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mpreintes du beau rêve
인상 #2 본문
"모든 고귀한 것은 힘들 뿐만 아니라 드물다." 바뤼흐 드 스피노자
눈물로 마른 바람을 적시는 가을이 오면 그녀가 가장 먼저 바라던 것은 만년필에 갈색 잉크를 먹이던 일이었다. 나는 옆에서 그 모습을 그저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지만, 그녀는 그 일만이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듯 심혈을 기울여 피스톤을 조심스레 돌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 펜은 피스톤이 아니라 플런져라고 몇 번이고 말했지만, 나는 그 말을 한 귀로 흘려듣고는 또 "아, 그렇게 피스톤을 천천히 돌릴 필요가 있어?" 하고 물어보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발화와 행동은 오해와 주의력 결핍으로 발생했고, 그녀의 뺨엔 홍조보다는 주름이 피어날 때가 많았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둘 사이에 아무 문제가 없을 줄로 알았다. 왜냐면 내가 새로 극장에 걸린 애니메이션을 보러 가자고 해도, 그녀는 딱히 반대하지 않고ー물론 내가 표값을 낸다는 전제 하에ー같이 극장에 향했던 것이다. 하지만 금crack은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었다.
"겨울이네,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그녀가 이렇게 물었을 때 나는 별로 고민하지 않고 "어, 만년필" 하고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의외라는 듯 "그래?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라고 묻고는 변함 없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녀의 미소를 일 분이고 오 분이고 계속 바라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것은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수첩에 뭐라고 적는 것을 곁눈질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녀의 글씨체는 나보다 작았고 거기에 약간 동글동글해 처음 보는 사람은 알아보기 힘들었다. 사실 8개월이나 같이 보낸 나도 완전히 알아보진 못했다. 그러나 그녀가 수첩 한 귀퉁이에 "원하는 것"이라 적은 것만은 똑똑히 보았다. 그렇게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나 싶었다.
동짓날, 집에서 뒹굴거리다 나와 마찬가지로 거의 하는 일이 없는 TV를 틀고는 리모콘을 잡고 마구 누르다 보니 어쩌다 5번, TV 아사히에서 멈추게 되었다. 마침 일기예보 시간이었는데, 크리스마스엔 아쉽게도 눈이 안 오지만, 이브엔 눈이 조금이나마 올 거라는 소식이었다. '아……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무리인가' 하며 무심하게 바라보고만 있었지만, 그 순간 뇌리 깊숙한 곳에서부터 말 한 마디가 떠 올랐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화이트였음 좋겠어.' 바로 그녀의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잘 모르겠지만 크리스마스 연휴 기간이라 꽤 바쁜 것 같았다. 아마 카운터에서 다리가 녹아내릴 때까지 서 있어야 하겠지. 그러나 내가 대신 서 있고 싶다는 생각은 조금도 안 들었다. 아, 나란 인간은 매정하기 짝이 없구나. 그렇게 그 날은 별 생각 없이 보내버렸다.
이브가 되어도 연락이 없어서 나는 그녀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나 하고 처음으로 자각을 했다. 지금까지 연락을 안 하다니, 다른 남자였으면 벌써 '사와키 군, 마음이 식은 거에요?' 하고 추궁받겠지. 그러나 결코 나는 그녀를 생각하지 않은 게 아니다. 왜냐면 나란 남자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젠틀 가이(웃음)기 때문에, 무슨 용건이 있더라도 우선 상대의 반응을 기다려 보는 것이다. 만약 그녀에게 정말로 큰 일이 생겼다면 전화가 왔겠지…… 하며 삼 일을 기다린 것이다. 그러나 역시 전화를 해 봐야 겠다는 마음이 들었으므로, 나는 단축 다이얼을 꾹 누르고는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대었다. 뚜ー 뚜ー 하는 착신음이 길어질수록 나는 점차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나는 상당히 이런 '상황'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착신음이 멎고는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메시지를 남겨주세요" 하는 예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므로, 가만히 휴대폰을 닫았다.
