지만, 조금 아쉽다는 생각은 들었다.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건 아마 1년 정도라고 추측하는데, 그 이전에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막연하기 그지없는 생각으로, 실제로 '죽겠다'는 결의를 담아서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나는 언제나 용기가 없었고, '죽음 이전'의 삶에도 마찬가지겠지만, '죽음'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때 죽은 친구들이 주위에 있었더라면, 나도 다른 '선택'을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 주위에는 죽는 애들이 보이지 않았다. 청소년 자살율이 그렇게 높지 않았던 탓일까, 아니면 억지로라도 '밝은 얼굴'을 하지 않으면 버텨낼 수 없는 환경이라서 그랬을까, 친구들은 다들 열심히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버텨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나는 막연히, '죽고 싶다'는 생각만을 거듭했다. 그래서, 지금에 와서 말인데, 현재의 나에게 묻고 싶다. 정말 죽을 마음이 있는 거야? 아니면, 단지 '죽음'이라는 것을 핑계로, 다시 살아볼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후자라면 나는 이 녀석을 지지할 수 있다. 할 수 있는 게 없는 놈이니까, 이런 식으로라도 살아갈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 전자라면 아마 이런 글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나'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