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mpreintes du beau rêve
해소될 수 없는 오해의 곤란: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경우 본문
- 이해보다 오해가 앞선다
하이데거가 위의 문장에 대해 무엇을 말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여기서 ‘오해’란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존재의 빗나간 자기이해를 말한다. 하이데거는 이를 쇠퇴(Ruinanz), 퇴락(Verfallen), 이탈-존재(Wegsein)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해’란 본래적이고 가능적인 자기이해를 말한다. 해석학은 본래 세계-내-존재인 현존재가 행하는 빗나간 자기이해를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본래적이고 가능적인 자기이해를 촉구한다. 1
하이데거의 이와 같은 해석학은 기존의 해석학과는 많이 다르다. 기존의 해석학에서는, 현존재의 자기이해보다는 기술Kunst로서의 이해에 중심을 두었다. 슐라이어마허는 이렇게 말한다. “[이해의] 기술(Kunst)에서의 느슨한 실천은 이해가 저절로 생겨나고, 오해가 피해져야 한다는 목표를 소극적으로 나타낸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그에게 있어서 해석학의 전제는 만연된 오해이고, 이 만연된 오해로 인해 이해의 보편적 기술론으로서의 보편적 해석학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기술 중심적 해석학은 하이데거에게 있어선 해석의 일(과제)로서의 이해의 완성을 도외시한 제한적인 해석학일 뿐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현상학”, 곧 현존재의 자기이해를 해석적으로 완성함이 곧 “해석의 일”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가다머는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을까? 가다머는 플라톤의 견해를 수용한다. 그리고 플라톤은 대화편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수사술에 대해 비판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의 말(Logos)이 쓰여 있게 되자마자, 그 말은 도처로 유포되는데,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물론 그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들에게도 유포된다.”
“만약에 그 말이 모욕을 당하거나 부당하게 비방된다면, 그것은 돕는 사람으로서 언제나 아버지인 저자를 필요로 한다.”
“쓰인 말의 진정한 친형제는, 앎에 의해 학습자의 영혼 속으로 쓰여 있고 자기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말이자 누구에 대해서 발언하거나 침묵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말일 것이다; 이것은 쓰인 말이 그것에 대해 단지 하나의 모사물인, 생생하고도 영혼이 깃든 말일 것이다.”
우선 첫 번째 문장에 대해 해설해 보기로 하자.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비판하고 있는 것은 쓰여진 말, 텍스트로 내려앉은 말이다. 쓰인 말은 저자를 떠나 도처로 유포된다. 저자는 자신이 쓴 글이 어디로 갈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들에게도 유포”될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두 번째 문장에서 소크라테스는 만약 쓰인 말이 ‘오해될’ 경우, 그것은 “돕는 사람으로서 언제나 아버지인 저자를 필요로 한다.” 저자만이 쓰여진 말의 참의미, 즉 ‘영혼’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문장에서 소크라테스는 쓰인 말과 영혼이 깃든 말을 대비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쓰인 말이 “생생하고도 영혼이 깃든 말”의 “단지 하나의 모사물”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모사물’이라는 표현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를 엿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오직 말해지는 말이 참된 말이라고 주장하며 글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플라톤의 글로 소크라테스를 접할 수밖에 없다.
가다머는 플라톤의 견해를 수용하지만, 가다머 자신의 맥락에서 ‘오해’에 대해 새로운 설명을 덧붙인다. 우선 가다머가 오해를 기존의 의미대로 나쁘게 보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가다머는 “이해의 역사성을 해석학적 원리로 고양”시킨다. 여기서 역사적으로 제약된 것으로서 “선입견”이 중요해진다. 왜냐면 선입견들이 해석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선입견들은 하나의 이해지평인데, “선입견들이 선이해로서 해석적 이해의 조건들이라고 한다면, 역사적으로 제약된 이해 내지 이해의 역사성은 하나의 제한이기보다는 해석적 이해의 한 원리”이기 때문이다. 가다머는 그래서 선입견을 “이해의 조건들”이라고 규정한다. 이해 이전에 이미 인간에게는 수많은 선입견들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오해는 생겨날 수밖에 없으며, 오히려 오해가 먼저 있기 때문에 이해가 발생한다고 말해야 한다.
