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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preintes du beau rêve

불행함 본문

etc.

불행함

barde 2013. 6. 27. 03:08




  불행함을 경쟁하는 것은 꼴불견이다. 어차피 다 불행한데, 거기서 가장 불행한 사람을 골라낸다는 게 얼마나 꼴사나운 일인가. 그래서 불행함을 경쟁하는 일은 대타자를 겨냥하거나 자기연민을 남발하는 식으로 기피된다. 하지만 불행한 사람 중에서도 가장 불행한 사람은 존재한다. 그런데 불행의 기준이 뭘까? 자신이 불행하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는데, 남이 나보다 더 불행하거나 덜 불행하다고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불행함을 경쟁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진흙탕에 뛰어드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진흙탕에 뛰어들어 열심히 굴러서 누가 더 몸에 진흙이 많이 묻었나 경쟁하는 것이다. 여기서 진흙이 가장 많이 묻은 사람은 왕중왕이 된다. 하지만 그는 진흙이 눈에 묻어 앞을 볼 수가 없다. 불행함을 경쟁함이 꼴불견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내가 병신이 되어야 불행왕이 될 수 있다.


  지브리의 숨겨진 명작 중 하나 <바다가 들린다>를 보면서 90년대에 청춘을 보낸 사람과 00년대에 청춘을 보낸 사람을 비교해서 생각해 보았다. 어차피 90년대에도 가장 불행한 사람이 있었다고 어물쩡 넘어가 버리기에는, 삶의 질적인 차이가 너무나 확연히 드러난다. 90년대, 그러니까 일본으로 따지면 버블 이전에 청춘을 보낸 세대는 얼굴 색부터 다르다. <썸머 워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얼굴과 <바다가 들린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얼굴을 비교해 보라. 빛깔 자체부터가 다르다. <썸머 워즈>에 나오는 애들이 비교적 행복한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다른 시간을 보내면, 그 때의 시간이 이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00년대에 청춘을 보낸 사람은 <바다가 들린다>를 보면서 '이런 청춘은 있을 수 없어!' 하면서 현실도피를 하거나 90년대에 청춘을 보냈어야 했다고 실현 불가능한 후회를 할 수밖에 없다. 둘 다 꼴불견인 건 확실하다. 어차피 모두 불행하니까.


  내가 불행하다고 하소연하는 일은 무척 쉽다. 이마에 "불행" 두 글자가 찍혀 있는 세대는, 굳이 입으로 꺼낼 필요도 없이 "나 불행해요" 하는 얼굴만 취해주면 사람들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으면서 "그래, 참 불행하구나." 하고 동정해 준다. 아이고 고마워라 하면서 받아들이는 자도 있고, "나는 불행하지만 그건 너희들 때문이다" 하면서 핏발을 세우는 자도 있다. 하지만 불행함은 일종의 물려받은 빚 같은 것이라, 내가 원래 빚을 진 사람을 원망해 보았자 빚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은 결국 나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영원히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사토리 세대처럼 아예 해탈해 버릴 수도 있고, 계속 세상과 싸우면서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생존경쟁에서 밀려버리면 낙오해서 패배자의 삶을 살거나 자살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웃긴 얘기지만, 어쩌면 미래에 더욱 가열찬 방식으로 고통받을 것임을 알고 자살해 버린 어린 청춘들이 가장 현명했던 건 아닌지.


(이미지는 <바다가 들린다>의 한 장면을 골라 보았다. 짙푸른 녹음 아래를 걸어가는 두 사람의 밝은 모습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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