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   2025/03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l'Empreintes du beau rêve

염려 없음으로 가득한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본문

etc.

염려 없음으로 가득한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barde 2013. 11. 28. 18:35




 글은 때때로 한 마디 문장에서 시작하기도 한다. 그리고 한 마디 문장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유를 너무 많이 마시지 말아라, 그리하면 곧 모든 사람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


  재미없음은 어디서부터 연유하는 것일까. 재미없는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자신의 삶이 하필이면 재미없는 이유를 궁금해한 적이 있을 것이다. 없다면 그것대로 좋지만, 있다고 가정해 보기로 하자. 가장 손쉬운 방법은 자신이 세계의 '주인공'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럴 확률이 아주 높기 때문에,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만 하면, 재미없는 세상은 꽤나 그럴 법하게 다가온다. 어딘가 주인공이 있고, 나는 주인공이 아니다. 단지 조연이거나, 그마저도 아닐 수도 있다. 여하간 주인공을 중심으로 세상은 돌아가기 때문에, 내 삶이 재미없는 이유도 명백해진다. 누구도 나의 삶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삶은 오직 나만이 신경쓰는, 아무래도 좋을 삶이다. 사고는 점차 단순해지고, 자신에게 닥친 시련에도 점차 무덤덤하게 된다. 그 시련은 의미를 갖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금 더 어려운 방법이 있다. 바로 자신을 주인공은 아니지만, 누군가의 계획에 따라 '연출된'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럴 확률은 아주 낮지만, 이 역시 그럴 거라고 믿기만 하면 높은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내 삶이 재미없는 이유는, 연출가나 작가나 만화가나 감독이나 기타 등등이 그렇게 연출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의지를 전혀 모른다. 다만, 그들의 의지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 여기에는 주체의 '책임'이 사라져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마찬가지로, 모든 이의 책임은 사라져 있다. 바꿔 말하면, 오로지 나 자신을 연출하는 연출가나 작가나 만화가나 감독이나 기타 등등이 '작품'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자신의 책임을 외면하지만 않는다면, 나는 사라진 책임 아래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물론 그 자유는 '연출된' 자유에 지나지 않겠지만 말이다. 꽤나 편한 생각이기는 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건 별로 추천하는 바는 아닌데, 자신을 세계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럴 확률은 매우 낮고, 더불어 자신의 설령 세계의 주인공이라고 해도, 곧 모순에 빠지고 만다. 왜냐하면 세계의 '주인공'에게 재미없는 삶 같은 게 부여될 리 없기 때문이다. 이건 바틀비적 비틀거림(I'd prefer not to...)도 아니고, 뫼르소의 고뇌 같은 것도 아니고, 하물며 재미없는 주인공의 삶을 관음하는 모든 사람들이 있다는 가정도 아니다. 주인공의 더럽게 재미없는 삶을 즐기는 사람은 오직 문학자밖에 없다. 그리고 문학자에게나 읽히고 평해지는 삶은 꽤나 끔찍하다. 그런데도 자신을 세상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며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맞추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다. 보통 이런 사람들은 기피되지만, 자신을 주인공으로 생각한다는 단 한 가지만 제외한다면, 그들은 그렇게 나쁘지 않다. 사람들은 이들을 넓은 관용으로 대할 필요가 있다. 스스로 주인공이 되는 험난한 길을 선택했으니.


  음, 나는 어느 쪽이냐고 한다면, 머리는 첫 번째라고 말하지만, 마음은 두 번째라고 믿기를 원한다. 어차피 두 번째부터는 '믿음'의 영역이니까,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데는 재미없는 삶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지만, 그보다는 내가 겪는 시련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함이 크다. 그런데 모든 자잘한 시련에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으니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몇 가지 큰 시련에만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이런 생각을 나는 치킨버거를 먹으면서 했다. 정확히 말하면 생각의 단초가 될 몇 가지 '착상'을 떠올렸다. 내가 치킨버거를 먹고 있을 때, 투명한 유리창으로 앞에 몇 사람이 지나가는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멀리서 걸어오는 사람이 보이기도 했다. 그들이 모두 '연출된' 존재에 불과하다고 한다면,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아니, 왜 나는 여기서 치킨버거를 먹고 있는가. 그 "버거를 먹는다는 일"에 대한 이유없음이 나를 괴롭혔다. 배가 고프니까 점심을 먹는다, 이건 단순한 원인에 불과하다. 나는 좀 더 근원적인 '이유'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점심을 다 먹을 때까지 그 '이유'를 찾지 못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세계로 던져진 인간이 근본적인 '이유 없음'에 처해 있다고 한다면, 믿음을 가지는 행위는 의미를 가지기도 하며, 가지지 않기도 한다. 믿음을 가짐으로써 '이유 없음'에서 벗어날 수도 있고, 또는 믿음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이유 없음'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는 이유는 아마, 세계의 근본적이고도 본질적인 '이유 없음'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염려 없음으로 가득한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적었다. 그리고 이 글이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다만 나의 경험이 다른 사람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법한 경험이기 때문일 것이다. 차마 보편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