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N (100)
l'Empreintes du beau rêve
나의 마지막 애가.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라고 기형도는 말했지만, 나는 오히려 사랑을 깨닫고 나서야 글을 쓰기 시작하는 것 같다, 고 문득 생각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기독교적인 의미에서의 아가페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남녀간의, 혹은 동성간의 사랑도 아니며, 하물며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는 그런 의미에서의 '사랑'도 아니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었던 건, 그러니까, 이를테면 홀든의 "이런, 젠장!damn it!" 속에 담겨 있는 사랑,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되려 인간에 대한 모종의 혐오와 복수심을 품을 수밖에 없는,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내지는 않고, 수줍게, 자신의 이야기를 빌리는 식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그렇게밖에 표현될 수 없는 사랑을 말한다. 내가 홀든에..
아름답다, 너무나 아름답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한편, 생각이 나서 구글에서 라고 검색해 보았다. 구글은 내게 다음 영화를 추천해 주었다. 나는 거기로 들어가, 사람들이 남긴 별점평을 하나하나 읽어보았다. 사람들의 별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이와이 슌지의 섬세함, 영상미"라는 높은 평가였고(숫자로 따지자면 8에서 10점), 다른 하나는 "지루하다. 순백의 변태. 스토리가 없다"는 짜디짠 평가였다. (숫자로 따지자면 2에서 0점. 0점과 2점이 비등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총점은 6.7점, '열심회원'의 평점은 7.5점이었다. 열심회원의 평점이 조금 높은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열심회원 중에서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팬이나, 일본영화의 문법에 익숙한 사람들..
라미레지를 받았다. 꿈에서, 아니 바로 어제. 그녀는 프랑스로 유학을 간다고 했다. ENS인가 어딘가, 굉장히 엘리트가 되고 싶은, 아니면 이미 엘리트인 애들이 가는 곳이라는데, 고등학교 입시 이후부터 계속 서연고… 만 외워온 나는 잘 모르는 대학이다. 엄밀히 따지면 ‘대학’이 아니라고 했나. 국내에선 보통 “고등사범학교”라는 이름으로 통용된다고 하지만, 우선 이 “고등사범학교”라는 이름부터가, 너무 낡았다. 요새는 이런 촌스러운 이름을 쓰지 않고, “교원대학”이라는 세련된 이름을 사용한다. 아니면 “교육대학”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거나. 그래서 이 “고등사범학교”라는 이름은 일본에서 온 것인데… 쉽게 말하면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칠 교원을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대학이다. 대학이 아니라고 앞에서 말했지만, 우선..
소행성 B3. 자리를 잃어버린 목소리와 기억들이 모이는 곳. 어쩌면 그것들의 유일한 안식처라고도 할 수 있는 곳. 나는 지금 소행성에 발을 딛고 서 있다. 기억을 발굴해 내기 위해, 그리고 목소리를 찾아 돌아가기 위해. * 은하인의 대부분은 신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당신이 뭔가 눈치채는 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들이 우주를 강하게 의식하고, 우주 ‘아래서’ 살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물론 신을 믿는 행성도 많이 있지만, 그러나 연방과 접촉하고 있는 모든 행성 가운데서는 비교적 적은 편이다. 말 그대로 은하인들은 우주와 함께 태어나 우주와 함께 사라지는데, 그러한 감각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은 바로 우주선 안이다. 우주선 안에서 칠흑같은 암흑을 바라보고 있으면…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우..
