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mpreintes du beau rêve
건포도와 빵 본문
옛날 옛날, 아직 한반도에 호랑이를 신으로 믿는 부족과 곰을 신으로 믿는 부족이 나타나지 않았을 때, 저 멀리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그리고 스위스 대부분) 지방에 갓 구워진 빵과 잘 마른 건포도가 살았습니다. 건포도는 몸집이 작은데도 잘도 자기보다 큰 상대를 놀리곤 했는데, 빵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헤이, 빵. 오늘은 네 곰보가 더 두드러져 보이는걸?”
“건포도야, 이제 나를 그만 놀리면 어떨까? 사실 네 농담은 재밌지도 않거든.”
“뭐라고! 이 곰보덩어리가! 물에나 빠져서 흐느적거리기나 하라구!”
하지만 빵은 오븐에서 나올 때부터 마음씨가 아주 착했기 때문에, 건포도가 무슨 말을 해도 헤헤 웃으면서 흘려 넘겨 주었습니다. 그래서 건포도가 짓궂어진 건지도 모르겠지만, 하여튼 건포도는 빵에게 지적당하고도 다른 친구들을 놀리는 짓을 멈추지 않았어요. 작고 동그란 몸으로 열심히 흙바닥을 구른 건포도는 열심히 곡물을 옮기고 있던 개미들의 행렬에 마주쳤습니다.
“안녕? 너 내가 누군지 아니?”
“아니, 모르겠는데. 그나저나 우리는 바쁘니까 말 걸지 말아 줄래?”
건포도는 자신보다 몸집이 약간 작은 개미의 말을 듣고 실망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건포도는 개미가 걸어 다니는 걸 단지 햇볕을 쬐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건포도는 다른 개미에게 다시 말을 걸었습니다.
“안녕? 나는 건포도야. 그런데 너희는 지금 뭘 하고 있니?”
“보고도 몰라? 우리는 곡물을 등에 지고 굴로 옮기는 중이야. 그럼 이만.”
그러면서 개미는 얇은 다리로 건포도의 말랑한 몸통을 살짝 치고 가 버렸습니다. 건포도는 개미가 자신의 몸을 건드린 것이 약간 기분 나빴지만, 그래도 친절하게 답은 해 줬기 때문에 화가 나지는 않았어요. 건포도는 검은 선으로 줄지어 걸어가는 개미를 한 뼘 떨어져 바라보며, 저래서야 다른 친구들이 개미를 밟아버릴 수밖에 없지 않아 하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도 건포도의 생각은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개미들은 건포도는 신경도 안 쓴 채 곡물을 열심히 날랐습니다. 개미가 기어가는 모습에도 싫증이 난 건포도는 다시 빵이 사는 곳간으로 돌아왔어요. 이상하게도 빵은 빵을 구운 주인에게 먹히지 않고 계속 곳간에 살고 있었습니다. 건포도는 자기가 빵을 먹어버리면 되지 않을까 하고 이상한 상상을 해 보았지만, 빵의 넓은 구멍에 쏙 들어가는 자기의 작디작은 몸으로는 도저히 빵을 감당할 수 없었지요. 건포도는 낮잠을 자는 빵에게 다가갔습니다.
“빵아, 잠깐 나하고 놀아주지 않을래? 잠깐이면 되니까.”
빵은 건포도의 목소리를 듣고는 잠결에 옆으로 뒹굴 굴렀습니다. 그 바람에 건포도는 빵에 깔려 움직이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어요. 건포도는 죽을 힘을 다해 빵의 단단한 껍질 밑에서 버티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습니다.
“야! 이 멍청이 빵덩어리야! 당장 옆으로 물러나지 못해!”
건포도의 고함소리를 들었는지 어쩐지, 빵은 마지못해 일어나는 듯 몸을 다시 옆으로 굴리더니 빵가루를 부스스 흘리고는 일어났습니다. 빵에는 눈이 없었기 때문에, 간신히 숨을 튼 건포도가 옆에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빵은 건포도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습니다.
“어? 안녕 건포도. 그런데 너는 아까 밖으로 나간 게 아니었어?”
