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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preintes du beau rêve

상흔 - 한 기계에 대한 설명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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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흔 - 한 기계에 대한 설명

barde 2014. 3. 8. 05:05

   2년 전에 쓴 글. 중2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현재의 나 사이의 어딘가에서 방황하던 나 자신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하나하나 점자로 찍은 것만 같은 개념어의 사용이 인상적이다.




살다 보면 좋았던 기억은 아련한 이미지로만 남아 사진을 보며, 또는 글을 읽으며 회상하며 추억에 젖기나 하지만, 나빴던, 사무친 기억은 가슴 속 깊이 패인 상처로 남아 잊어버린 듯 하다가도 갑자기 떠올라 식은땀을 흘리게 한다. 내게 있어 상흔이란 사람과의 관계 미숙에서 비롯된, 어찌 보면 하찮게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겪은’ 입장에서 보면 심각한 상처trauma다. 그렇기에 혼자서 잘 지내다가도 갑자기 돌아오며, 평온을 가장하며 살아가다가도 트라우마가 목을 콱 죄는 순간이 있어 그 때만큼은 심각한 고통의 재귀를 경험한다.


나는 왜 이다지도 사람을 두려워하는가. 하지만 방어하는 껍질을 한 꺼풀 한 꺼풀씩 벗겨내 가다보면 실은 내가 사람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나의 세계’에 다른 이가 침범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임을 사무치게 알 수 있다. 내가 태어나 살아가는 순간부터 나는 어떤 ‘특별한’ 존재였고, 그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겨왔다. 그게 깨져버린 게 바로 고등학교 때다. 그 때야말로 나는 벌거벗겨진 ‘보통 사람’이었으며, 다른 이들을 온전한 무엇으로 대하지 않으면 생존 경쟁에서 낙오되고 마는, 약하디 약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타자의 윤리’에 대해 말할 때 흔히 타자는 ‘얼굴’로 주체에게 다가온다고 한다. 얼굴은 부정할 수도, 숨겨놓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살아갈 수도 없는 ‘타자 그 자체’로, 주체는 신적 계기에 의해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혹은 하나가 택해진다). 타자를 받아들이느냐 타자가 없던 세상을 계속 살아 나가느냐. 레비나스는 물론 전자를 택했고, 그의 과거를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자의 회고록’—하지만 단순히 회상하는 것만은 아닌—으로 재구성했다. 주체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한 타자의 윤리가 영겁의 시간이 지난 후 망령으로 남아 주체를, 주체의 후손들을 괴롭힌다면, 타자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주체는 결국 뼈아프게 타자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실은 이것 역시 일종의 ‘기만’이었다는 것을 현대 사상가들이 폭로하고 있지만, 곳곳에서 ‘국가이성’이 발흥했던 ‘대전쟁 사이 기간’에 비하면 많이 나아진 거다.


