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mpreintes du beau rêve
꼬마 한스 #1 본문
“기차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갑자기 앞으로 달려드는 꼬마를 능숙하게 피하며, 한발뛰기로 멀치감치 물러난 뒤에 고개를 홱 하고 돌려 뒤돌아보는, 역시나 어린 꼬마가 피식 웃음을 흘린다. 그러나 이 모습을 꼬마들이 노는 모습이라고 착각하면 심히 곤란하다. 한 쪽은 꼬마지만, 다른 한쪽은 인간 나이로 따지면 20대가 꺾이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겉모습만 보면 전혀 그런 사실을 알 수 없지만, 단 한 사람, 문 앞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는 키가 멀대같이 큰 한 사람만은 꼬마가 사실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임을 알고 있었다. 다른 ‘존재’는 폴짝폴짝 뛰어와 키 큰 사람이 입은 망토를 잡고 꾀어내는 듯한 목소리로 말한다.
“언니는 같이 놀 생각 없어? 나 너무 심심한데.”
“하핫. 전혀 그럴 마음 없는데. 오랜만에 찾아온 자유와 여유로움을 맛보기 위해 이 곳에 서 있는 거란다. 꼬마 아가씨.”
일부러 도발하는 듯한 인간의 말투에 요정은 뾰루퉁한 표정으로 인간의 눈을 마주본다. ‘너 사실 나랑 나이 비슷하잖아’ 그러나 이런 사실을 말해버리면 자신이 지금까지 지켜왔던 ‘꼬마’라는 무소불위의 지위가 무너져버리고 만다. 그래서 하고자 했던 말을 마음 속에 꾹꾹 눌러담는 것처럼 요정은, 아니 꼬마는 작은 두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꾹꾹 누른다. 그 모습을 인간은 내려다보며 피식 웃는다. 요정이 고개를 들어 자신이 웃는 모습을 보지 못함을 다행으로 생각하면서.
“그런데 말야 언니, 우리는 언제 여기를 떠나?”
“왜? 벌써부터 떠나고 싶어졌어? 아직 여기에 온지 사흘밖에 안 됐는데.”
“사흘이라니! 꼬마에게는 너무도 긴 시간이랍니다. 기사님은 잘 모르시려나?”
“글쎄다. 적어도 걸은 만큼은 쉬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괜찮은데 네가 걱정이라.”
“어머, 제 걱정도 해 주셨어요? 고마워라.”
“고마우면 밥이나 사라고. 애지중지 옆에만 끼고 있지 말고.”
여기서 말하는 “옆에만 끼고 있”는 물건은 바로 금화가 한 주먹 정도 담긴 주머니를 말한다. 요정은 다른 건 기사에게 내맡기면서도 자신이 입을 원피스와 챙이 넓은 모자, 화장도구와 주머니만은 잘 간수해서 여행을 떠날 때마다 몇 번이고 거듭 확인했다. 예리한 기사의 눈에 요정의 습관이 포착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요정은 밉지는 않은 눈빛으로 기사를 살짝 째려보며
“너무하셔라. 이건 최후의 최후의 최후를 위한 비상금이란 말이에요. 어떻게 기사님이 제 주머니를 노리실 수가 있으실까. 저를 맡는다는 이유로 봉급도 많이 받으셨으면서.”
의외로 기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회심의 일격으로 한 마디 덧붙인다.
“문제는 네가 씀씀이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이지. 작은 공주님.”
“그게 무슨 소리에요? 제, 제가 뭘 많이 먹는다고... 아니 그러니까...”
“하루에 네 끼를 먹으면 많이 먹는 거 아닌가? 여행 중엔 두 끼로 충분히 걸을 수 있어. 혹시 배에 당나귀를 키우고 있는 건가?”
부끄러움에 볼이 확 달아올라 딸기같이 되어버린 요정의 얼굴을 흐뭇한 얼굴로 응시하는 기사는 놀랍게도 여성이었다. 목소리로는 잘 분간되지 않지만, 쓰고 있는 두건을 벗으면 아름답고 기품 있는 얼굴이 드러났다. 짧게 깎은 체리빛 머리에 왼쪽에만 하고 있는 반짝이는 귀걸이, 오똑한 코에 다부진 눈매. 미남이라면 반드시 가지고 있을 목울대가 그녀에게는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른다면 그녀를 평범한 남자 기사로 착각할 수 있었다. 사실 평범하진 않지만, 어쨌든 기사 중에는 여자 뺨을 칠 미남도 있는 법이니까.
