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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preintes du beau rêve

태양과 불능 본문

etc.

태양과 불능

barde 2013. 5. 20. 20:47

서두는 가볍게 시작하기로 마음먹었으므로, 게임을 하기 위해 오락실에 갔다는 것으로 운을 뗀다. 오락실이라고 해도 지금의 30대가 생각하는 오락실과는 아주 많이 다르다. 100원에 게임 한 판을 즐길 수 있는 작고 허름한, 담배연기 떠돌고 주인 할머니는 감은 눈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런 오락실을 상상했다면, 당장 접어주기를 바란다. 허나 나의 목적은 이미 커 버린 어른들의 환상을 깨 부수는 것이 아니므로, 바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겠다.


내가 오락실에 간 이유는 아까 말했듯 게임을 즐기기 위해서다. 여기에 다른 이유는 없다. 나는 종종 ‘아마’라는 부사를 사용하지만, 내가 오락실에 갔다는 ‘사태’를 묘사하기 위해서는 ‘아마’라는 부사는 낄 자리가 없다. 왜냐면 너무나 명백하고, 너무나 단호한 발걸음이었기 때문이다. 오락실에 당도한 나는 우선 천 원 지폐를 동전 두 개로 교환한 뒤, 게임 한 판을 하고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무언가’가 엇갈리기 시작했다. 나의 감정은 초지일관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눈치채고 말았다. 상황은 진실로 이상하게 돌아갔다. 나는 앞의 두 명을 보내고 다시 10분 가량을 기다려야 했다.


좋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안 된다. 오락실에서 15분 기다리는 것쯤이야,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뭣하면 기다란 스마트폰을 손에 넣고 굴리면서 눈을 집중하면 되니까. 하지만 기다림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더 큰 문제가 나에게 닥치고 있었다. 그 상황을 설명하자면... 나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옆에선 여성 두 명과 남성 한 명이 수군대고 있었다. 그들은 같이 오락실에 온 듯했다. 그리고 그들 역시 내 앞에서 차례를 기다렸다.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이것’이.


뭣이 문제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글쎄, 하지만 나는 그 당시 나의 ‘느낌’을 제대로 전달할 수가 없다. 양해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어차피 개인적인 글이란 소수에게나 이해받는 거니까. 돌아가서, 나는 오락실 안을 서성대며 기다린 끝에 게임을 할 수 있었다. 좋다, 이제 마음 놓고-불과 10분 가량이지만-게임에 빠져들 수 있다. 나를 방해하는 다른 어떤 것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동전을 집어넣었다.


자, 이제 문제는 점차 실체를 띠고 내게 다가왔다. 나는 게임을 시작했다. 이 게임은 동전을 하나 넣으면 세 판을 즐길 수 있게 되어 있다. 그 중 첫번째 판에서, 나는 처음으로 하는 곡을 골랐고, 이상하게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느끼며 좋지 않은 스코어를 받았다. 뭔가 이상했다. 이상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을, 그런 이상함이. 그 상황에서 이유를 찾는 행위는 불가능했다. 나는 다음 판을 준비해야 했다. 다행히도 두 번째는 성공적으로 플레이할 수 있었다.


세 번째도 나쁘지 않았다. 모든 플레이가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두 번은 나쁘지 않은 성과를 보였으니 분명히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전혀 만족하지 못했다. 지갑 안에는 2012년 동전이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바로 1년 전에 찍혀 나온 새것같은 동전이었다. 나는 지금 전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 문제를 피하기 위해 의식 아래에서 머리를 쓰고 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내 옆에는 남성의 플레이를 지켜보고 있는 여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오락실에서 나를 해꼬지한 어떤 사람도 없었다. 심지어 평소엔 잘 보이지 않는 직원은 안녕히 가라는 인사까지 했다. 모든 게 평소대로 돌아갔어야 했다. 아니, 평소보다 더 낫게.


