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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preintes du beau rêve

붉은 실 본문

novel

붉은 실

barde 2013. 4. 22. 23:25


초등학교의 한 학급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에 학교에는 '붉은 실'이라는 놀이가 유행하고 있어, 남자 혹은 여자가 "붉은 실을 발견했다"고 말하면 그 둘은 짝이 되어 일 년을 보내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어디까지나 놀이에 지나지 않았지만, 가끔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한 남자아이가 있었다. 벚나무가 만개한 벚꽃을 흩날리던 어느 날, 남자아이는 새끼손가락을 보더니 "붉은 실이다!" 하고 외쳤다.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새끼손가락만을 편 채로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더니, 가만히 앉아서 실뜨기를 하고 있던 여자아이의 손목을 탁 하고 잡았다. 여자아이는 놀라서 "어?" 하고 놀람이 담긴 물음을 내뱉었지만, 남자아이는 갑자기 여자아이의 손가락을 펴더니 다시금 큰 소리로 외쳤다. "붉은 실이 이어졌다!" 내용과 목소리 둘 다에 교실에 있던 모두가 놀랐다. 잠시 후 여자아이는 울상을 짓더니 "그럴 리가 없잖아..." 하고 맥빠진 목소리를 흘렸다. 그 때 마침 담임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다. 선생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보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사건의 진원지로 파악되는 남녀에게로 걸어갔다. 남자아이는 선생님을 보고서도 당당하게 외쳤다. "제가 붉은 실을 발견했어요."

 

선생은 잠시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남자아이의 새끼손가락을 확인하고, 그리고 여자아이의 새끼손가락을 확인한 뒤에 한 마디만을 내뱉었다. "그래." 그리고는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이 다시 교실 밖으로 나갔다. 여자아이는 이제 포기한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둘 사이에 불쑥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붉은 실이 눈에 보인다고?" 다른 여자애들도 그녀의 질문에 동의했다. 붉은 실이 눈에 보일 리가 없다, 그건 놀이일 뿐이다라고. 거기에 맞서 남자애들은 이렇게 응수했다. 붉은 실은 똑똑히 눈에 보인다고, 보이지 않는 게 이상하다고. 일단 선생님이 "그래." 라고 말했으므로 남자아이는 그 여자아이 옆에 앉아도 아무 문제 없었다. 하지만 옆에 앉을 수 있다는 권리를 증명받아야 했다. 그래서 남자아이는 창가 쪽으로 걸어가더니 새끼손가락을 똑바로 펴고서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처음엔 다들 그가 뭘 하는지 모르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거미줄같은 얇은 빛줄기가 보였다.

 

빛줄기는 펼쳐든 새끼손가락의 아래로 아래로 이어져 울상을 짓고 있는 여자아이 근처로 가 닿았다. 그녀 주위에 아무도 없었으므로 실은 그녀에게 이어져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제서야 아이들은 붉은 실이 둘을 잇고 있다는 것에 수긍하는 모습이었다. 붉은 실이 결코 보일 리 없다고 주장하던 여자아이도 말문이 막힌 채 반짝이며 빛나는 얇은 실을 바라보았다. 색은 알 수 없었다. 햇빛이 실에 반사되어 빛줄기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끼손가락을 잇고 있는 실은 붉은 실이 아니면 어떤 실도 아니었다. 남자아이는 소중히 새끼손가락을 접고는 여자아이 곁으로 다가갔다. 남자아이가 여자아이 옆에 앉고 바람의 방향이 한 번 바뀌자 수업종이 울렸고, 곧이어 선생님이 들어왔다. 선생은 나란히 앉아 있는 짝의 모습을 짐짓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나 종업식이 되었다. 이제는 여자와 남자 누구도 울상을 짓거나 새끼손가락을 펴 자랑스럽게 내보이지 않았다. 둘은 그저 서로가 옆에 앉아 있다는 인식만 하고 일 년을 보냈다. 어디까지나 붉은 실은 '놀이'였기 때문이다. 종업식이 끝나고, 모두가 한 학년 올라간 채로 봄방학을 맞게 되었다. 남자아이는 여자아이와 그 이후로도 같은 반에서 나란히 자리에 앉았을까? 잘 모르겠다. 어쩌면 여자아이는 벚꽃이 다시 피기 전에 전학을 가 버렸을지도 모른다. 혹은 남자아이가 더 이상 붉은 실을 믿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다양한 경우의 수들이 있지만, 그 날 모두가 기억했던 것은 햇빛을 받아 반짝이던 얇은 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것이 설령 남자아이의 짓궂은 장난이라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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