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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preintes du beau rêve

<외천루>, 이시구로 마사카즈 본문

etc.

<외천루>, 이시구로 마사카즈

barde 2013. 10. 25. 03:16




  만화를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면, 소년만화, 순정만화 그리고 미스터리 만화로 분류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분류에 따르자면 이시구로 마사카즈의 단편 <외천루>는 미스터리 만화에 속하지만, 동시에 소년만화스러운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그가 그래마을에서 보여주었던 센스는 여기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이 분류가 적절한지 어쩐지 하는 건 우선 넘어가기로 하고, 지금부터 이 충격적인 만화, <외천루>에 대해 말해보기로 하자.


  <외천루>의 플롯은 다른 미스터리에 비하면 단순한 편이다. 분량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처음에 복선을 지니고 있는 간단한 에피소드가 몇 편 제시되고, 5화부터 본격적으로 메인 스토리가 시작된다. 하지만 메인 스토리에만 집중한다면 이 만화가 정말로 말하고자 하는 것, 작품 속에 숨겨 두었던 메시지를 놓칠 수 있다. 이 메시지는 제3화, "죄책감"에서 주어진다.


  우선 제3화의 내용을 간략히 설명하자면, 한 소녀가 작중에서 중요한 취급을 받는 건물인 외천루에 살고 있다. 소녀는 돈을 벌기 위해 페어리 배터리 공장에 다니는데,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로봇을 영 못마땅해한다. 다른 '로봇'과 비교하며 소녀는 자신의 로봇 S12-M0201이 너무 낡아서, 오래된 물건이라 불만을 느낀다. 그래서 소녀는 로봇을 폐기장에 버릴 생각을 한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만, 아침이 되자 로봇은 다시 돌아와 있다. 거기서 소녀는 로봇을 '파괴할' 생각을 하고, 메인 배터리를 망가뜨린다. 하지만 로봇은 긴급모드로 전환해 소녀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소녀는 로봇과 '맞서 싸우고', 결국 로봇을 멈추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소녀는 로봇과 함께 지냈던 과거를 추억하며 '죄책감'을 느낀다. 하지만 이미 로봇은 긴급 통신을 보냈고, "로봇 폐기법 위반 및 로봇 부정 해체 혐의"로 소녀는 처분당한다. 알고 보니 소녀는 P99S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로봇이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만, 흥미로운 지점이 두 군데 있다. 하나는 소녀가 자신이 로봇임에도 불구하고, S21을 향해 "그딴 전자음으로 사랑 타령해 봤자, 키보드 몇 번 두드리는 소리로밖에 안 들리거든!" 이라 말하는 장면이다. 로봇이 로봇에게 '인간답지 않다'고 타박하는 장면은, 퍽 인상깊다. 그리고 마지막에 로봇공학의 권위자 세리자와 박사의 입을 빌려 작가는 말한다.

"아! 작동은 했군... 여기 기록이 있어. 죄책감 회로. 거 참... 범행 이전에 회로가 작동을 해 줘야지, 이래서야 원..."[각주:1]

"순위 문제가 아니죠. 애당초 아직 하지 않은 일 갖고 죄책감을 느낄 수 있을까요, 로봇이?"

"글쎄, 욕심이나 시샘처럼 어두운 감정은 멀쩡히 기능하는데 말이야..."

이 말이 대체 무엇을 '지칭하는' 것일까? 로봇이 단지 그렇다고 생각해 버리면 이야기는 거기서 끝난다. 하지만 지칭하는 '대상'이 로봇이 아니라면? 이제 6화로 넘어가 보자.


  제6화의 제목은 "용의자 M의 변신"이다. 이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용의자 M의 헌신"을 살짝 비튼 것이다. 제목이 뜻하는 대로 6화에는 모로하 켄이라는 18세 소년이 자신의 범행을 고백하는데, 인간을 죽였다는 데 죄책감을 느끼던 그였지만, 자신이 찌른 '인간'들이 로봇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의 태도는 180도 변한다. 그는 말한다.

"어쩐지. 그래서 그렇게 찔러 댔는데 피 한 방울 안 나왔나 보네요. 지금 생각해 보니. 덕분에 의심 한 번 안 받고 집에 돌아갈 수도 있었고... 결국 로봇 여섯 대 부수고 전지 하나 훔친 것밖에 한 게 없네요? ...저.

협박장은 보냈지만 살인에 비하면 별것 아니잖아요?! 또 아직 미성년이고... 물론 거짓말은 좀 했지만...

전부 로봇이랑 위선자 놈들 탓이라고요! 안 그래요? 그렇게 인간처럼 안 생겼으면 저도 착각해서 그런 거짓말은 안 했을 거라니까요! 그 거지 같은 로봇 규제에 따라 진짜 사람도 아닌 로봇을 '한 명', '두 명'이라고 불러대는 꼴 하며...!"