선입견이 개인의 존재의 역사적 현실성이라는 사실은 이해의 역사성이라고 규정되고, 이것이 가다머에 의해 해석학의 원리로 고양된다.
- 해석은 기술이 아니라 과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이데거는 기술(Kunst)로서의 해석학에 비판적이었다. 우선 하이데거의 글을 인용해 보기로 하자.
“‘규칙 제공’이라는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 개념을 넘겨받고, 그것에게 이해 자체의 분석을 통해 기초를 마련해 주고, 정신과학들의 발전을 위한 그의 연구들과 연관시켜 해석학의 발전도 또한 추구하였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그의 입장의 위험한 숙명적인 제한이 드러난다.”고 본다. 하이데거가 제한 이전의 본래적인 해석학으로, 또 자신의 과제로 내세우는 것은 통상의 “해석에 관한 학설”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인데, 이를 그는 “전달의 완성(Vollzug des hermeneuein)의 일정한 통일성, 곧 현사실성(Faktizitat)을 만남, 봄, 잡음, 개념에 데려오는, 해석의 일정한 통일성” 내지 “해석의 일”이라고 한다. 해석학은 해석의 일(과제)로서 이해의 완성이지 이해의 기술이 아니다. 이러한 해석학은 이해의 기술 내지 이해의 규칙 제공의 학으로서의 해석학으로부터 현존재의 존재와 존재구조로 초월론적으로 전향한 해석학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현상학”, 곧 현존재의 자기이해를 해석적으로 완성함이 “근원적인 낱말 의미에서의 해석학”, 곧 “해석의 일”이라고 본다. 이러한 해석의 일이 가져오는 결과는 앞서 이해된 것(선이해)의 명시적인 재이해이다: “해석 속에서 이해함은 그것이 [이미] 이해한 것을 [다시] 이해하면서 자기 것으로 삼는다. 이해함은 해석 속에서 어떤 다른 것이 되는 게 아니라 그 자신으로 된다.” 여기서 “이미 이해한 것”은 선이해-가다머 식으로 표현하자면 선입견-가 되고, “다시 이해”한 것은 재이해가 된다. 전통적 해석학에서는 해석이 이해의 수단으로 말해지지만, 하이데거에게서는 이해가 일차적인 것이 되고, 해석은 오직 이해의 전개와 완성에 해당한다.
가다머에게 있어서도 해석의 중요성보다는 해석 이전의 선이해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가다머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인용하며 외적인 말에 대비되는 내적인 말에 관해 말한다. “내적인 말(inneres Wort)은 물론 특정한 언어에 연관되어 있지도 않고, 기억에서부터 출현한 낱말들이 머리에 떠오름이라는 성격도 전혀 갖지 않고, 오히려 그것은 끝까지 사유된 사태이다.” 끝까지 사유된 사태로서의 내적인 말은 특정한 표현 속에 제약되어 있지 않은 말이다. 끝까지 사유된 사태로서의 마음의 말은 진술에 대해 물음지평 내지 의미지평이다. 이 의미지평은 진술 속에서 말해지지 않은 것이지만 그 진술을 이해될 수 있는 말로 되게 해 주는 것이다.
“진술되어 있는 것이 모든 것은 아니다. 말해지지 않은 것이 비로소 말해진 것을 우리에게 도달할 수 있는 말(Wort)이 되게 한다.” 내면적인 말 내지 말의 내면성은 영혼의 내면성이 아니라 의미의 내면성을 가리킨다. 이 내면성(의미지평)은 의미되었으나 숨겨져 있는 것이고, 이 숨겨진 내면성에 이르는 방법이 이해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가다머의 해석학에 있어 중요한 개념은 바로 ‘선입견들(Vorurteile)’이다. 가다머의 이러한 견해는 해석학적 순환의 존재론적 구조에 대한 하이데거의 발견에 단서를 둔다. 가다머가 요약하는,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순환의 의미는 다음이다: “앞선 기투(Vorentwurf)의 모든 교정이 하나의 새로운 의미기투를 미리 [예비적으로] 던질 가능성 속에 놓여 있다는 점, 의미의 통일성이 더욱 명료히 확립될 때까지 경쟁적인 기투들이 완성을 위해 나란히 데려와질 수 있다는 점, 해석이 앞선 [예비적인] 개념들과 더불어 시작하고 이 앞선 개념들은 더욱 적절한 개념들을 통해 대체된다는 점, 바로 이러한 끊임없는 새로운 기투행위가 이해 및 해석의 의미운동(Sinnbewegung)을 형성한다는 점이 하이데거가 기술하는 (해석학적 순환의) 절차이다.”