기사는 조용히 빵을 썰고 잘 달궈진 칼로 버터를 자른 다음 정성스레 빵에 바른다. 옆에서 동작 하나하나를 지켜보고 있던 요정은 자기도 빵이 먹고팠는지 바구니에 담긴 빵을 하나 꺼내 버터도 바르지 않고 와구와구 씹는다. 한쪽은 빵을 썰고 다른 한 쪽은 빵을 씹고. 빵을 씹다가 목이 막히는지 요정은 옆에 있던 유리병에 담긴 우유를 벌컥 하고 연 뒤에 꿀꺽꿀꺽 잘도 마셔댄다. 누가 옆에서 “거 대단도 하네” 하고 말을 건다면 금방이라도 웃는 얼굴로 화답할 것처럼, 요정은 ‘꼬마’의 역할을 제대로 해 내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테이블에서 밥을 먹는 사람이나 맥주를 마시는 아저씨도 전혀 ‘꼬마’를 어지간히 나이를 먹은 요정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어찌보면 당연했다. 그게 요정이 요정이 아닌 채로 살아가는 방법이니까.
사람들이 500 정도 사는 작은 마을에, 요정이라면 동화책 속에나 나오는 ‘인간과 다른’ 존재였다. 요정은 신비로웠고 기적을 가져다줬으며 때로는 장난꾸러기였다. 집안 물건을 뒤집어 엎고 찬장을 뒤지고 꽃병을 깨뜨리며 조용히 놀던 아이를 놀래켰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가끔은 착한 요정이 나무꾼을 데리고 무지개의 끝에 있는 금단지로 이끌었다. 나무꾼은 순식간에 부자가 되고 바로 신부도 얻어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한다. 꼬마 한스는 기차놀이를 하던 꼬마를 잽싸게 피하던 여자아이를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쟤는 도대체 뭘까? 어디서 온 아일까.’
아무리 생각해 보았지만 마땅한 답을 낼 수 없었다. 한스는 요정 이야기를 좋아했다. 요정 이야기를 좋아하고, 자주 접하고, 그가 가지고 있는 동화책만 해도 백여 권에 달했다. 한스의 아버지가 마을의 유일한 지주였기 때문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한스네 집으로 찾아와 고맙다고 밭이나 농장에서 난 선물을 주거나 소작료를 깎아달라고 하거나 아니면 울고불고 사정하기도 했다. (마지막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한스가 생각하기에 한스의 아버지는 그리 착한 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울고불고 사정하는 가난한 농부에게 윽박지르며 집에서 쫓아내지는 않았다. 한스는 아버지를 영리한 남성으로 생각했다. ‘나도 크면 훌륭한 지주가 될까? 그런데 지주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땅을 지켜야 하잖아. 바깥구경도 못 해 보고.’ 한스의 아버지는 마름을 쓰지 않았다. 어차피 가지고 있는 땅이 작기도 했고, 영 믿음직스러운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을 밖에서 사람을 쓰면 충돌할 우려가 있었다. 그렇다고 부러 마을 안에서 사람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한스의 아버지는 이제 눈가에 주름이 생기기 시작했다. 젊어서는 지주가 아니었으므로 ‘대학’이란 곳도 다니고 이런저런 재밌는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고도 하지만, 한스가 보는 아버지는 전혀 그런 것에 흥미를 두지 않았다. 가끔 서재에서 체스를 두거나 밖에서부터 들어오는 책을 읽거나 했지만, 식탁에서 그리고 밭에서 ‘대학’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전혀 없었다. 아버지가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면 않을수록, 한스의 궁금증은 점점 커져만 갔다. 도대체 ‘대학’이란 곳은 어떤 곳일까? 공부하는 곳일까? 책에서 읽기로는 ‘학생’들이 공부하는 넓은 장소인 것 같은데, 학생들은 누구고 또 왜 하필이면 거기서 공부를 할까? 그러던 어느 날, 한스는 갑자기 찾아온 이방인과 마주쳤다. 혹시 저들이라면, 저들이라면 나의 궁금증을 해소해 줄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이방인과 대화의 기회를 만들기는 쉽지 않았다. 키가 큰 쪽은 항상 무뚝뚝한 표정으로 있었다. 작은 쪽은 낮에 마을을 돌아다니긴 했지만, 꼬마들이 같이 놀자고 하면 가볍게 피해버리거나 해서 도무지 말을 걸 수 없었다. 저런 새침데기하고 같이 놀아줄 필요는 없어. 꼬마들은 낯선 곳에서 온 이방인을 곧 무시하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자아이는 잡화점에서 물건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뒷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찾아보기도 했다. 한스는 바로 앞으로 달려가 길을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아니야, 바로 말을 거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아버지도 그렇게 말씀하셨는걸.
