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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preintes du beau rêve

인상 #3 본문

novel

인상 #3

barde 2013. 4. 22. 23:23



두둥실 떠 가는 풍선을 보고 있는 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으레 노인을 끌고 다녔는데, 노인은 하는 일도 없이 그저 하루에 한 번 공원에 건들거리며 무료배급 차에 줄을 서서 점심을 먹었다. 노인이 아직까지 살아 있는 이유는 필시 하루에 한 끼밖에 먹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소년은 노인이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쓰지도 않고 풍선을 쫓는 강아지를 쫓거나 토끼 모양 구름을 하루 종일 바라보거나 할 뿐이었다. 노인은 그런 소년의 옆에서 짚신을 짜는 흉내를 내며 무료한 시간을 실타래를 풀듯 보냈다. 노인은 가끔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대화는 보통 이렇게 시작된다.
"그런데 소년, 뭐 재밌는 이야기 없어?"
그러면 소년은 이렇게 답한다.
"재밌는 이야기? 재밌는 이야기가 뭔데?"
소년의 대답을 들은 노인은 한숨을 길게 내쉰다. 푸우우욱 하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 노인은 조용히 짚신을 짜더니 체념했다는 듯 건성으로 답한다.
"재밌는 이야기는 웃긴 이야기야. 이야기를 듣게 되면 깔깔 호호 와르르 웃게 되는 이야기지. 아무래도 너는 그런 이야기를 하나도 모르나 보군."
소년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뭔가 생각났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답한다.
"어? 나 재밌는 이야기 알아. 으흐흐흐"
노인은 이제 재밌는 이야기 따위는 알 바 없다는 얼굴로 짚신 짜기에 열중하고 있다. 짚신은 거의 다 짜였는지 노인의 손질도 마무리를 향하고 있었다. 소년은 다시 고개를 들어 날아가며 높아지는 풍선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아이가 달려왔다. 소년은 빠르게 사라지는 아이의 잔상을 망막에 남기며 풍선과 아이를 동시에 생각해 보았다. 아이는 분명 풍선을 손에서 놓쳐 달려가고 있는 걸게다. 거기까지 생각한 소년은 생각을 그만두었다. 노인은 바짓단을 툭툭 털며 일어났다. 친구하고 소주를 마실 약속이라도 잡은 모양이었다. 노인이 떠난 자리에, 소년은 홀로 남아 하늘에 둥실 떠 있는 구름의 수를 손가락으로 하나, 둘 하며 세었다. 백 서른 개쯤 세었을 때 이미 날은 어둑해져 있었다. 하늘은 이미 노을이 점령해 있었고, 날아가는 비행기가 남긴 비행운도 살구빛으로 뿌옇게 그을려 있었다. 소년은 저녁을 먹기 위해 공원을 가로질러 몇몇 가난한 사람들만 알고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아이가 밑이 탄탄한 신발로 땅을 내딛는 경쾌한 소리가 골목과 공원을 울렸다. 그 뒤를 따라가는 머리가 길고 짧은 아이들 몇이 있었다. 소년은 배가 고프다는 걸 꼬르륵 소리와 함께 느끼며 다 해진 슬리퍼를 질질 끌며 낮은 언덕을 올랐다. 저 멀리 굴뚝에서 연기가 오르고 그 뒤로 거대한 공장 굴뚝에서 검정이 섞인 살구빛 연기가 하늘로 흩어졌다. 빨래집게를 줄줄이 매단 빨랫줄이 전깃줄과 평행하며 늘어져 있었다. 빵 굽는 냄새가 골목 밑에서부터 올라왔다. 세탁소 와이셔츠는 굴비처럼 유리창 너머로 줄줄이 걸려 있었다. 뒷집 아줌마와 옆집 아줌마가 강냉이 같은 화제로 서로 낄낄대며 고추가 싸다느니 하는 정보를 공유했다. 엉엉 우는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소년은 언덕을 계속 올랐다. 왼쪽으로 꺾으면 소년이 아는 식당이 나왔다. 소년은 노을을 뒤로 받으며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엔 몇 명의 후줄근한 차림을 한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시끄럽게 떠들며 술을 마셨다. 소년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 빈 자리에 가서 앉았다. 주인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뚝배기를 하나 가져다 주었다. 소년은 고개를 뚝배기에 박고는 숟가락만 들어 느리게 음식을 먹었다. 여전히 떠드는 소리는 시끄러웠다. 하지만 소음에 익숙해진 소년에게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주인으로 보이는 아저씨는 카운터 안쪽에서 팔을 걸치고 작은 TV를 쳐다보고 있었다. 떠드는 소리 때문에 TV에서 뭐라고 말하는지 안 들릴 게 뻔했지만, 전혀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어찌보면 무신경하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길어진 그림자는 허름한 식당에 다가올 밤을 알렸다. 소년이 밥을 다 먹을 때쯤이 되면 그림자는 사라져 있을 터였다. 식당 안은 아직 노을이 남아 있는 밖에 비해 어두웠기 때문에, 이미 작은 백열전구는 켜져 있었다. 그 밑에서 희멀건한 얼굴들이 떠 올라 있었다.
"할아버지는 저녁에 어디로 가니?"
고개를 든 소년은 어두운 얼굴을 향해 우물우물 밥을 씹으며 답했다.
"몰라요. 그런데 술을 마시러 가요."
"그 양반, 그렇게 마셔대다가는 제 명에 못 살 텐데... 아니, 이미 딱한 운명이지."
소년은 질문이 돌아오지 않자 다시 먹는 일에 열중했다. TV에선 일일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TV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인 아저씨는 새로이 들어온 손님을 맞아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객을 환영하는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소주를 까자느니 안주를 더 달라느니 하는 소리가 돌림노래처럼 따라왔다. 그들은 거나하게 취해 퍽 즐거워 보였다. 그러나 소년은 묵묵히 밥을 먹었다.