“밖으로 나왔지. 나왔는데, 개미들이 내 앞길을 막는 바람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거야. 그런데 너는 밤에 열두 시간이나 자면서 낮잠을 자다니, 네가 고양이도 아니고 왜 이렇게 잠이 많아? 하마터면 네 거대한 몸뚱어리에 깔려서 다시는 세상 빛을 못 볼 뻔했어!”
“음... 그런 일이 있었구나. 나는 잠이 들면 누가 옆에서 뭐라고 해도 잘 못 듣거든. 어쨌든 본의 아니게 너를 깔아뭉갠 건 사과할게. 그런데 이제 뭐 하려고?”
“원래는 너를 나의 놀이상대로 하려고 했지만, 지금은 그럴 마음이 사라졌어. 나도 이제 열 살이니, (건포도는 한 주에 한 살을 먹습니다.) 슬슬 주인의 식탁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 중이야. 너도 하루빨리 인간에게 먹히는 편이 좋을걸?”
“어, 그래도 나를 찾는 인간이 없으니까. 내가 먹히고 싶다고 해도, 인간이 나를 여기서 집어가 주지 않으면 먹힐 수가 없잖아? 언젠가는 오겠지, 뭐.”
“그러니까 네가 안 된다는 거야, 이 멍청이 빵덩어리야! 네가 다리가 없니 팔이 없니? (빵은 팔과 다리가 없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비유였어요.) 당장 몸을 일으켜서 주인의 식탁으로 가. 나도 네 뒤를 따라갈 테니까.”
“음... 그냥 너 먼저 가는 게 어때? 나는 잠을 더 자야겠어. 안녕...”
이란 말을 남기고, 빵은 다시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건포도는 게으르기 그지없는 빵에게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느꼈어요. 그러나 아까 빵에게 호되게 당한 터라 어떻게 해 볼 수는 없고 해서, 건포도는 찬장을 내려와 짚단 위에 누워서 생각에 잠겼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저놈의 빵을 일으켜서 식탁에만 올려놓을 수 있다면, 나도 순순히 주인의 입에 들어갈 텐데. 어쨌든 빵은 나의 유일한 친구니까. 친구가 먹히는 모습을 보는 게, 친구로서의 예의 아니겠어? 암, 그렇고말고.’
건포도는 예의를 따지는 과일이었기 때문에, 빵보다 자신이 먼저 먹히면 빵에게 실례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든 빵과 함께 먹히기 위해 건포도는 작디작은 머리를 굴려 보았습니다. 그러다 그만 졸음이 밀려와, 건포도는 그만 까슬까슬한 짚단 위에서 잠들어버리고 말았어요.
잠에서 깨어난 건포도는 눈을 떠 살짝 열려 있는 문으로 밖을 바라보았습니다. 밖은 이미 한밤중이었어요. 건포도는 고개를 돌려 빵이 누워 있는 찬장 위를 올려다보았지만, 곳간에 드리워진 짙은 어둠 때문에 찬장 위는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단 건포도는 목이 말라서 (건포도 주제에 목이 마르냐고 물어보신다면, 아무리 건포도라고 해도 바짝 마르면 목이 마를 때가 있습니다.) 물을 마시기 위해 곳간 밖으로 나왔습니다. 개가 짖는 소리도, 고양이가 우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고요한 밤은 오직 달빛만이 땅에 은푸른 빛을 뿌리고 있었습니다. 건포도는 교교하게 뜬 달을 올려다보면서, 달에 소원을 빈다고 하는 인간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건포도는 ‘소원’이라는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잘 몰랐지만, 지금처럼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싶다 하는 기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저 멀리 숲 속에서 소름 돋게 우는 뻐꾸기 소리가 들려왔어요. 건포도는 그만 깜짝 놀라서, 물을 마셔야 한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는 본채 쪽으로 줄달음쳤습니다. 인간 가족이 잠들어 있는 본채는 나무로 짠 문이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건포도는 어떻게든 몸을 문틈으로 비집고 밀어서, 겨우 집 안으로 잠입해 들어갈 수 있었어요. 밤이니까 당연히 거실에 불은 켜져 있지 않았고, 주위는 숨 쉬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적막했습니다. 건포도는 놀란 나머지 집으로 들어와 버렸기 때문에, 집으로 들어온 이후에 뭘 하면 좋을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어요. 그저 조용한 곳에 박혀 있고 싶다는 마음으로, 건포도는 데굴데굴 굴러서 아늑한 공간을 찾았습니다. 그러다가 부엌으로 굴러가게 된 건포도는 그만, 식탁 위에 올려져 있는 빵을 본 것이 아니겠어요! 건포도는 처음에 저게 정말로 내 친구인지 놀랐습니다. 분명히 빵은 자기 입으로 인간이 집어갈 때까지 곳간에 있을 거라고 말했기 때문에, 자기가 잠든 동안에 인간이 갑자기 배가 고파서 빵을 집어간 건가 하는 추론에 도달했습니다. 건포도는 드디어 빵과 함께 인간에게 먹힐 수 있겠구나 하는 안도감에 그만 자리에 드러눕고 말았습니다. 하긴, 곳간에서 본채까지 달려온 작디작은 건포도가 갑자기 몰려온 피로를 견딜 재간이 있었겠어요? 건포도는 물을 마시지도 못한 채 바닥에 누워 잠에 빠졌고, 조용한 빵은 아침이 올 때까지 식탁에 가만히 누워 있었습니다.