해석학은 선입견들을 제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승인해야 하고, 이 선입견들을 해석적으로 완성해 내야 한다. 이런 한에서 해석적 이해의 과제를 가다머는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기투들이 사안들에 입각해 비로소 보증되어야 마땅한 선취들이므로, 올바르고 사안에 적합한 기투들을 완성해 냄(Ausarbeitung)이 이해의 끊임없는 과제이다.”
그렇다고 가다머가 선입견만을 중요시하는 것은 아니다. 가다머에게 있어서 이해는 문답적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플라톤의 대화와 그리스 논리학의 대화적 근원이 입증하듯이, 판단이 아니라 물음이 논리학에서 우위를 갖는 것이다. 진술에 대한 물음의 우위는 그러나 진술이 본질적으로 대답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일종의 대답을 나타내지 않는 진술은 없다.” 이런 한에서 진술의 이해는 물음, 곧 진술의 동기 내지 배경의 이해로서만 발생한다: “모든 진술은 동기지어져 있다. 모든 진술은 그것이 진술하지 않는 전제들을 갖고 있다. 이러한 진술들을 함께 사유하는 자만이, 어떤 진술의 진리에 실질적으로 도달할 수 있다. 나는 주장하는 바, 모든 진술의 그러한 동기의 최종적인 논리적 형식이 물음이다.”
진술은 언어를 통해 말한다. 하지만 ‘읽는 자’는 진술이 진술하지 않는 전제를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독자는 “이러한 진술들을 함께 사유”할 수 있을까? “진술의 진리”에 도달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키나 할까? 가다머는 여기서 한발 물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가다머의 말을 인용해 보기로 한다.
“가끔이 아니라 언제나 한 원문의 의미는 그 저자를 넘어선다. 따라서 이해는 단지 재생적인 행위인 것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또한 생산적인 행위이다.”
“[...] 사람들이 여하튼 이해한다면 사람들은 다르게 이해한다.”
가다머에게 있어서 이제 이해는 생산적인 행위로 변모한다. 독자는 저자가 저술한 글을 읽으며 언제나 글을 넘어선다. 바로 독자가 저자의 참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독자가 ‘선입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독자는 재생적 이해를 넘어 생산적 이해가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는 당연히 저자의 의도와는 다르다. 이해가 재생을 넘어 생산적인 이해가 되는 이유는 원문의 이해가 나의 상황 및 상황 속의 나의 이해를, 간략히 말해 자기이해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자기이해를 수반하는 이해는 적용으로서의 이해이다.
가다머에게 있어서 보편적 의미와는 다른 의미에서 언어가 중요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가다머는 인식론에서 다루는 언어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다머는 자신의 해석학을 통해 언어를 인식론에서 존재론으로 전회한다. 가다머는 이렇게 말한다. “이해될 수 있는 존재는 언어이다.” 오직 언어만이 이해될 수 있으며, 그 이해 또한 “말의 전체 내용을 완성하여, 완성된 언어가 드러내주는 존재 전체에 다가설 수 있”다. 가다머의 해석학은 인간의 언어추구의 보편성에 의거해 텍스트와의 대화를 통해 내적인 말 내지 의미지평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같은 해석학은 언어이해의 자현방식을 대화와 지평융합으로 보는 지평융합적 존재론이라고 규정될 수 있는 것이다.
- 오해란 필연적인가?