이에 비해 나는 수많은 ‘타자’들을, 제각기 다른 욕망을 지니고 있고 다른 말을 하는 타자를 얼마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다시 고등학교 때로 돌아가서, 나는 벌거벗겨진 채 처음으로 진정한 고독을 경험했다. 그것은 깊은 심연이었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어둠이었으며, ‘나 자체’를 어떤 간섭 없이 느낄 수 있는 무향실이었다. 허나 그 후 1년동안 학교 생활을 계속해 나가야 했고, 그 때만큼 고통스럽고 힘겨운 때도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초등학교 후반기나 중학교 때가 타인을 ‘도구’로 보는 법을 습득해 버린 치기 어린 악마들의 폭력을 경험하고 자랐다면, 고등학교 때는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배우는, 지식을 머릿속에 꾹꾹 밀어넣는—마치 망상대리인에서 공식들을 꾸역꾸역 먹는 학생이 그런 것처럼—합리적 인간들 사이에서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고독은 사람을 어떤 식으로 재구성하는가를 몸으로 느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고독을 익힌 지 2년 반이란 시간이 지나고서야 나는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것 또한 내가 선택했다기보다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선택된 것이다.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진실, 눈을 피할 수 없는 진실이 바로 이것이다. 내가 선택되었다는 것, 주체성을 지닌 인간은 결코 될 수 없다는 사실. ‘나’라는 주체는 결국 구조 속의 산물인 것이고, 재능이나 특질 같은 것도 내가 개발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다. 인간의 주체성을 굳게 믿는 인간이라면 이와 같은 사고 방식을 바퀴벌레보다도 혐오하겠지만, 그렇게 살아온—그리고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도 계속 경험하고 있는 명백한 진실이란 그렇다. ‘나’라는 단독자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바꿔 말하면, 타자가 나를 선택할 운명적인 순간에 몸을 맡길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직까지는 “아니”라고밖에 할 수 없겠다. 살면서 나보다 내향적인 사람을 얼마 보지 못했고(하긴, 나보다 내향적이라면 아예 밖으로 나오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도 트라우마에 허우적대며 잠에서 깨어난다. 해가 중천에 떠 오르면 졸린 눈을 하고 지나간 꿈을 되짚어 보는데, 아지랑이처럼 악몽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연기하던 배우들과 상황들이 상기된다. 정신이 말짱한 와중에 그런 기억이 갑자기 의식의 심연에서부터 비집고 올라온다면 적잖이 당황할 것이다. 다만 꿈이니 되새겨 보는 시도를 하는 것이지.


다시 물어본다면, 당신은 얼마나 용기있는가? 나는 여기에 대답할 수 없다. 나에겐 용기가 없다, 아니, 용기가 실패하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에 용기를 믿지 않는다. 나는 다만 전망을 볼 뿐이다. 그 전망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든 나는 긍정해야 한다. 그것이 살아가는 방식이기에, 시련 속에서 걸어가는 오솔길이기에. 이렇게 되면 타자도 결국 긍정해야 할 대상이다. 타자가 내게 어떤 식으로 다가오든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긍정하지 못하면 삶은 거기서 끝나고 마므로. 그렇기에 내게 있어 타자는 윤리라기보다, 긍정해야 할 사건이다. 사건 밑의 불가해함이다.


새벽에 글을 쓰면 글이 두서 없이 길어지게 된다. 낮에는 아예 글이 잘 안 나가니 논외로 하더라도, 밤에 쓰는 글과 새벽에 쓰는 글은 확실히 차이가 있다. 밤에는 이성을 대변하는 ‘나’가 글을 쓰고, 새벽엔 무의식과 의식 사이에서, 트라우마와 합리화 사이에서 생각이 샘이 솟듯 솟아오른다. 글을 쓰면서 사유하는 것이다. 만약 말이 문자가 되지 못했더라면, 상형문자가 종이 위를 지배했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거대한 상징을 종이 위에 ‘던져놓는’ 것이고, 사유한다는 것은 그 상징의 도면을 그리는 것이다. 실제로 글을 쓰는 것도 그와 비슷한 과정이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구체적인 과정은 확연히 다르다(새벽에 글을 써 본 사람은 아마 알 것이다).


사유 자신이 사유하도록 부추기는, 사유에 사유거리를 제공하는 무엇이 없으면 사유는 어떤 것도 아니라는 들뢰즈의 말은 그래서 여운을 남긴다. 내게 있어 그것은 트라우마와 수많은 소설, 철학책들이다. 트라우마가 암흑 에너지와도 같아서 나의 사유를 팽창시킨다면 소설과 철학은 사유라는 공간의 자양분, 구성 요소가 된다. 사유 속에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흐름이 있다면 오직 팽창과 질서화—임계점에서 벌어지는—뿐이다. 여기서 나의 사유는 잠시 휴식을 가진다. 그렇다고 해서 사유가 멈춰버리는 것은 아니다. 사유는 끊임없이 자신을 팽창시킬 ‘무엇’과의 긴장을 지니고 있고 사유 자신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모든 과정은 무의식과 의식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무한한, 연속되는 운동의 과정을 거치며 사유가 사방으로 팽창해 나가는 동안, ‘나’라는 분열하는 주체는 끊임없이 ‘타자’라는 사건을 경험한다. 이게 나라는 ‘기계’가 살아 나가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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