“숙녀에게는 우선 인사를 한 다음 말을 걸어야 한다. 말을 건다고 해도 상스러운 말을 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건 곧 자신과 자신의 가문에 대한 모욕이야.”
가문이야 어린 한스에게는 잘 잡히지 않는 개념이라고 치더라도, 모욕이라는 말은 비상히도 그의 두뇌에 박혔다. 자신을 모욕하면 대단히 고통스러울 거야. 그리고 상대방에게도. 한스는 예절을 잘 아는 아이였다. 예의바르다고 칭찬을 받은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는 동네 개구쟁이들과는 급이 달랐다. 나는 지주의 아들이니까. 아버지가 ‘대학’을 나오셨고 나도 어쩌면 그 ‘대학’이란 곳에 갈지도 모르니까.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벌써 사흘이 흘러버렸다. 한스는 여전히 머뭇대며 그녀에게 인사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언제쯤 길에서 마주칠까? 언제쯤...
“아, 네. 저희는 내일 떠나니까 내일 것까지 한꺼번에 계산할게요. 네, 그렇게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잔돈은 팁이라고 생각하세요. 네? 아니에요. 좋은 방을 주셔서 저희야말로 고맙죠. 밥을 더 달라는 요청도 들어 주셨잖아요. 네, 제 사촌이 참 먹기는 잘 먹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먹보로 태어났는지도 모르겠어요. 아하하, 그런가요. 그 말 꼭 전할게요. 기뻐할 거에요.”
카운터 앞에서 주인장과 대화하고 있는 사람은 키가 큰 기사다. 그녀가 기사라는 사실은 확인하기 쉽지 않은데, 만약 브로치의 문장을 식별할 수 있는 견식 있는 사람이라면 단번에 그녀가 기사임을 알아챌 수 있을 테지만, 그렇지 않다면 눈을 위아래로 굴려 보고서야 뒤늦게 기사임을 알아챌 것이다. 기다란 망토 끝으로 삐져나와 보이는 작은 검정. 삐져나온 모양으로 볼 때, 망토에 달린 장식은 아니라면 가능성은 하나밖에 없었다. 기다란 검집의 끝. 검을 찬 사람은 기사 말고는 헌병대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작은 마을에 헌병대가 올 가능성은 0에 가까웠다. 혹시 산적일까? 에이, 그럴 리가. 산적은 저렇게 ‘점잖은’ 방식으로 교섭을 시도하지 않는다. 거기다 팁까지 준다면, 그건 산적이 아니라 형편 좋은 기사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기사가 어린 여자애까지 데리고 산기슭에 박힌 한적한 마을에까지 온 걸까? 정 궁금하다면 기사에게 직접 물어보기를. 충분한 예를 갖추고.
계산을 치르고 잠시 위에 올라갔다 내려온 뒤에 기사는, 두건을 단단히 쓰고 밖으로 나갈 채비를 끝마친 모습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아, 벌써 나간 건가.”
혼잣말을 내뱉자마자 바람같이 밖으로 나가버리는 기사. 음유시인이라면 이런 소재를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에 음유시인이 있을까? 저기 저 자리에 앉아서 지루한 얼굴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고 있는 젊은 청년이 음유시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동전을 정리하고 기지개를 켜는 저기 주인장이 음유시인일지도. 그런데 잠깐, 꼬마 한스는 어디로 간 걸까?