레포트를 쓰기에 앞서, 나는 내가 오해받았던 경험을 반추해 보았다. 물론 사례를 나열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오직 ‘발설된 말’이 참된 말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참된 말이라고 해도 오해를 피할 수는 없다. 우선 나는 내가 생각한 것 중 일부만을 ‘말하기’ 때문에 그렇고, 상대는 나의 말을 듣고 자신의 맥락에서(가다머 식으로 표현하자면 선입견을 가지고) 이해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볼츠는 이성과 이상적인 대화 모델을 주장하는 하버마스에 맞서 루만의 체계이론을 옹호한다.
나도 볼츠의 이러한 견해에 동의하기 때문에, 하버마스처럼 쉽게 이성을 믿거나 대화의 가능성(화용론)을 주장하는 말을 삐딱한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화를 안 하고 살 수는 없다. 루만이 말하는 것처럼, “그럼에도 우리가 소통을 해야 하는 이유는 소통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소통은 인간이 살기 위한 하나의 체계에 불과하다.” 그리고 루만은 학교나 가족의 예를 들며 “아버지와 아들 혹은 선생과 학생이란 가족이란 소통 체계와 학교 제도라는 소통 체계의 산물이며 그 체계를 형성하는 두 항일 뿐이다.” 라고 말한다. “따라서 루만에 의하면 커뮤니케이션이란 그에 앞서 주어진 주체들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커뮤니케이션 그 자체의 산물일 뿐이다. 말하자면 인간이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이 커뮤니케이션할 따름이다.”
너무 이야기가 비관적으로 흘러간 것 같아서, 3에 집중해 보고자 다시 나의 개인적인 경험으로 돌아와 보도록 한다. 한번은 친구에게 여차저차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내용은 잘 기억이 안 난다.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던 듯하다.) 그런데 친구는 그걸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나는 그에 대해 후에 친구에게 자세하게 설명 겸 변명을 하였다. 굳이 내가 변명을 할 필요는 없었지만, 루만의 말처럼 “소통하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하게 되었다. 친구는 내 말에 수긍하는 태도였기 때문에, 나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오해가 가라앉은 뒤에도 나에게는 한 가지 의문이 밑바닥에 남아 나의 발등을 간지럽혔다. 말이란 필연적으로 오해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오해가 필연적이기 때문에, 한 마디에 모든 의미를 전달한다는 기도는 불가능한 게 아닐까? 경험을 한겹 한겹 쌓아 나가다 보면 어떤 짓을 해도 오해는 피할 수 없는 장애물처럼 여겨진다. 김을 겹쳐 씹으면 돌이 씹히는 것과 같은 느낌이 나는 것과 같이, 말을 하면 할수록 오해는 쌓여 아그작 하고 관계에 균열을 낸다. 다시 개인적인 경험을 풀어보자면, 나는 이 ‘오해된다’는 문제 때문에 고등학생 때 심각한 고민을 한 적이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이 너무나 조심성 없는 ‘말’에 대해, 대단한 불신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특히나 어린 학생들은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내뱉는다. 그들은 심지어 자신의 말이 오해될 거라는 사실조차 염두에 두지 않고 말하기 때문에, 듣는 이는 그가 세심하면 세심할수록 말에 대해 불신을 품게 된다. 그런 연유로 나는 소통하지 않는 방법을 택했고, 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역시 소통하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자, 위의 내용을 정리해 보자. 나는 수없이 많은 오해당한 경험을 나의 몸에 가지고 있고, 또 그 오해를 해소한 경우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일단 말을 하지 않으면 오해는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될 뿐이고, 그렇다고 말을 해도 오해를 맞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세계사에서 단 한 마디 말로 전쟁이 일어난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말은 오해를 불러내었다. 전쟁의 포화가 지나간 21세기에, 세심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오해가 필연적임을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오해를 교정해 나가는 시도가 아닐까 한다. 비록 그것이 비무장지대에 깔린 180만 개의 지뢰를 제거하는 일처럼 부질없어 보이더라도 말이다.
- 밑줄친 내용은 <현대존재론>, 정은해 저 에서 따온 것.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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