자, 이제 나는 오락실 밖으로 나왔다. 하늘은 요즈음 날씨답지 않게 흐렸고, 날은 살짝 추웠다. 긴팔에 가디건을 하나 입으면 딱 맞을 날씨였다. 그래서, 대체 뭐가 문제지? 아니, 애초에 ‘문제’랄 것이 있긴 한가? 흐리고 탁한 거리를 걸으며, 나는 내가 원래 있어야 할 장소에 있지 않다는, 이를테면 원래대로라면 지금 태평양 한가운데 작은 섬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어야 하는데, 춥고 흐린 거리를 걷고 있다는 등의 생각을 했다. 내가 나의 ‘불능’을 느낀 순간, 오락실에 실체하던 ‘나’로부터 나가 분리되어, 실체는 육으로만 남고 의식이 공중을 떠 돌게 되었기 때문에, ‘이곳’이 어색하게 느껴진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추리는 ‘장소’를 환기했다. 하지만 ‘장소’만이 유일한 소득이었다. ‘장소’가 문제였다, 내가 단호한 발걸음으로 임했던 바로 그 ‘장소’가.


한번 다시 고찰해 보자. 문제는 해결되었을까? 50% 정도는 의문이 해소된 것처럼 보인다. 나머지 50%는 나의 ‘불능’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감히 글로는 말할 수 없다. 글은 무능하다. 세상은 ‘힘에의 의지’로 움직인다. 펜이 칼을 이긴다는 말은 관념으로 현실을 넘어서려는 우스운 도약에 불과하다. 오직 ‘미’라는 관념만이 인간이 사라진 뒤에도 영원히 남는다. ‘미’의 장소에 어떤 고귀한 말이 와도 좋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문인들은 펜을 들었다. 그러나 ‘힘에의 의지’를 방기하고 성공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정신병자였던 니체만이 그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선에도 강하고 악에도 강한 것이 가장 강력한 힘이다.” 힘이 맹목에 빠지면 절멸하는 폭력이 된다. 그래서 힘은 오직 홀로 소유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지금 누가 ‘힘’을 가지고 있는가?


힘은 장소 그 자체다. 힘은 이곳에도 있고 저곳에도 있다. 힘이란 사방에 존재하기에 ‘힘’이다. 사방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힘이 아니다. 힘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방에서 나를 옥죄는 보이지 않는 힘, 거기서 나는 불능을 발견한다. 불능인 나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하고 굳게 다문 입으로 춥고 쓸쓸한 거리를 걸어갈 수밖에 없다. 그래, 나는 불능이지. 오늘은 장소를 잘못 골랐던 거야. 하필이면 ‘그들’과 만났을 게 뭐람. 이제 의식으로 떠도는 ‘나’는 퇴장할 시간이다. 힘은 영원히 사방에 존재하며 자신의 ‘불가지력’을 증명할 것이다. 거기에 언제까지고, 똑같은 방식으로, 체험으로 나는 당할 수밖에 없다. 정오에, 태양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 떠오른다. 적어도 ‘나’라는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은, 나는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떠오르는 태양빛을 맞고 설 수밖에 없으며, 밝음 아래 나의 그림자는 가장 어두워진다. 그 어두움 자체가 바로 ‘불능’이다.


인간이 고독에 빠지면 절망을 경험한다고 한다. 그러나 절망이란, ‘불능’에 비하면 아주 단순한 고통이 아닐까? 인간은 절망에 빠졌다가도 언제고 다시 희망을 맛볼 수 있다. 절망이란 일시적인 드리움이기 때문에, 구름이 걷히면 해가 내리쬐듯 절망은 사라지고 빈 자리에 희망이 자리잡는다. 그러나 불능은, 어둡고 얼어붙는 듯 춥고 쓸쓸한 불능은, 인간이 육체를 가지고 있는 동안 결코 사라지지 않고 바로 곁에 머문다. 다시 정오에 태양은 같은 자리에 돌아오고, 인간은 그 아래 자신의 가장 어두운, 심연에 가까운 그림자를 바라보며 자신에게 묻는다. “나를 괴롭히는 ‘너’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림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의 불능을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음을, 쓰디쓴 입맛으로 되새긴다. 불능이여, 영원히 저주받을 ‘육체의’ 이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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