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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preintes du beau rêve

'왕따'에 관한 짧은 글 본문

etc.

'왕따'에 관한 짧은 글

barde 2013. 8. 3. 22:25

"왕따를 정당화하는 논리와 정확히 일치. 별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흔히 말하는 "당하는 녀석에게도 문제가 있었어요" 는, 십중팔구 저 이유다.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라고 하면, 무리짓는 법도 배우고, 왕따하는 법도 배우고, 가해자로 '걸린' 다음 빠져나가는 법도 배우고, 뭐 이런저런 것들을 배운다.

부모가 그것을 묵인하는 이유는 단 하나.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기 때문에."


어제 눈치 없는 사람을 비난하는 트윗을 보고 그냥 몇 개 트윗을 해 봤는데, 이것을 글로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짧지만 적어 본다.



왕따라면 몇 년 전부터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고 언론에서도 자주 다루고 있으며(주로 피해자가 어떤 고통을 당했는지를 심도 깊게 묘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공권력인 경찰도 학교폭력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내세운지가 꽤 되었다. 그런데 여전히 한 가지 의문이 남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따는 왜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요즘엔 ‘빵셔틀’로 바꿔 부르기는 하지만 왕따는 그대로 학교에 남아 있다. 경찰의 눈에 걸리는 것은 소수에 불과하며, 걸린다고 해도 소년원에 몇 달이나 1년 정도 들어가는 것이 전부다. 그래서 처벌을 늘리겠다고 하지만, 과연 그게 해법이 될 수 있을까? 다시 문제로 돌아가 보면, 왜 왕따는 사라지지 않는 걸까?


프랑스의 문화인류학자 르네 지라르는 그의 빛나는 통찰로 해답에 이를 수 있는 몇 가지 힌트를 던져 주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희생양 메커니즘’인데, 간단하게 정리하면 차이의 소멸과 폭력의 전염으로 공동체의 존립이 위태로울 때 모두의 폭력을 한 대상에게 집중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집중의 대상이 되는 ‘하나’는 주로 가장 약한 존재가 된다. 당연히 강한 존재를 희생양으로 만들 수는 없을 테니, 반항하지 못하는 약한 존재를 고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희생양을 만드는 근본 이유는 무엇일까? 지라르는 “희생의 폭력은 공동체를 화해시킨다”고 말한다. 아니, 그렇다면 공동체의 유지에 희생이 필수불가결하다는 말인가? 지라르는 그렇다고 말한다.


사소한 분쟁으로도 큰 재난이 될 수 있는 세계에서는 희생제의가, 현실적이든 이상적이든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항상 복수할 능력이 없는, 즉 복수 받을 위험이 없는 무력한 희생물에게로 공격성향을 집중시킨다. 이 희생제의는 조그만 만족도 얻지 못하고 있던 폭력 욕구에다, 물론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것이지만, 무한히 새로워질 수 있는 배출구를 제공한다. 이 효력에 대해서는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증거가 많이 있다. 희생제의는 폭력의 싹이 퍼지는 것을 막는다. 즉 사람들이 함부로 복수하지 못하게 한다. 희생양 메커니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희생물이 공동체의 위기와는 무관하다는 사실과 이에 대한 공동체 구성원들의 무지이다.”[각주:1]


인간에게 공격충동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한번 공격충동의 발현을 알고 나면, 왜 공격충동을 다스리는 것이 문명 사회에서 중요하게 취급되었는지를 아는 데는 한 걸음이면 족할 것이다. 폭력적인 인간의 걷잡을 수 없는 공격충동은 공동체를 파멸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서, 한 집단의 걷잡을 수 없는 공격충동은 다른 공동체마저 같이 파멸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이 공격충동을 다시 근원에로 되돌려 초자아의 관리 하에 두는 것을 ‘문화(문명)’라고 말한다. 인간은 문화 없이는 안정된 기반 위에서 살 수 없다. 한 번의 불꽃은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다.


기시 유스케의 SF 소설 <신세계에서>는 바로 인간의 공격충동을 소재로 삼아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작품이다. 현재로부터 천 년 후를 배경으로 하는 작중에는 ‘주력呪力’을 얻어서 고대 문명이 붕괴되었다는 말이 나온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고대 문명’은 현대 문명을 말한다. 인간이 단순히 힘을 자신의 몸으로 사용한다면 문명의 붕괴로까지는 이르지 않겠지만, 주력과 같은 힘을 얻어 무한대의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문명이 붕괴되는 것도 충분히 가능성 있는 미래다. 그래서 주인공이 살고 있는 현재 시간에서는 주력, 즉 공격충동을 억제할 수 있도록 최면을 걸기도 하고 보노보의 양태를 빌려 자유로운 성관계를 맺도록 권유한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악귀’와 ‘업마’-주력이 폭주한 모습이라고 보면 된다-가 나타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을 언제든지 처분할 수 있도록 ‘부정고양이’라는 괴물을 둔다.


위에서 말한 것은 하나의 가능성으로서의 극단이지만, 주력이 없는 인간 사회에서도 공격충동을 다스리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충동을 다스리기 위해 “항상 복수할 능력이 없는, 즉 복수 받을 위험이 없는 무력한 희생물”을 희생양으로 삼아 공동체를 존속시켜 나갈 수 있었다. 요컨대 왕따라고 하는 것은, 문명 이전부터 있어 온 희생제의를 어른의 거울이라고 하는 아이들이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학교라는 폐쇄된 집단사회는 훈육과 인내와 무리짓기를 강요한다. 아이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언제 공격충동으로 전환되어 표출될지 모른다. 해서 아이들은 선생님에게 반항하는 대신 희생양을 둔다. 마치 이전에 사람들이 으레 그래 온 것처럼.


왕따란 지금 어느 곳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아주 보편적인 희생제의일 뿐이다. 물론 개개인의 희생과 정신의 트라우마는 심각한 일이지만, 일의 보편성으로 보면 학교 말고도 다른 어느 곳에서도 흔하게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혹자는 눈치 없는 누군가를 뒤에서 비난할 수도 있고, 다른 자는 맘에 안 드는 어리숙한 인간을 따돌리기 위해 구석에서 궁시렁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수많은 비방과 뒷담화들을 모두 ‘왕따’라고 칭할 수 있다고 한다면, 실로 온 나라가 왕따 문제로 들썩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인간을 신뢰하는 사람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왕따를 한 번이라도 하지 않았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왕따’란, 결국 그런 것이다.

  1. http://thedol.egloos.com/170564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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