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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preintes du beau rêve

비 오는 날: 작은 왈츠 본문

novel

비 오는 날: 작은 왈츠

barde 2015. 5. 10. 02:08


나의 마지막 애가.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라고 기형도는 말했지만, 나는 오히려 사랑을 깨닫고 나서야 글을 쓰기 시작하는 것 같다, 고 문득 생각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기독교적인 의미에서의 아가페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남녀간의, 혹은 동성간의 사랑도 아니며, 하물며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는 그런 의미에서의 '사랑'도 아니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었던 건, 그러니까, 이를테면 홀든의 "이런, 젠장!damn it!" 속에 담겨 있는 사랑,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되려 인간에 대한 모종의 혐오와 복수심을 품을 수밖에 없는,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내지는 않고, 수줍게, 자신의 이야기를 빌리는 식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그렇게밖에 표현될 수 없는 사랑을 말한다. 내가 홀든에 대해 얼마나 잘, 또는 얼마나 깊게 알고 있는지는 아마 신이 아실 것이다. 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신을 진지하게 믿는다고 생각하지 말라. 신 앞에서 말하건대 나는 무신론자고, 여기에는 어떤 문학적 아이러니도 없다. 아마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이 글은 이 블로그의 공식적인 100번째 글이고, 그래서 나는 이 글을 하나의 '소설'로 마감하고자 한다. 진실의 이야기는 아닌, 하지만 나의 어떤 마음을 증거하는.


