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mpreintes du beau rêve
<피부색: 꿀> 감상 본문
<피부색: 꿀>은 어쩌면, 애니메이션에서 '타자'를 다루는 일반적인 길, 왕도를 따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벨기에에 입양된 '한국계 전정식', 벨기에 이름 '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융'은, 두 살 정도에 벨기에 가정에 입양되어 그곳에서 평생을 살아온 한국계 벨기에인이다. 그는 자라면서 도둑질을 하기도 하고, 일본의 화려한 문화를 접하기도 하고(여기서 그는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부정한다), 발레를 배우기도 하고, 식권을 훔치기도 하고, '동양인 자식', '짱개' 같은 욕을 듣기도 하고, 머리가 자라서는 일탈을 겪기도 하면서, 점차 '어른'으로 성장해 간다. 융의 가족은 융에게 아주 관대하다. 비록 아버지나 어머니가 매질을 하기도 하고(채찍으로 융을 때리는 것이 아주 무섭게 묘사된다), 새롭게 동양인 가족이 한 명 늘면서 작은 갈등을 겪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융에게 잘 해 주려고 애쓴다. 특히 융의 누나인 코랄리가 그렇다. 융은 어려서 코랄리에게 연심을 품기도 한다. 결국 같은 입양아 출신과 결혼하기는 하지만.
그림을 그리기 좋아하는 '융'은, 만화를 그리고 싶어했다. 그래서 만화가가 되고 싶어한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역시 벨기에로 입양된 '킴'이 그를 한국인 가족에게 소개시켜 준다. '프랑스어를 하지 못하는' 한국인 가정의 남자는, 융의 그림을 보고 "조국인 한국을 잊지 않고 있었구나"라고 말하고, 현재의 '융'은 거기에 동의하는 듯한 나레이션을 남긴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그 당시의 '융'이 조국을 잊지 않고 있었을지 의문스럽다. 그의 어머니를 생각했다는 마음은 잘 알겠지만, 그게 곧바로 '한국'에 연결된다는 것이 어딘가 꺼림칙했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자신의 출신을 알고 있으면, 거기에 대해 계속 생각할 수밖에 없는게 '이방인'의 운명이니까. 하지만 나는 '융'의 어떻게 할 수 없는 외모를 제외하고, 그에게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읽어낼 수 없었다. 버스를 타고 '조국'인 한국의 모습을, 유리창을 통해 조금은 슬프다는 듯이 바라보는 그는, 완벽한 벨기에인이자 '이방인'이었다.
정체성은 그리 쉽게 구성되지 않는다. 자신의 출신이 어떤 특정한 국가라고 해서, 그가 평생 그러한 '국가'라는 정체성을 의식하면서 살기는 매우 어렵다. 특히 '외국'에 나가 살 경우 더욱 그렇다. 영화는 융의 시선을 계속 따라간다. "한국계 입양아들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고통스러워했고, 때로는 죽음을 택하기도 했다"고 담담하게 말하는 그는, 한 인간의 '출신'이 그를 얼마나 제약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가족의 사랑만으로 '차별'을 해소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영화의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마음에 들지 않았다기보다, 명백하게 앞서 말한 '타자를 다루는 형식'의 '한계'를 절감했다. 이렇게 되면 말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나는 한국계 벨기에인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가족이 있었고, 그들 덕에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어머니 사랑해요." 정도밖에 없다. 왜 그렇게 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극장을 나오면서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이 영화는 지난 해 문화청 미디어예술제 애니메이션 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마인드 게임>, <시간을 달리는 소녀>, <천년여우>의 수상으로 유명한 이 예술제는, 작품의 '상업성'보다는 '예술성'에 중점을 맞추고 보다 '예술적인' 작품을 높게 평가해 왔다. 나는 예술제의 '권위'를 신용하고 있었고,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피부색: 꿀>을 보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피부색: 꿀>이 위에 거론된 작품에 견줄 만한 '예술성'을 지니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일단 '잘 모르겠다'고 해 두자.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나는 시뮬레이션해 보았다. "제1세계 동양인"의 시선으로 이 영화를 본다고 하면, 과연 어떤 감상이 나올까. 흥미롭지만, "제3세계 동양인"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불쾌한 결과가 나왔다. 나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수입되어 소비된 영화에 대해,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또한 유감스럽게 생각한 것은, 하필이면 문화청 미디어예술제에서 <피부색: 꿀>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 하지만 이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면서 받아들이는 수밖에.
한 사람의 '삶'을, 몇 마디 말로 재단하고 매도할 수는 없을 테다. 적어도 '인간'에게는 그러한 권리가 없다. 오로지 자신만이, 끝에 가서야 자신의 '삶'에 대해 몇 마디 보탤 수 있을 터. <피부색: 꿀>은 좋은 작품이지만,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돌아보면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융'은 나중에 가서 자신이 '썩은 사과'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지만, 아쉽게도 그의 삶을 평가한 권위자들은, 충분히 '썩은 사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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