“한스! 아침은 먹고 나가야지!”
“조금 먹었잖아요! 어제 저녁을 많이 먹었어요!”
“얘도 참...”
바람같이 밖으로 달려나가는 소년은 아까 등장한 한스다. 한스는 자신이 생각이 깊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동네 꼬마들이 하지 못하는 생각을 그는 했다. 그리고 순진한 머리로 짜 내는 장난을 그는 유치하다고 여겼다. 그런 건 ‘애들’이나 하는 거야. 그는 언제나 질문에 첫 번째로 답했고 주교의 칭찬을 듣기도 했다.
“한스, 넌 참 재빠르구나. 그런데 한스만 답변하면 다른 친구들이 아쉬워하지 않겠니. 다음엔 천천히 손을 들어도 좋다.”
한스는 칭찬인지 조언인지 모를 말을 듣고 그저 기뻐했다. 생각이 깊다고 해도 꼬마는 꼬마였다. 꼬마 특유의 천진난만함을 품고 한스는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는 잡화점으로 뛰어갔다. 뭔가 살 물건이 있어서 가는 건 아니었다. 한스에게는 작지만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가장 내밀한 곳에 잠들어 있는 마음.
한스는 집에서부터 뛰어온 터라 기진맥진해서 잡화점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골랐다. “헉, 헉” 아침부터 그녀를 보기 위해 뛰어왔다는 사실을 알릴 수는 없었다. 그녀가 눈치가 빠른 것은 이미 여러 번 확인했기 때문이다. 예리한 눈매, 토파즈처럼 반짝이는 눈동자. 커다란 진주에 노란 토파즈를 박는다면 아마 흡사하리라. 그래도 보석은 ‘살아있는’ 눈을 당해낼 수는 없다. 눈과 보석 중에 택한다고 하면 당연히 눈이다. 숨이 어느 정도 골라지자 한스는 무릎에서 손을 떼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나무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덜컥, 하는 소리가 들리고, 발을 문 안으로 들여놓은 한스는 발견했다.
그곳에 있었다, 하얀 머리칼을 흩날리는 그녀가.
한스는 최대한 자신을, 뛰는 심장을 자제하려고 노력하며 그녀가 잡화점 주인과 즐겁게 이야기꽃을 피우는 모습을 굳은 입술로 바라보았다. 가게 안에는 향긋한 꽃향이 감돌았다. 아마도 주인 아저씨가 꽃이라도 가져다 놓은 모양이겠지. 한스는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물건 전부가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설마 이게 말로만 듣던 ‘꽃의 마법’인가? 잠자던 물건들이 꽃향기를 맡고 깨어나 거리를 활보한다는 동화를 한스는 이전에 읽은 적이 있었다. 동화책 속에서, 우스꽝스러운 필치로 그려진 그림 속에서 물건들-도끼, 망치, 약상자, 주걱, 깃펜, 공책, 항아리, 국자, 책상, 의자 그리고 기타등등-은 저마다 개성 있는 얼굴을 하고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가는 아이들이라도 된 것처럼 한 줄로 거리를 활보했다. 사람들은 곁에서 놀란 눈을 하고 갑자기 생명을 얻게 된 물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손가락질하고, 누군가는 벌어진 입을 가리고, 또 누군가는 혹시 행렬 속에 자기 물건이 없나 살펴보았다. 한스는 물건들도 물건이었지만, 물건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이 더 우스웠다. 우스운 사람들이네. 하지만 지금 한스는 사람들을 보며 우스워할 처지가 아니었다. 두려움에 가까운 압박감을 느끼며 문 앞에 선 한스는 최대한 물건들의 시선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앗,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위험해!
“어? 이게 누구야. 한스 아닌가.”
웃음을 그치고 둘 사이에 갑자기 나타난 꼬마를 향해 주인이 정다운 목소리로 말을 걸어 주었다. 한스는 아저씨의 말을 듣자마자 마법이 풀린 것을 느꼈다.
“아저씨, 정말 고맙습니다. 아저씨가 제게 걸린 마법을 풀어 주었어요!”