최근, 너무 열심히 산 나머지 불면증에 당첨되고 말았다. 불면증은 인구의 10% 정도가 당첨되는 복권이라고 하는데, 인구의 10%면 배당률이 너무 높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10%라는 수치도 납득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자, 잘 생각해 보자. 밤낮을 새워 일하는 사람이 인구의 30%라고만 쳐도, 그 중의 1/3이 불면증에 걸려버리는 건, 정말이지 일도 아닌 것이다. 잠깐,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더라. 그래. 불면증으로 나는 최근 고생했다. 고생했다고 말하면 어떤 고생인지 잘 모를 것 같지만, 불면증이 아니라면, 잠을 못 자서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아침 8시에 일어나서 오후 11시나 12시에 자는 삶 말이다. 내가 그런 삶을 결코 바란다고는 말할 수 없다. 잠깐, 방금 '있다'라고 적을 뻔했는데, 이건 실수겠지? 실수라고 믿자. 여하간, 나는 새벽에 글을 쓰는 일을 매우 좋아했는데,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새벽에 쓰는 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하나는 내가 새벽에 작업하는 일이 줄어들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새벽에 작업하는 글이 점점 불만족스러워졌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나는 타이프라이터로 종이에 타건하는 식으로 글을 쓰는데, 비유하자면, 새벽에는 그러한 일이 종종 카프카적인 경향을 띤다. 매우 경건하고 또한 엄숙한 가운데, '창작의 신'을 접선하게 되는 것이다. 앞 문단과 모순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분명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으니까. 맞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적어도 작년 9월부터는 그랬다. 더이상 나는 신에게 나의 창작의 원천, 영감의 샘물, 창작을 위한 진정한 영을 요구하지 않으며, 그래서 나는 점차 몰락해 갔다. 몰락하는 척을 했다. 그게 재밌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글을 쓰지 않는다는 이유에 대해 책임지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내가 가장 잘 알게 되었다. <생각하는 갈대>에도 비슷한 말이 나오는 것 같은데, 내가 태어난 이상, 나는 글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글이란 곧 나의 숙명과 같다. 잠깐, 오해하지 마시라. 내가 글의 숙명인 거지 글이 나의 숙명인 것은 아니다. '창작의 신'으로부터의 이탈이란 바로 이것을 지시한다. 나는 누군가 내게 "어떻게 해서 글을 쓰게 되었나요?" 라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할 작정이다. "글쎄요, 저는 깨닫고 보니 그냥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글을 쓰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갑자기 창작의 신이 내게 다가와서 '자, 이제 때가 되었으니 노트북을 열고 글을 써라. 그냥 쓰기만 하면 된다. stay writing.'이라고 말한 것도 아니고, 뭔가의 야망을 품고 글을 쓰게 된 것도 아닙니다. 저는 그냥 평범한 학생일 뿐이었고, 내가 지금 맞는 길을 걷고 있는 건가, 혹은 뭔가 다른 일을 해야만 하는 건가 고민하는 학생에 불과했으며, 그러다 문득 깨닫고 보니, 정말로, 아무런 양해 없이, 글을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글이란 게 모든 사람에게 그렇지는 않겠습니다만, 적어도 제게 있어서는 글은 하나의 실타래, 물줄기와 같은 것으로, 정신을 놓고 보면 문장이 완성되어 있고, 그 문장이 무언가 특별한 것을 지시하고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모아놓고 보면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그런 문장들이었습니다. 저는 거기서부터 글에 대한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처음 걸을 때는 어디로 향하는 길일지 모르고,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도 전혀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걷다 보면 길이 되고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야기를 예전부터 좋아했습니다. 동화들도 좋아했고, 작은 소설들도 좋아했으며, 때로는 매우 긴 소설을 읽으며 소설 안에서 펼쳐지는 넓디넓은 세계에 감동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그러한 이야기들이 제 안에 모여서, 문장들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저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연습하고 반복한 결과, 하나의 '글'이라는 형태로 완성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글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여기 다 들어있다. 질문이란 때론 모습을 위장하고 변덕스럽게 차이를 만들어 내는 괴물 같은 것이라, 나는 우발적으로 질문에 답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나를 불만족스럽게 만들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나는 '준비된 질문'을 받고 준비된 대답을 하고 싶었다. 거기에 조금 더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있으니까. 하지만 생각해 보면 역시 작가는 글로 말하는 존재이니, 질문에 대한 답보다는 글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싶다. 원망스럽고, 때로는 망치를 들고 부숴버리고 싶지만, 그래도 역시 말보다는 글이 더 믿음직스럽다. 쉽게 사라지는 것들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찰나의 순간이라거나, 약속된 사랑이라거나, 겨울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설상이라거나, 그런 것들. 그보다는 나는 책으로 고정된 활자들을 훨씬 더 선호한다. 믿음직스럽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내가 그것들을 믿을 수 있는 이유는 결국, 그들이 결코 자신의 거처를 제공해 주는 종이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며, 세월의 풍화에도 단단한 글자로 남아 후세에서 후세로, 사람에서 사람에게로 읽힐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불면증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길어진 것 같다. 정말로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여기 있는지, 아니면 다른 곳에 자리잡고 잠들어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아주 일부, 조각 몇 개 정도는 이 글에 담겨 있는 것 같다. 그런 느낌이 든다. 트위터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야기, 아마도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들. 그런 것들을 나는 사랑하고, 그래서 내가 이 블로그에 마지막 소설을 올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슬플 뿐이다. 안녕, 모든 것들. 안녕,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 안녕, 블로그에 잠들어 있는 모든 기억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라고 강사가 말했을 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전 11시 20분, 아직 수업이 끝나기까지는 20분 남았을 시간이었다. 나는 강사에게 뭐라 말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몸놀림이 여간 재빠르지 않은 강사는 이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린 뒤였다. 나 참, 저래서야 교수로 승진할 수 있겠냐고, 나는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강사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싹트는 것을 거부할 수 없었다. 내가 왜 그를 좋아하는지, 내가 왜 그의 수업을 듣고 그가 하는 말을 마치 애인의 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경청하는지, 나는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다. 아마 강사가 전생에 나의 애인이었을 거라고, 멋대로 추측해 보는 게 다다. 말이 되는 소리인가? 강사가 내 애인이라니. 나는 남자이고, 강사 또한 남자인데.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일이 이제 보편화되었지만, 그래도 나는 여자를 좋아하는 편이라고 굳게 믿어 왔었다. 아니, 고등학교 때도 여자를 좋아하는 마음을 품어보기도 했고 말이다. (결국 고백하지 못했지만) 어쩌면,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강사를 스승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스승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전이'라는 식으로 표현되어 사랑하는 기분이 잠깐, 아주 잠깐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가볍게 가방을 매고, 손에 들고 있던 레몬티를 가방 안에 넣은 뒤에,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강의실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밖에 나와 강사의 모습을 눈으로 찾아보았지만, 강사는 어디에도 없고, 심지어 기둥 뒤에도 그림자를 늘어뜨리지 않은 채, 거기에는 오직 다음 수업을 위해 타박타박 하는 발소리를 내는 머리 좋은 학생들만이 주랑 위를 걸어갈 뿐이었다. 나는 뭔지 모를 쓸쓸함을 느꼈지만, 스승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림자를 밟지 말라는 말이 갑자기 생각나서였을까, 되려 안심하는 마음이 들고 말았다. 아마 나는 다음에도 저 수업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강사가 수업에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나는 노트에 필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거기에 뭐가 적힐지는, 아마 하느님만이 아시겠지.


이제 정말로 끝. 애가는 짧을수록 좋다, 고 실러가 말했다. 프리드리히 실러가 아닌 다른 실러가. 그의 진짜 이름은 비밀이다. 그리고 우리가 나눴던 모든 이야기들도,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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