이윽고 아침이 밝아와, 건포도는 눈부신 햇살에 졸린 눈을 비비고 앞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곳에는 빵과 함께 식탁에 모여 앉아 있는 인간 가족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어머니로 생각되는 여성은 베이컨을 썰고 있었고, 남성과 작은 아이는 앞에 질그릇을 가져다 놓고 아침을 먹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빵은 그 가운데서 자신이 먹힐 순간만을 침착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베이컨을 다 썬 여성이 세 접시에 베이컨을 나눠 담고, 드디어 두껍고 거대한 빵을 집어 칼로 온 힘을 다해 썰기 시작했습니다. 건포도는 혹시 빵에 아픔에 비명을 지르지 않을까 숨을 삼키고 귀를 기울였지만, 빵은 그래도 굳어버린 것처럼 아무 소리도, 정말로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자신의 몸이 두 동강, 세 동강 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어휴, 이 빵은 제대로 말라버려서 잘 썰리지도 않네. 스프에 찍어 먹는 편이 좋겠다.”
힘들어하는 숨소리를 내면서 여성이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는 이제 자신의 차례가 왔다고 건포도는 생각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식탁에 올라가는 편이 좋을까. 자연스럽게? 아니면 바닥에서 열심히 굴러서 나의 빛나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고민된다 고민돼...’
라는 고민을 하는 건포도를 아랑곳하지 않고 인간 가족은 베이컨과 빵과 스프로 호화로운 아침을 맞았습니다. 아이는 빵의 부드러운 부분 사이에 베이컨을 끼워 한 입 크게 깨물며 우물거리고, 남성은 빵을 작게 뜯어 스프에 톡톡 찍어먹고, 여성은 앞치마에 묻은 스프를 손으로 닦으면서 손가락을 빨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아이의 눈에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작은 건포도 한 알이 눈에 들어왔어요.
“어, 엄마? 바닥에 건포도가 떨어져 있어요.”
“어라? 정말이네? 어디서 떨어진 걸까?”
“몰라. 어제 저녁에 포대를 옮기다가 흘린 걸 수도 있지.”
“아니, 어제 포대에 담긴 건 완두콩이었어요.”
“그럼 나도 잘 모르겠군.”
부부간에 말이 오가는 사이에 아이는 건포도를 두 손가락으로 집어 눈앞에 갖다 댔습니다. 건포도는 눈부신 햇살을 받아서 짙은 보라색으로 찬란하게 빛났어요. 아이는 순간 건포도를 입에 넣으려고 했지만, 어머니의 제지로 입에 들어가기 직전에 멈출 수 있었습니다.
“얘야, 그러지 말고 그냥 새에게 먹이로 주는 것이 어떠니? 바닥에 떨어진 거니까 분명 더러울 거다.”
아이는 건포도로 입가심을 하지 못하게 된 것에 실망했지만, 어머니의 말에 따라 건포도를 열린 창문 밖으로 휙 하고 던졌습니다. 건포도는 작은 만큼 슈웅 하고 날아서 뒷마당에 톡 하고 떨어졌습니다. 아이는 떨어져서 데구르르 구르는 건포도를 보면서, 저 건포도를 먹을 수 있는 새는 분명히 행복할 거라고, 속으로 믿었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