모로하 켄은 자신이 찌른 '존재'를 인간으로 받아들였을 때는 분명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자신이 찌른 '인간'이 로봇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죄책감은 사라지고 자신은 "결국 로봇 여섯 대 부수고 전지 하나 훔친 것밖에 한 게 없"다고 변명한다. 이 말이 인간과 로봇의 구별이 분명한 사회에서는 별 문제가 없을지도 모르지만(없다는 말이 아니다), 인간과 로봇의 구별이 어려운 사회에서는 큰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은 로봇을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사용하지만, 인공지능이 충분히 발달한 로봇도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럼 로봇도 인간과 동등한 존재로 인정해야 한다는 말인가? 인류는 자신의 존재우위를 위협받는다. 그래서 위협받는 정신은 두 가지 갈래로 갈라진다. 하나는 자기반성이 가능한 로봇이라는 껄끄러운 존재를 받아들이는 대신 아예 금지해버리고, 다른 하나는 로봇은 인간과 엄연히 '다르므로' (여기에는 과학 발전을 위해 로봇과 페어리[각주:2]를 다루는 사람들은 가치중립적이라는 변명이 추가된다.) 인간이 로봇을 가지고 뭘 하든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윤리적으로 제약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강력히 거부한다. 그러나 둘 다 명쾌한 해결책은 아니다. 로봇은 인간의 얼굴을 하고 인간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인간의 얼굴은 곧 타자의 얼굴이다. 타자를 존중할 수밖에 없는 '죄책감'에 기반한 윤리에 따르자면, 그 대상이 로봇이 됐든 인간이 됐든 '존재자'를 인정하고 존중해 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페어리도 그렇고, 로봇도 그렇고, 사람이랑 좀 닮았다 하면 웬 과잉 반응들이 그렇게 나오는지 모르겠군요!" 여기서 인간의 윤리는 한없이 오그라든다. 세리자와 박사는 로봇에게 '죄책감 회로'를 설치했지만, 막상 자신들이 하는 일이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른다. '로봇마저도' 느끼는 죄책감을 어떤 인간은 느끼지 못한다. 페어리인 아리오의 누나를 달라고 한 세리자와도 그렇고, 자신이 만들어 낸 생명체인 키리에를 강간하는 키쿠치 도게도 그렇고, 자신이 찌른 자가 인간이 아님을 알자마자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모로하 켄도 그렇다. 그들은 인간이 만들어 낸 윤리에서 벗어난 존재들이다. 그러나 문명 자체가 그러한 모순을 품고 있다고 한다면, 그리고 모두가 그러한 모순을 품고 있다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인가.


  <외천루>의 반전이 드러나는 후반에, 아리오와의 대화에서 세리자와는 말한다.

"자살이었어..."

"자살?"

"태어날 때부터 지닌 모순의 답에 도달하지 못해 정지해 버린 거야... 예컨대... 사람은 이성과 교접을 통해서 태어나지. 그 사실은 신성시하면서도 이성에 대한 흥미와 성행위 그 자체는 수치스러워하고, 숨기고, 경멸하잖아. 온갖 모순을 때와 장소에 따라 드러내기도 하고 감추기도 하며 낯 두껍게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인간! 로봇은 그게 안 됐던 거야."

로봇의 인공지능을 개량해 봤지만 어느 시점에서 로봇은 정지해버리고 만다. 이유는 바로 인간이 가지고 사는 '모순'을 로봇은 해결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과 로봇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바로 이것이다. 로봇은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은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 살아간다. 문명은 그런 인간을 모순을 유지한 채로 충돌 없이 살아가게 만들기 위해 기획된 '장치'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한다면 '죄책감'에 기반한 윤리는 문명에 역행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실제로 그렇기는 하지만, 문명은 동시에 윤리를 '제도화'함으로써 도덕을 인간의 마음에 각인한다. 대표적으로 독일의 과거사 반성이 그렇다. 여기서 모순은 자신의 자리를 도덕에게 내 줄 수밖에 없다. (작중에서 페어리와 로봇을 금지한다는 한 외국인의 발언을 상기해 보라.) 하지만 어떤 사회는 윤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외천루>는 그러한 사회에 질문을 던진다. "당신들은 앞으로 도래할 타자의 얼굴을 외면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는 앞으로 인류가 풀어 나가야 할 질문이기도 하다.

  1. 쌍따옴표 안의 강조는 원문에 따른 것이다. [본문으로]
  2. 인간의 체세포에서 만들어 낸 인공생명체. 작중에서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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