자, 이제 이브를 보낼 방법을 생각해 보자. 전혀 방도가 떠 오르는 것이 아니었지만, 막무가내로 생각을 시작한 나는 이윽고 하나의 '지내는 법'을 머릿속에서 캐치해 내었다. 바로 그녀의 직장까지 찾아가 보는 것이었다. 어렴풋이 들었으므로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여기서 한 시간 반이면 도달할 수 있었다. 나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는 지갑을 챙기고 밖으로 나왔다. 여기서 하네다 공항까지 가려면 우선 오미야 역까지 간 다음 우츠노미야 선을 타고 우에노 역까지 가야 한다. 거기서 야마노테 선을 타고 하마마츠죠 역까지 간 다음, 도쿄 모노레일을 타고 국내선이 있는 제2빌딩까지 가면 된다. 그녀가 소속되어 있는 회사가 어딘지는 밝힐 수 없지만(대기업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다른 두 회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카운터로 가 그녀의 사진을 들이밀며 혹시 오늘 출근하지 않았냐고 물어보았다.
"아ー 몸이 안 좋다고. 아파서 못 나온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혹시 그녀의 남친? 우와ー 전혀 남친이 있는 모습이 아니었는데ー"
둘 다 회사의 유니폼을 잘 빼 입고 성숙한 모습으로 서 있었지만, 20대의 여성들답게 쓸모 없는 말이나 하고 있다. 나는 필요한 정보는 얻었으므로 건성으로 고맙다고 전한 뒤 추가로 그녀의 집 전화번호도 얻어두었다. 8개월이나 사귀면서도 집 전화번호도 못 얻었냐고 타박한다면, 그녀는 그렇게 정보를 함부로 흘리고 다니는 여자가 아니라고 답하겠다. 여하간 나는 근처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 방금 얻은 전화번호로 전화를 해 보았다. 몇 번의 착신음이 있은 뒤, 그녀의 어머니라고 추측되는 사람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안녕하세요. 키요코(가명)의 남자친구 되는 사람입니다. 혹시 키요코가 어디 멀리 떠나기라도 했나요? 휴대폰에 몇 번을 걸어도 안 받아서요."
"아…… 애한테 몇 번 말은 들었습니다마는, 의외로 목소리가 젊으시네요. (여기서 그녀가 부모에게 나를 어떻게 말했는지 궁금해졌다만,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키요코라면 잠시 친정에 들렀어요. 할아버지가 권유하셔서 온천에서 며칠 쉬다 온다고. 그런데 전화를 왜 안 받았을까요? 놔 두고 가진 않았을 텐데……"
"예, 감사합니다."
그 뒤로도 그녀의 어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한 뒤 새로운 의문이 생긴 채로 전화를 끊었다. 도대체 그녀는 일로 바쁜 기간에 왜 굳이 온천으로 간 것일까? 아무리 권유가 있었다고 해도, 일을 빼 먹는 것은 쉬운 게 아닐텐데…… 더구나 그녀는 아직 높은 직급에 오르지 못했다. 그렇다면 더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나는 우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신정이 되어도 그녀로부터는 어떤 연락도 없었다. 집으로 한번 더 전화를 해 볼까 생각해 봤지만, 그 쪽에서 소식을 전한 이상 더 물어보는 것도 실례일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주부터 개인적으로도 바빠질 터였다. 어떻게든 이번 주 안에 결판을 내야 했다. 그렇다면 역시 온천에 들러야 하나? 아니, 거기가 어디라고 쉽게 떠날 수 있을까. 이럴 때일수록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한다. 나는 난로 옆에 주저앉아 한쪽 팔로 머리를 괴며 무슨 수가 있지 않을까 고민했다. 십 분이 지나도, 반 시간이 지나도 내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도통 떠 오르질 않았다. 아,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굴었건만, 이런 중요한 순간에 어떤 재치도 발휘하지 못하다니. 나란 인간은 정말 구제불능이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이 없다. 나는 휴대폰을 들어 그녀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저기, 부탁인데 휴대폰을 켜면 메일이라도 보내줘. 네가 전화를 안 받아서 얼마나 걱정했는데…… 도쿄에서 만나면 네가 먹고싶어 했던 과자들, 음식들 다 사 줄게. (이런 말밖에 못 하는 나를 다시금 한심하다고 여겼다는 것은 비밀이다) 온천에 갔다면서? 거기서 잘 쉬고, 정월 전에 보자."
째깍 째깍, 시간은 흐르고 이윽고 일요일이 되고 말았다. 초침만 열심히 움직이는 시계를 바라보며 나는 천장이 높은 카페에서 원고의 마지막 수정을 보고 있었다. 똑같은 글을 몇 번이나 다시 보는 것이 너무나 지루해진 나머지 어깨를 쭉 뻗고 밖을 바라보는 순간,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뻗었던 팔을 잽싸게 내리고는 핸드폰을 잡아 전화번호를 확인했다. 바로 그녀였다.
