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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마 히로키 그리고 윤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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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마 히로키 그리고 윤리

barde 2013. 5. 14. 06:18





이번에 트위터에서 아즈마 히로키의 발언에 관련해서 큰 논란이 있었다. 평소에 이쪽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사소한 논란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사람들의 ‘아즈마 히로키’라는 문제적인 인물에 대한 인식이 아예 바뀌었기 때문에, 큰 논란으로 받아들여진다. 문제의 시작은 “위안부는 필요했다”는 현 오사카시장 하시모토 토오루의 발언을 아즈마가 옹호하면서였다. 아즈마는 성을 사고 파는 것, 즉 매춘은 인류사회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하다고 말하면서, 위안부 역시도 그런 관점의 연장으로 볼 수 있지 않느냐는 식으로 트윗을 했다. 거기에 한국 네티즌들이 불이 붙어 아즈마를 십자포화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나는 사태를 관망하면서, 과연 아즈마 히로키라는 문제적인 인물 한 명을 겨냥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소되는 것인지, 의문이 느껴지면서도 이후에 사태가 진행되어 가는 과정을 보면서 뒷맛이 씁쓸했다. 아즈마의 교모한 발언을, 아즈마 한 사람의 ‘이상odd’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것일까?


위안부에 대한 그의 발언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윤리의 문제다. 한 트위터리안은 이를 간결하게 표현했다. “동물화된 아즈마씨에겐 윤리의 자리가 없구나.” 실제로 아즈마의 길고도 긴 트윗—혹은 짧은 의견과 긴 변명—에서, 아즈마가 ‘윤리’를 의식하고 있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즈마는 주로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인간은 원래 그래왔다”는 식으로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시키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종군위안부는 명백한 “전쟁범죄”고, 따라서 위와 같은 발언은 심지어 일본 내에서도 숱한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일본은 전쟁에 대한 책임을 지고(비록 그것이 외양에 지나지 않았을지라도), 전범재판을 통해 반성의 기미를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본에 강력한 제한을 건 것이 바로 헌법 제9조, 이른바 “평화헌법”이다. 평화헌법은 비록 기입된 것이긴 하지만, 헌법의 힘을 빌려 전후 60년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일본에 마지막 보루, 이른바 ‘초자아’ 역할을 했다. 하지만 작년 겨울 아베 신조가 정권을 다시 잡으면서, 헌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이 점차 수면 위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실로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전에는, 차마 헌법을 개정하자는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왜냐면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모를지라도, 일본은 전쟁의 책임이 있고 그에 대한 ‘낙인’으로 평화헌법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겐 낙인이 될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에겐 저지선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헌법의 중요성은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헌법은 국가의 근본을 이루는 ‘법 위의 법’, 즉 국가라는 거대한 집단에 대한 초자아이기 때문이다. 전쟁이라는 반복강박, 트라우마는 계속해서 일본 사회에 증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에 기입된 초자아가 트라우마를 견딜 수 있는 것으로 만들고 또 ‘충동’을 억제해 주기 때문에, 일본 사회는 급격한 경제성장 속에서도 독재나 파시즘의 길로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다시 아즈마 히로키의 발언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쉽게 아즈마를 비판하거나 비난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근본적인 ‘문제’가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트윗이 타임라인에서 흘러간 이후에도 계속 같은 자리에 남는다. 왜냐면 아즈마의 ‘발언’은 그 자신의 독특한 사상이 아니고 여러 사람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거기에 동조하는 사람이 있고 또 현재 일본에 우려스런 움직임이 불거진 상황에서, 앞으로 동조할 사람이 더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윤리는 ‘아즈마의 윤리’에서 ‘일본 사회의 윤리’로 확장된다. 현재 일본 사회의 윤리가 위기상황에 있다, 문제의식은 여기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탈근대(post-modernism)가 개인의 의지를 집단의 의지로 환원시키며—이는 정확히 <일반의지 2.0>에서 아즈마의 문제의식이었다—’진짜 문제’를 흐려놓을수록, 문제를 ‘문제’라고 인식하는 사람들은 그에 맞서 윤리를 말해야만 한다. 그것도 아즈마 ‘개인’의 윤리가 아니라, 일본 사회, 나아가서 아직까지 파시즘의 망령을 버리지 못하는 모든 ‘사회’의 윤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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