허허 하고 웃으며 주인은 한스가 뱉은 말을 단지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한스에게 있어 실체감을 가졌던 마법이 어른 남성에게는 전혀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마법에 예민한 요정이라면 어떨까? 그리고 마침 둘 옆에는 새침데기 요정이 서 있었다.
“너 누구니? 이틀 전에 한번 봤었던 것 같은데.”
요정의 물음을 듣자마자 한스는 다시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허둥대며 할 말을 찾기 위해 손을 오므렸다 폈다 했다. 계속 손을 쥐었다 펴며 한스가 뜸을 들이자 요정은 답답하다는 어조로
“어이, 꼬마. 할 말이 있으면 제대로 하는 게 어때? 이 누나가 그리 인내심이 좋은 사람은 아니니까.”
마지못해 한스는 손에 솟아난 땀을 바지에 대충 닦고 답한다.
“저기... 그러니까요. 저는 한스라고 하는데요...”
“그래서?”
“제가 사는 집은 저쪽에 있는 2층집이고요, 제 아버지는 지주인 요제프씨에요. 보통 사람들은 요제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데요...”
“자꾸 데요, 라고만 하지 말고 좀 제대로 말해 봐. 누가 너를 잡아먹기라도 하니?”
한스는 바로 당신! 당신! 이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답답한 마음을 꾹 누르고 자기소개를 끝마쳤다. 한스의 자기소개를 들은 요정은 별 흥미가 없는 표정이었다. 마치 ‘그래서 어쩌라고?’ 라는 식으로. 한스의 주눅든 모습을 눈치 챈 주인은 요정의 매도로부터 한스를 구해내기 위해 화제를 하나 던졌다.
“그런데 말야, 아가씨. 이 마을에는 어쩌다 오게 된 거지? 보다시피 이 마을은 사람도 적고 대부분 마을에 눌러 사는 사람들이라, 갑자기 찾아오는 여행자를 보면 놀랄 수밖에 없지.”
“아, 그건 말이죠.”
요정은 잠시 생각하는 듯 팔짱을 끼고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다가, 기다란 손가락을 쭉 폄과 동시에 말을 시작했다.
“저와 같이 다니는 키 크고 잘 생긴 분은 저를 저쪽 마을까지 가는 데 지켜주기 위해서, 말하자면 보디가드인 셈이죠. 사실 저도 아버지의 말씀만 없었다면 그냥 혼자 여행을 떠났을 텐데, 아버지께서 하나뿐인 딸인 저를 너무나 걱정하셔서 말이죠...”
그러면서 요정은 자신을 ‘아버지의 하나뿐인 딸’로 감쪽같이 연기했다. 거기에 한스도 두 눈을 둥그렇게 뜨며 속아 넘어갔고, 이제 노년을 바라보고 있는 주인도 그다지 의심을 품지 않았다. 무슨 이유로 한눈에 봐도 갸날파 보이는 여자아이가 거짓말을 하겠는가? 그리고 요정의 말도 진실 반 거짓 반이 섞인 말이었으므로, 거짓말이라고 몰아세울 수도 없었다. 어쨌든 한스는 다행히도 요정의 눈초리를 벗어나 자신의 위치를 가질 수 있었다. 한스는 주인 아저씨를 향해 가볍게 인사를 한 뒤에, 자신이 잡화점에 온 이유를 비교적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갑자기 공작을 하고 싶다고 생각해서요, 공작을 하려면 가위하고 종이하고 풀이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집을 뒤져봤는데 가위하고 종이는 있는데 풀이 없어서, 아, 잡화점에 가면 있겠구나 하고 생각해서 아침부터 오게 됐는데요.”
“그래. 알았다. 그럼 풀만 필요한 거냐? 어떤 풀이 필요하냐? 마른 풀 아니면 질척한 풀?”
“음... 공작을 하려면 마른 풀이 필요하겠죠. 네, 질척하면 종이가 찢어질 테니까.”
