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인권영화제 후기
5월 22일부터 25일까지,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서울인권영화제라는 영화제가 열렸다. 서울인권영화제는 올해로 19회를 맞이하는데, 그동안 많은 우여곡절을 거치며 어엿한 하나의 영화제로 성장할 수 있었다. 올해는 4일에 걸쳐 이런저런 '사람들'과 '장소'를 다룬 영화를 상영했는데, 인상깊었던 마지막 날에 대해 짧게 말해볼까 한다.
마지막 날에 나는 4시가 조금 지나서 마로니에공원에 도착했다. 도착하고 보니 실낱같은 비가 내리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은 텐트 밑에서 준비된 의자에 앉아 영화를 보고 있었다. 상영작은 <밀양, 반가운 손님>이었는데, 책자에서는 영화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밀양투쟁을 바라보는 외부인의 시선에서 점차 밀양에 거주하면서 삶의 문제로서 송전탑을 바라보는 주민들의 시선으로 옮겨가면서, 편견이나 오해로 왜곡되어 있는 밀양투쟁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보고자 한다. 또한 송전탑 공사가 완료되어 가는 골안마을, 공사가 시작된 도곡마을, 공사가 시작되기 직전인 용회마을. 공사가 차례로 진행되는 세 마을의 이야기는 마을 입구에서 중턱 그리고 산 정상까지의 이미지로 그리는 한편, 초고압 송전탑을 둘러싼 다양한 쟁점들을 구조적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할머니들이었다. 할머니들은 영화 내내 카메라를 향해, 관객을 향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떤 할머니는 담배를 태우며, 일제 시절 결혼한 여자를 잡아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찍 결혼을 했고, 전쟁이 벌어져 남편이 빨갱이들에게 끌려가 버렸으며, 그로 인해 시어머니가 밤낮으로 산을 돌아다니다가 피를 토하고 죽어버렸고, 큰아들이 자원해서 베트남에 갔다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했다. 그리고, 송전탑을 향해서는 "일제 시절에도 이러지는 않았다"며,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할머니들은 계속 길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경찰들이 다가오면 시원하게 욕을 하기도 하고, 지팡이를 휘두르기도 하지만, 경찰들이 길을 막고 한전 직원들을 올려보내는 것을 힘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떤 아저씨는 경찰들을 향해 매우 강하게 욕을 했다. 경찰들은 웃는 낯으로 서 있었지만, 그것은 결코 현지 주민들에게 호의적인 태도가 아니었다. 경찰들은 언제라도 노인들을 막고 한전 직원들을 올려보낼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것은 경찰이 지키는 단 하나의 '원칙', 즉 윗사람의 명령을 무조건 따른다는 것에 기인했다. 경찰들은 화면에서 계속 등장했다. 낮이고 밤이고 비가 오건 눈이 내리건 가리지 않고, 그들은 초록색 야광복을 입고 경찰모자를 푹 눌러쓰고, 위에서 내려올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에는 어떤 자비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업은 반드시 성사되어야 했고, 어떤 장애물도 그곳에 존재해서는 안 됐다. 그것이 설령 가진 재산이 얼마 없는 힘없는 노인일지라도.
<밀양, 반가운 손님>이 끝나고 나서는 폐막식이 있었다. 폐막식에서는 신나는 섬이 공연을 했고(아주 좋았다), 자원봉사자들이 소감을 발표하는 시간이랄까, '성토회'가 있었다. 아무리 민주적으로 굴러가는 조직이라고 해도 반목과 트러블이 있기 마련이고, 그것은 서울인권영화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 이야기들을 몇 명의 자원봉사자들은 했다. 저녁이 되어 비는 한층 거세졌고, 시간이 빠르게 흘렀으며, 사람들은 이제 넓은 차양막이 펼쳐져 있는 스크린 바로 앞이나, 텐트 아래에 모여 앉았다. 그리고 폐막작 <탐욕의 제국>이 상영되었다.
<탐욕의 제국>은 삼성반도체 백혈병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상영 시간은 한 시간 반 정도였는데(그리 길지는 않다), 나에게는 그 시간이 굉장히 밀도 높게 느껴졌다. 한바탕 뜨거운 물을 뒤집어 쓰고 나온 것만 같았다. 컵밥을 먹으면서 영화를 보았는데, 중간에 울컥하는 부분에서는 내가 컵밥을 먹고 있어서 이러는 건지, 아니면 영화가 나를 이렇게 만드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모두가 집중해서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서움, 두려움, 이런 감정과는 거리가 멀게, 그러나 체념하는 것과는 다른 감정들이 영상의 사람들 사이에서 맴돌았다.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삼성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왜 사람을 죽게 내버려 두었냐, 사람을 죽여놓고 태연하게 있는 것이 말이나 되느냐, 삼성은 당장 나와서 사과하라, 이건희 이 개새끼야! 등등... 다들 너무나 억세고 용기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죽거나 아프지 않았으면 평범하게 살았을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게 바로 삼성이었다. 그리고 사람을 이윤 뒤에 놓는 자들이었다.
14일, 삼성이 처음으로 자사에서 일하다 "산업재해로 의심되는 질환으로 투병중이거나 사망한 노동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피해를 입은 분의 가족에게 보상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것이 이건희가 입원한 바로 뒤에 발표되었다는 점에서, 아직은 그들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과연 삼성이 약속대로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와 보상을 '진정성 있게' 수행할지는, 사람들이 삼성을 어떻게 생각하고, 또 이 문제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가지냐에 달렸다고 본다. 반도체 공장에서, 사람이 백 명 가까이 아프거나 죽었다. 어떤 이들은 오늘도 외로운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이윤에만 매몰되어 사람을 보지 않는 자본주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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