이윽고 밤이 찾아왔다. 소년은 언제나 잠을 자는 곳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소년과 비슷한 소년들이 무리지어 살고 있었다. 오로지 소년 뿐이었다. 그 중 안경을 쓴 소년은 싸구려 망원경을 쥐고 달을 관찰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달을 관찰하고 있었다.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안경소년은 달을 관찰했다. 달이 아름다운 밤이었다. 소년은 안경소년 옆에 앉아 같이 달을 보았다. 보름달에 아주 약간 모자란 달이었다. 안경소년은 망원경에 눈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어때, 달이 정말 아름답지 않아? 저 노란 빛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진정돼."
소년은 부러 답하지 않았다. 풀숲에서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찌르르 찌르르... 춥지만 고요한 밤이었다. 소년은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안경소년은 긴팔에 긴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그것도 군데군데 해진 옷이었다. 소년은 오늘 본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풍선, 강아지, 구름... 전부 따뜻한 빛깔을 하고 있었다. 소년은 다시 달을 쳐다보았다. 달은 새하얀 빛으로 그의 눈에 다가왔다. 검푸른 밤하늘에 하얀색 물감으로 점을 콕 하고 찍은 것 같았다. 아름답다? 소년은 아름답다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보았지만,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을 오늘 본 것들로 돌렸다. 노인의 분주하게 움직이던 손이 생각났다. 거나하게 취해 떠들던 일단의 무리가 떠올랐다. 술 냄새를 강하게 풍기던 노동자들이었다. 안경소년은 여전히 망원경에 눈을 딱 붙인 채였다. 그 뒤로 다른 소년들이 바닥에 드러누워 있거나 카드놀이를 하거나 했다. 소년은 카드놀이 하는 법을 몰랐다. 그래서 동무들은 소년을 놀이에 끼워주지 않았다. 소년은 카드를 재밌는 그림이 그려진 종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종이에는 칼을 든 남자가 서 있었다. 또 다른 종이에는 반짝이는 모양밖에 없었다. 다른 종이에는 나무 모양밖에 없었다. 왜 나무일까?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이 그렸기 때문일까? 역시나 알 수 없었다. 안경소년은 카드 한 뭉치를 "트럼프 카드"라고 설명했지만, 소년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별 수 없었다. 안경소년은 하늘, 그 중에서도 밤하늘을 특히 좋아했다. 왜냐고 물으면 "달과 별을 볼 수 있으니까" 였다. 소년은 언제나 같은 하늘에 뭘 볼 게 있는지 궁금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안경소년의 하늘은 소년의 하늘보다 '넓었다.' 그래서 소년은 안경소년의 흥미를 인정해 주었다. 삼십 분 정도 앉아 있으니 손과 발이 너무 시려웠기 때문에, 소년은 망원경을 매만지고 있는 안경소년을 내버려두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 밤엔 바람이 차가웠다. 소년은 하루종일 질질 끈 슬리퍼를 내던졌다. 슬리퍼는 고무신과 함께 아무렇게나 널브러졌다. 밤하늘에 별은 너무나 작게 빛나고 있었다. 애처로울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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