"여보세요?"
"어, 잘 지냈어? 그동안 연락 못해서 미안ー 시골이 너무 좋아서 말야ー"
터무니 없는 말이었지만 나는 그녀가 2주일만에 다시 전화를 걸어온 것이 너무나 기뻐 얼굴에 함박웃음을 머금은 채로 "아냐 아냐, 잘 지냈으니 다행이지" 하고 답했다. 그녀는 전화로 자신이 그동안 일에 지쳐 이 일이 정말 내게 맞는 일인가, 처음의 '재미'는 어디갔나 하는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와중에 마침 할아버지로부터 권유가 와 그대로 온천으로 휴가를 떠났다고 말했다.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긴 힘든 말이었지만, 나는 그런 것은 내색하지 않고 그냥 잘 됐네, 다음에 또 보자고만 말했다. 여느 때보다 약간 목소리가 커졌지만 다행히도 주변엔 사람이 없었다. 나는 휴대폰을 닫고는 그대로 일 분간 액정을 응시했다. 좋았어, 이제 모든 일이 마무리 된 거다.
그 뒤로도 며칠간 그녀와의 전화는 이어져, 크리스마스에 못다한 만남을 성인의 날에 매듭짓자고 약속했다. 거리는 갓 성인이 된 소년소녀들로 붐비겠지만, 그건 어째 되든 좋다는 마음가짐이었다. 개인적으로 하는 일도 많이 바빴지만, 그래도 그 날까진 어떻게든 마무리를 짓자는 생각이었다. 그 뒤로 열흘간은 정말 정신 없이 흘러갔다. 움직이는 두 손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고, 또 눈은 한계까지 혹사당해 가끔 눈을 감으면 눈꺼풀에 별이 보일 지경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그녀를 위한 선물을 사 두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값비싸진 않지만 그녀가 보면 미소지을 것으로, 실로 오랜만에 점원에게 포장해 달라고 말한 뒤 나는 그녀에게 메일을 보냈다. 답장은 이렇게 왔다.
"어! 나도 기대돼 (웃는 이모티콘) 그 날, 눈은 안 오겠지?"
아…… 화이트 크리스마스. 나는 그녀의 메일에 어떻게 답장해야 할지 고민하며 사람들로 북적이는 상점가를 나왔다.
드디어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그 날이 왔다. 나는 포장된 선물을 한쪽 팔에 끼우고 활기찬 발걸음으로 집을 나왔다. 그녀와 만날 장소까진 가깝지 않은 길이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갈 수 있었다. 드디어, 역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시계탑 앞으로 빠른 보폭으로 뛰어가다시피 해서 걸어갔다. 예정보다 5분 일찍 왔으므로 아직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바보처럼 흥얼대며 그녀가 저 앞에서, 혹은 옆에서 모습을 드러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그녀로부터 메일이 도착했다.
"미안…… 열차가 지연돼서 조금 늦을 것 같아. 추울 텐데 어디 카페에라도 들어가 있어. 정말 미안해 (우는 이모티콘) "
여전히 이모티콘과 함께 귀여운 말투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카페에 들어가 밖에서 그녀를 맞는 기쁨을 잃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코를 훌쩍거렸음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밖에서 기다렸다. 잠시 커피를 테이크아웃해 나오니 약속 시각으로부터 30분이 지나 있었다. 화는 나지 않았지만 뭔가 아쉬웠다. 그녀라면 시간을 딱 맞춰서 출발했을 텐데…… 아마 그녀 자신이 가장 분할 것이다. 기껏 나왔더니 열차가 지연되기나 하고. 직원들의 노고는 이해하지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묵묵히 커피를 홀짝이며 언제 올지 모를 그녀를 기다렸다.