주인장과 한스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요정은 옆에 팔짱을 끼고 서서 약간은 바보같다는 생각을 하며 둘을 바라보았다. 저 꼬마아이는 이틀 전에 봤었던 것 같은데, 그 때는 별로 인상이 남지 않았다만. 그런데 갑자기 내가 잡화점에 있는지는 어떻게 알고 잘도 찾아왔을까. 어린애의 육감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 정말로 이 녀석이 풀을 사러 왔을 수도 있지만. 풀을 사러 온 것 치고는 너무 긴장하는데. 저렇게 긴장하면 뒤에서 산적이 잡아가도 모르겠어. 산적이라고 어린아이를 원할 것 같지는 않지만. 어차피 쓸모가 없으니까.
갑자기 요정은 뭔가 생각났는지 쭉 유지하던 팔짱을 풀고 풀을 받은 한스에게 말을 걸었다.
“어이 꼬마. 너, 나한테 뭔가 할 말이 있지?”
“네?” 하며, 한스는 바로 옆에서 풍선이 터지기라도 한 것처럼 번쩍 놀라고는 움츠러든다. 한스는 자신의 진짜 목적이 그녀에게 바로 들켰다는 것에 우선 속으로부터 놀랐고, 그 다음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안 돼 한스! 여기서 멈추면 너는 그저 풀을 사러 온 꼬마로 남을 뿐이야.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뭐라도 좋으니까 아무거나 말해봐! 그래, 저번에 본 축제 이야기를 해 볼까. 축제에서 봤던 재미난 탈 이야기로 서두를 시작하면 어떨까? 매대에 걸어놓은 멧돼지 모양 탈은 정말 웃겼지. 아니, 그건 너무 뜬금없잖아. 갑자기 멧돼지 탈 얘기를 하면 상대방이 얼마나 어이없어 하겠어. 그런데 배가 고프네. 아침을 적게 먹고 와서 그런가. 집에 들어가서 과자를 더 먹는 게 낫겠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자는 아껴두고 그저 그런 과자부터 하나씩 먹자.
“응?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왜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어?”
한스는 요정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세계에 빠져 대답을 못 하고 있다. 요정은 헛웃음을 지을 것처럼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그냥 포기했다는 듯 시선을 한스에게서 다시 주인장으로 돌렸다. 주인장은 웃는 얼굴로 요정의 말을 받았고, 요정도 옆의 꼬마에게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대화에 집중한다. 한스는 배가 고팠는지 풀을 받고 계산도 치르지 않은 채 밖으로 나갈 것처럼 걸음을 옮기고 있다. 이제 물건들은 그를 더 이상 간섭하지 않는다. 마침내 세계는 평온을 되찾았고, 날뛰는 물건들도, 씨익 웃는 얼굴도 전부 사라져버리고 오직 정적만이 남아 있다. 한스가 문에 다다랐을 무렵, 요정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한스를 크게 부른다.
“잠깐! 너한테 할 말이 있어. 그러니까 잠시 여기서 기다려 주지 않을래?”
“기다려 주지 않을래?” 한스에게는 오직 그 말만이 반복하며 울리는 듯했다. 기다려 주지 않을래, 기다려 주지 않을래... 한스는 기쁜 마음을 감출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대로 웃어버리고 마는 꼬마의 적나라한 얼굴. 이 얼굴에는 누구도 당해낼 수 없다. 거기서 꼬마에게 화를 내거나 반대한다면 얼굴은 곧바로 어두워지고 금세 울음을 터뜨릴 것같이 되어버린다. 꼬마를 울게 만들면 나쁜 사람. 꼬마를 웃게 만들면 착한 사람. 요정은 착한 사람일까? 일단 꼬마를 웃게 만들었으니, 착하다고 볼 수 있으려나? 하지만 이런 걸로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을 나누기에는, 세상은 너무도 복잡하다. 이제 요정은 용건을 끝내고 가게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손에 꾸러미 하나를 들고 있는데, 크기는 한 손에 담길 정도로 작은 편이다.
“자, 일단 밖으로 나가자.”
한 손으로 한스의 작은 손을 잡고 문을 나서는 모습은 마치 누나와 동생 사이 같다. 그러나 한스에게는 누나가 없고, 마찬가지로 요정에게도 동생은 없다. 서로의 어떤 부재를 메워줄 것처럼,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다정하게 밖으로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