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   2025/03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l'Empreintes du beau rêve

기억의 저편에서 본문

etc.

기억의 저편에서

barde 2013. 7. 27. 14:50




  학교에서 학생들을 위해 덤으로 주는 것만 같은, 많고 많은 예체능 활동 중에서도 나는 유독 그림 그리기를 싫어했다. 정확히 말하면,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그림은 나로부터 멀어져가기 시작했다. 그림에 대해 생각해 보면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과 부끄러운 기억이 한데 얽힌 실타래처럼 공존하지만, 고등학교 2학년을 기점으로 그것은 점차 드물어지기 시작했다.


  왜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지 않게 된 것일까. 1학년 때는 음악을 하고 2학년 때는 미술을 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음악 시간에 무엇을 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심지어 '무엇을 했나' 조차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신기하게도, 그 1년간의 음악 수업에 대한 기억이 통째로 날아가 있다, 마치 기억을 먹는 여우가 덥석 집어먹기라도 한 것마냥. 하지만 미술 시간에 무엇을 했는지는 몇 가지 기억나는 게 있다. 참고로 한 학년에 한 명밖에 없는 미술 선생님은 젊은 여자였다.


  우선 첫 번째 수업시간에는 서로의 얼굴 그리기를 했다. 스케치북을 들고 잘 깎은 4B연필로 얼굴을 스케치하기만 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작업으로, 주어진 시간 내에 학생들은 열심히, 혹은 건성으로 옆사람의 얼굴을 스케치북에 옮겼다. 거기서 나는 바로 앞에 앉은 친구의 얼굴을 내가 생각해도 제법 잘 옮겨 내었는데(코 옆에 붙어 있던 점까지), 그게 불만이었는지는 몰라도 친구는 내 그림을 보더니 전혀 닮지 않았다면서 우습다는 듯 웃었다. 나는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해서 그렸기 때문에, 그런 친구의 반응이 썩 탐탁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 다음 시간에는 마찬가지로 그림을 그렸는데, 이번에는 연필로 단순히 스케치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얼굴의 밑그림을 오돌토돌한 그림판? (캔버스라고 하는 것 같다)에 그린 다음에 물감으로 색칠해야 했다. '이번에는 기필코!' 하는 마음으로 거울을 보면서 나의 동그란 얼굴을 그리고 색칠을 주의깊게 했지만, 그만 중간에 붓이 어긋나는 바람에 끝에 가서는 내가 봐도 괴기스러울 정도의, 섬뜩한 그림이 탄생했다. 내 그림에 대해 선생님을 제외하고는 별 말이 나오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들 자기가 그린 그림에 집중하거나 웃음이 나올 정도로 괴상하게 그린 그림에 몰려들었으므로.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쩌면 그 때부터 미술에 대한 지향의 불안이랄까, 위태로운 기반에 서 있다는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중학교 때만 해도 노트에 곧잘 그림을 그리던 내가 이렇게 변한 줄은, 나초자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아마도 마지막 과제로 기억하는데, 계절은 초가을 정도였던 것 같다. 내가 '정도였던' 같은 말을 쓰는 것을 너그러이 양해해 주기 바란다. 어쨌든 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아직까지 따뜻했던 초가을에, 드디어 우리들은 밖으로 나와 이젤을 세우고 '자연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자연'이라고 해도 학교 뒤뜰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곳에서 나는 지루함에 몸을 배배 꼬면서 미술 선생님을 귀찮게 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컨테이너 박스 앞으로 가거나, 혹은 이젤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 기숙사로 달려나가는 식으로. 선생님은 그 때마다 잘도 나를 찾아내서는 햇살이 뜨거운 수풀 앞에 앉혀 놓고 그림을 그리게 했지만, 결국 나는 그림을 다 못 그리고 미술 수행평가에서 좋지 않은 성적을 받았다. 당시에 나는 작문 성적 말고는 다른 어떤 성적도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에(심지어 물리마저도), 미술 정도야 내 관심영역 밖에 있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나는 길고 긴 인내의 시간을 거쳐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내 성적표에는 자랑스럽게도 물리 9등급과 작문 1등급이 함께 찍혀 있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자랑스러웠다.


  그렇다면 결국 내가 그림 그리기를 싫어한 까닭은 무엇일까? 두 번째 수업 시간에 그림이 계획 밖으로 엇나간 게 트라우마로 남아서? 아니면 내가 실제로는 그림을 못 그린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들을 고려해 보아도 내가 그림에서 손을 뗀 진짜 이유는 아닌 것 같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나의 관심이 그림에서 책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보기 시작한 웹툰을 끊은 것과 미술에서 관심을 뗀 시기는 정확하게 일치한다. 나는 그 때부터 '그림'에 흥미를 전혀 가지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지금은 만화도 잘 읽고 웹툰도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보기는 한다. 그러나 이제 나는 펜을 들어 글을 쓸 뿐, 그림을 그리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림은 나에게 있어 하나의 빛 바랜 추억이 되었다. 그림 실력은 아마도 예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할 테지만, 이제 예전처럼 백지 위의 한 대상에 몰두해 가면서 그림을 그릴 수는 없다. 그래도 여전히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는 마음이 든다. 나에게도 '타고난 재능'이 있을까 고민하면서.


  짧은 스토리를 콘티로 만들다 갑자기 예전 생각이 나서, 최대한 정확한 기억을 전달하려 애쓰며 글을 적어 보았다. 마치 일기를 쓰는 것처럼 기억을 하나하나 복기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시간이란 참으로 빠르구나.

'etc.'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왕따'에 관한 짧은 글  (0) 2013.08.03
<시간을 달리는 소녀> 짧은 감상  (0) 2013.07.31
Evangelion Q OST: Quatre Mains (à quatre mains)  (0) 2013.07.15
불행함  (0) 2013.06.27
만화에 대한 잡상; 죽음  (0) 2013.06.26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