드디어 그녀로부터 또 다른 메일이 왔다. 이번에는 긴박한 와중에 보냈는지 내용이 간결했다. "이제 다 왔어, 앞으로 조금" 끼얏호ー 주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다녔으므로 팔을 크게 휘두르지는 못하고 바로 앞에서 살짝 주먹을 쥔 팔을 들어올렸다. 이제 됐다, 드디어 만날 수 있어! 선물을 쥔 손은 너무나 세게 쥔 나머지 포장에 주름이 선명히 드러날 정도였다. 으흠, 선물이 구겨지면 안 되지. 나는 폭신거리는 선물이 애완 고양이라도 되는 것마냥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거리에는 꽤 추운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성인이 된 쪽과 이미 성인인 사람들이 장미 따위를 들고 걸어다니고 있었다. 하늘은 찌푸드드한게 꼭 뭐라도 내릴 것만 같았다. 나는 마음 속으로 카운트를 세었다. 열, 아홉, 여덟, 일곱, …… 하나, 제로. 올려다 본 하늘에선 홀씨같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와, 정말 고마워! 헤헤, 무슨 선물일지 기대된다. 폭신폭신한 게 아주 따뜻한 무엇인 것 같아. 그리고 자, 작지만 마음에 들어할 거라고 생각해."
그녀가 건네준 선물은 손바닥 길이만한 작은 상자였다. 순간 두 달 전의 기억이 솟아 올랐지만, 지금은 그녀를 만나고 선물을 받은 것만으로도 기쁨에 차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우리는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미리 점찍어둔 카레 전문점으로 향했다. 거기서 카레를 주문하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 둘은 마치 몇 년만에 만난 남매 같았다. 그만큼 서로가 떨어져 있었다는 것을 강하게 의식한 것일까. 나는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고 음식이 나오기 전에 상자를 열어보았다. 그 안엔 리본에 끼워져 있는 다갈색의 나무로 만든 만년필이 있었다. 하마터면 상자를 다시 닫을 뻔했다.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고는 허탈하게 웃으며 단지 이렇게 말했다.
"너…… 기억하고 있었구나."
"응, 후훗. 사와키가 '원하는 것' 제대로 메모해 두었지. 안에 카트리지도 끼워 뒀으니까, 지금 한번 써 봐."
만년필을 아이 다루듯 조심히 빼 내어 캡을 열어보니 거기엔 번쩍이는 은빛 닙이 있었다. 닙은 은장도의 칼날이라도 되는 것마냥 번쩍이며 자신의 위용을 과시했다. 캡을 한 손에 쥔 나는ー나중에야 캡을 펜의 뒤에 끼우고 쓰는 방법이 정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처음이었으니ー조심스럽게 매끄럽게 연마된 몸통을 쥐고 항상 가지고 다니던 수첩에 끄적거려 보았다. 부드러웠다. 아니, 매끈하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정확할까. 닙에는 F라고 적혀 있었지만 제트스트림보다 약간 굵게 나왔다. 나는 그 때 처음으로 만년필의 위대함을 깨달았던 것이다. 내가 펜을 이리 쥐었다 저리 쥐었다 하며 수첩에 온갖 단어를 적는 모습을 그녀는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이 처음 만년필을 샀을 때를 회상하는 것 같았다. 나는 벌써 음식이 나온 줄도 모르고 열심히 수첩에 선을 늘려갔고, 보다 못한 그녀가 식겠다라고 걱정하는 말을 건넬 때까지 고개를 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중에 물어보니 그녀는 자신이 나에게 맞는 만년필을 구하러 '그곳'까지 간 일이 보람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요컨대 그녀는 나를 위한 '친구'를 찾기 위해 일부러 온천 마을에 들른 것이다. 너무나 고마워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녀와 헤어진지는 이제 일 년 가까이 되지만, 아직까지 '친구'는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내가 '친구'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어떤 친구보다도 진정한 '친구'의 역할을 이 만년필은 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후로 그녀에게서 컨버터도 선물받아 2주일에 한번 꼴로 잉크를 충전하는 습관을 지니게 되었다. 그녀와 헤어지고 난 이후에야말로 난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가끔 잉크가 다 떨어져 둥그런 잉크병에 닙을 담그고 피스톤을 돌릴 때마다 그녀 생각이 난다.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그 때 쓰던 '플런져' 만년필을 아직까지 쓰고 있을까. 메일을 하는 것도 쑥쓰러워 차마 물어보진 못하지만, 아마 그녀도 그녀의 펜을 자신의 '친구'로 여기고 있을 거라고, 닙에 묻은 잉크를 닦으며 멋대로 생각해 본다. 바디를 다시 조립하고 밖을 내다보니 거리는 다가올 크리스마스 맞이로 분주했다. 올해 크리스마스도 혼자구나ー 하며 한숨을 쉬고는 나는 다시금 작업에 몰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