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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실패한다는 감각 본문

etc.

언어가 실패한다는 감각

barde 2014. 5. 8. 08:37




최근 <호밀밭의 파수꾼>을 리뷰한 글을 읽었다. 거기서, 필자는 소설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이란 꿈이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신있게 비관할 수 있는 건 줄거리가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홀든은 D. B. 같이 변절하는 어른의 세계를 혐오하고 피비와 앨런 같은 아이들을 순수의 결정체로 이상화하지만 그 이분법적 오류는 마지막에 가서 깨지고 만다. 혹자의 착각과 달리 이 이야기는 쉽사리 희망을 말하지 않으며, 아주 작은 성장의 처참한 실패기이기도 하다. 정신병원에 갇힌 홀든의 마지막 결말은 이 사회가 아이들의 팔다리를 잘라 무기력하게 만드는 풍경이자, 동시에 홀든 스스로도 자신의 알 껍질을 깨지 못하고 좌절하는 비극의 풍경이다. 우리가 보통 상상하는 성장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용감함에 이 소설의 전복성은 지금도 빛난다.”


나는 여기에 대해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책을 다시 펼쳐보고서야 알았다. 이제까지 내가 가졌던 감상이, 단지 하나의 해석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언어가 명백히 실패하고 있다는 느낌을 얻었다. 이것은 왜일까.” 라는 감상을 남겼다. 그리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역시 저 곳에서 언어는 실패하고 있었다.


우선 “언어가 실패한다”는 것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여기서 말하는 “언어가 실패한다”는 것은, 해석의 언어가 아닌 소설의 언어가 실패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호밀밭의 파수꾼>의 작자인 샐린저가 의도한 메시지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해석은 메시지를 성공적으로 잡아내지 못하거나, 혹은 작자가 의도한 메시지가 아닌 전혀 다른 메시지를 잡아내 그것을 소설의 ‘전복성’으로 내세웠다는 말이다. 나는 원작자의 의도가 문학작품을 해석하는 데 있어, 그것이 특히 반세기가 지난 소설일 경우, 그리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쪽이다. 작품은 얼마든지 새로운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그러한 해석의 ‘가능성’이 넓게 열려 있는 소설이야말로, 높은 평가를 받는 소설이다. 그러나 내가 제기하고 싶은 문제는 이와는 조금 다르다. 아주 미묘하지만, ‘다름’을 눈치챌 수 있는 정도만큼 다르다.


나는 우선 홀든 자신의 말을 소설에서 인용해 보고자 한다. 거기에서 홀든은, 자신의 문학관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고전소설들을 많이 읽었다. 『귀향』과 같은 책들을 좋아하고, 많은 전쟁소설과 미스터리물도 읽었다. 하지만 그 책들은 그렇게까지 내게 강한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정말로 나를 황홀하게 만드는 책은, 그 책을 다 읽었을 때 작가와 친한 친구가 되어 언제라도 전화를 걸어, 자기가 받은 느낌을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 물론 그런 일은 그렇게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다. 이삭 디에센과 같은 작가는 전화를 걸고 싶은 사람이다. 링 라이더도 마찬가지이지만, 형 말에 따르면 그는 죽었다고 했다. 지난 여름에 읽었던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에서』와 같은 책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면, 상당히 좋은 책임에는 분명하나, 몸에게 전화를 걸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만들지는 못했다. 어째서 몸이 전화를 걸고 싶지 않은 사람에 들어가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보다는 차라리 토머스 하디에게 전화를 걸고 싶다. 난 유스티셔를 좋아하니까.”


여기서 홀든은 자신을 황홀하게 만드는 책에 대해, “그 책을 다 읽었을 때 작가와 친한 친구가 되어 언제라도 전화를 걸어, 자기가 받은 느낌을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느낌을 주는 책”이라고 설명한다. 왜 하필이면 홀든은, 작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다고 생각했을까. 작가에게 전화를 건다는 일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지금에서야 스마트폰으로 자유롭게 연락을 나눌 수 있고, SNS를 통해서도 말을 걸거나 서로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지만, 불과 20세기만 해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연락을 나눌 수 있는 수단은 편지, 전화 그리고 (이건 20세기 말의 일이지만) 이메일밖에 없었다. 이메일을 논외로 하면, 누군가에게 안부를 전하기 위해서는 편지를 쓰거나, 전화를 걸어야 했다. 아무래도 보내는 데 며칠이 걸리는 편지보다는 전화가 나을 테니까, 사람들도 점점 편지보다는 전화를 애용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홀든도 작가에게 편지보다는 “전화를 걸고 싶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흥미로운 점이 있는데, 작중에는 홀든이 전화를 거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샐리에게 전화를 거는 것도 그렇고, 호텔에서는 매춘부에게 전화를 걸고, 그리고 자신의 집에서 앤톨리니 선생에게 전화를 걸기도 한다. 홀든은 시도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댄다. 그리고 수화기 너머에는 언제나 홀든의 전화를 받는 ‘누군가’가 있다. 홀든은 거기에서 자신의 몸을 기댈 수 있는 거처를 발견한다. 전화기 너머의 상대는 쌀쌀맞을 때도 있고, 혹은 다정할 때도 있지만, 홀든에게 그것은 그리 큰 차이가 아니었다. 홀든에게 있어 전화는, 상대와 대화를 나누는 매개체를 넘어, 누군가의 곁에 있다는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작고 따뜻한 방이었다. 마찬가지로, 홀든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히고, 전화를 건다는 행위는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리고 누군가에게서 동감을 갈구하는 몸짓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홀든이 지나가듯이 언급한 “작가와 친한 친구가 되어 언제라도 전화를 걸어, 자기가 받은 느낌을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단순한 지나가는 말이 아니었던 거다.


따라서 앞서 말한 “언어가 실패한다”는 말은, 홀든의 전화가 단지 ‘전화’ 그 이상이 되지 못했다는 말과 같다. 전화가 전화로 남고 이야기가 이야기로 남는다면, 나는 그것이 단순히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벌어지는 사태가 아닌, 모든 소설에서 벌어지는 “언어가 실패하는” 사태로 이해한다. 물론 여기에는 적절한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겠지만, 이 “언어가 실패한다”는 감각에 대해 제대로 얘기할 수 있으려면, 다른 ‘감각’이 선행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이것 또한 나의 개인적인 ‘느낌’에 지나지 않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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