언젠가, 언젠가의 겨울밤에, 나는 내가 바로 앞에 총구를 마주하고 있다는 상상을 했고, 공포에 떨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내가 만약 현실에서 그런 일을 당했을 경우, 나는 침착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가 밤이 되면 이불 속에 들어가, 겁쟁이가 된다는 사실을 의미하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히 나는 총구를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것은 사람을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본다면, 그것이 '총구'만을 두려워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내가 두려워했던 것은 '총구'가 아니었다. 내가 두려워했던 것은, 그러니까 길게 풀어서 설명해 보자면, 사람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잔인함, 천진난만함 그 자체였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친구의 부탁으로 지난번에 적은 글, 우산의 저주를 이어서 써 볼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 시각은 오전 4시 46분이지만, 그것이 내가 글을 쓰는 데 크게 문제가 되거나, 혹은 글을 쓰다 잠들어버린다거나 하는 일을 발생시킬 만한 커다란 변수가 되지는 않는다. 여하간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으니, 바로 뒤의 일부터 적어내려 볼까 한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우산을 쓰고 숙소에 도착했다. 이 숙소는 게스트하우스인데, 아는 사람은 잘 알겠지만 게스트하우스라는 곳은 여러 사람이 묵었다 떠나는 곳이다. 그래서 이제까지 묵었던 사람들이 사용했던 우산들이 하나가득 꽂혀 있다. (다행히도, 칫솔이나 쓰던 티슈, 성냥 같은 물건은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나도 거기에 내가 쓰던 우산을 하나 꽂았다. 이때까지..
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단순하고 명백하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는 가까운 미래의 인류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그렇다는 말은 곧, 영화관에 앉아서 편하게 팝콘을 먹고 있는 우리들 또한 그러한 미래를 겪으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물론 병충해로 식량을 구할 수 없는 사정은 하나의 가능한 미래에 지나지 않는다. 인류는 언젠가는 자신들이 터전을 일구고 살아왔던 요람, 어머니 대지를 떠나야 하며, 그를 위해서는 (영화의 시나리오대로라면) 중력 방정식을 풀어야 한다. 그리고 중력 방정식을 풀기 위해서, 누군가는 블랙홀에 들어가야 한다. 또한 이 모든 일들이 시작하기 이전에, 한 가족의 이야기가 있다. 영화를 본 우리는, '머피의 법칙' 머피가 본 유령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 머피는 ..
인간이 다른 인간을 불신하게 되는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그런 이유들을 가지고 '인간불신'이라는 포지션을 가지고, 그것을--이를테면 죽을 때까지--유지하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문득 생각해 보면 이것이 당연하거나 자명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왜 그들은, 그러니까 인간을 불신할 만한 충분한 동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인간을 불신하지 않을까? 인간이 단순히 사회적 동물이라 그런 걸까? 만약 스티븐 핑커의 말대로 인간 본성이 '선한 천사'를 가지고 있다면, 사람들은 점차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보다는 협동하고 협조하는 이타적인 길을 택할 것이다. 그러나 가설을 뒷받침할 방대한 양의 역사적인 자료가 주어진다고 해서, 과연 인간이 '불신'이라는 포지션을 쉽게 포기할까? 바꿔 말하자면, '인간불신'이라..
"자살하면 편해진다"는 말은 이제 하나의 클리셰로 성립할 정도로 흔하디 흔한 말이 되었지만, 실제로 자살해면 편해지는 건지, 아니면 그것보다 더 괴로운 삶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지는, 적어도 살아남은 자들 중에서는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 (일부 '귀신과 접촉했다'고 증언하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그러나 실제로 자살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그 뒤에는 편하고 평화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이것도 만들어진 이미지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괴로운 삶을 보다 '생생한' 것으로 여기는 한편, 자살 뒤의 삶에 대해서는 생생함을 결여한 초월적인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즉, 사람들이 생각하는 '죽음 뒤의 삶'이란, 실은 현실적이지 않다면 무엇이라도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최근, 어쩌다 보니 논논비요리를 보게 되었다. 만화는 꽤 잘 만든 일상물이었고, 딱히 흠 잡을 만한 곳도 없었지만, 한 가지 드는 생각이 있었다. 뭐냐고 하면 바로, "시골은 정말로 무서운 곳이 아닐까?" 라는 것. 알다시피 논논비요리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배경은 시골 중에서도 시골, 도쿄에서 '6시간'이나 걸리는 깡촌이다. 원작의 배경이 오카야마 현의 츠야마 시라고 한다면, 실제로 도쿄에서 도카이도 신칸센을 이용해 오카야마역까지 간 다음에, 거기서 츠야마선을 타고 츠야마역까지 간 다음, 거기서 키신선이나 인비선으로 갈아탄다고 한다면(갈아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6시간이 걸리는 것도 납득할 만하다. 여하간, 각설하고 원래 질문으로 돌아와 본다면, 논논비요리에서 그려지는 시골은 너무나 평화롭고, 또한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