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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preintes du beau rêve

에사드로 가는 길 본문

novel

에사드로 가는 길

barde 2014. 12. 24. 22:45



소행성 B3. 자리를 잃어버린 목소리와 기억들이 모이는 곳. 어쩌면 그것들의 유일한 안식처라고도 할 수 있는 곳. 나는 지금 소행성에 발을 딛고 서 있다. 기억을 발굴해 내기 위해, 그리고 목소리를 찾아 돌아가기 위해.


*


은하인의 대부분은 신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당신이 뭔가 눈치채는 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들이 우주를 강하게 의식하고, 우주 ‘아래서’ 살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물론 신을 믿는 행성도 많이 있지만, 그러나 연방과 접촉하고 있는 모든 행성 가운데서는 비교적 적은 편이다. 말 그대로 은하인들은 우주와 함께 태어나 우주와 함께 사라지는데, 그러한 감각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은 바로 우주선 안이다. 우주선 안에서 칠흑같은 암흑을 바라보고 있으면…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우주선에 한가롭게 창문이나 낼 정도로 여유로운 세계가 아니다, 이 우주라는 곳은. (뭐, 여객선 같은 셔틀이라면 창문을 내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긴 여행으로 지루한 승객들에게 어떠한 즐거움이라도 제공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렇다면 은하인은 우주선 안에서 어떻게 우주를 ‘체험하는’ 것일까. 우주선을 타 본 경험이 한 번이라도 있다면 잘 알겠지만, 무중력이라는 것은 꽤나 기묘하다. 쉽게 말하면 자신이 발이 닿지 않는 직경 2m 정도 되는 공간에 떠 있다는 말인데, 이렇게 되면 밥이라도 먹기 위해서는 자신을 아주 강력한, 급정지라도 한다면 지옥을 경험하는 벨트가 달린 의자에 묶고, 준비된 팩을 꺼내서 고체로 된 음식을 허겁지겁 삼키거나, 아니면 빨대를 이용해 액체를 빨아들여야 한다. 당연히 여기에 점심시간의 즐거움 따위는 기대할 수 없다. 그래도 식사 정도는 우주선 안의 생활에서 그나마 나은 편이다. 소행성에 부딪칠 확률이 십억 분의 일 정도 되는 진공을 한가로이 달리고 있다가 연료가 떨어졌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면, 우주란 결코 자비로운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된다. 바로 내가 그랬다.


시간을 잠시 뒤로 돌려 보면, 내가 탑승하고 있던 유인 우주선은 소행성으로부터 5만 마일 떨어진 곳을 날고 있었고, 그 시점에서 나는 우주선의 연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발견했다. 이대로 가다간 목적지까지 가지도 못하고 우주 미아 신세가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대단히 곤란했다. 일단 멈춘 우주선을 우주에 버려진 폐선으로 인식하지 않도록 비상등을 켜야 했고, 번쩍번쩍 빛을 내고 나면 최대한 가까운 지적 생명체가 있는 행성에 구조신호를 보내야 한다. 그리고 나면 꼼짝 않고 앉아서 지원이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다행히도 개인 우주선이 쓰는 전파는 대부분의 행성에 잡음으로 인식되지 않고 제대로 수신이 되지만, 가끔 다른 신호에 섞여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연방에서는 일정 수준 이상을 갖춘 행성에 전파를 수신하고 골라내는 법을 무료로 가르쳐 주고 있지만, 구석구석까지 헤집고 다닐 수는 없는 사정이라 아직도 어설프게 전파를 수신하고 송신하는 행성도 적지 않다. 해서 내가 진지하게 구조 요청을 보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레이더에 작은 행성 하나가 잡혔다. 그 순간 나의 두뇌는 다른 어떤 때보다도 빠르게 돌아갔다. ‘혹시 저 곳에서 연료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그래도 우주 유목민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서 잘만 하면 연료를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생각을 가지고 나는 남은 연료를 태워 방향을 약간 수정해 정체를 알 수 없는 소행성으로 향했다.


소행성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폐허였다. 그랬다. 폐허 그 자체, 누구도 살지 않는 옛 도시의 모습이 나의 눈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 가졌던 희망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리고 희망이 바닥난 나의 마음에, 이제 어찌 돼도 좋다는 마음가짐이라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한 가지 호기심이 일었다. ‘이왕 온 김에, 한번 둘러보면 어떨까? 어차피 행성도 작으니까 로버를 타고 반나절이면 전부 둘러볼 수 있을 테지.’ 생각을 마친 나는 옷을 우주복으로 갈아입고 로버에 탑승한 뒤에 버튼을 눌러 우주선으로부터 로버를 분리했다. 분리 작업은 로버의 목적을 생각해 볼 때 그다지 자주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할 때마다 독특한 느낌을 받았다. 비유가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우주선에서 내가 태어나는 기분이랄까? 뿅 하고 분리되는 모습이 그런 상상을 불러 일으켰는지도 모르겠다. 여하간 나는 로버를 조종해 원근감이 잘 잡히지 않는, 저 앞에 남겨져 있는 폐허로 빠르게 다가갔다.


*


한번 주위를 가볍게 훑어봤을 때는 그다지 눈에 띄는 점이 없었다. 추측해 보건대 몇 백 년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가 이 소행성에 살았고, 그리고 모종의 이유로 살던 도시를 버리고 갑작스럽게 이주한 것 같았다. 처음 생각한 것처럼 우주 유목민일 수도 있었고, 아니면 특수한 목적으로 건설된 계획도시일 수도 있었다. 연방에선 공식적으로 행성의 무단 점유를 금지하긴 하지만, 그래도 적당히 눈에 띄지 않는 작은 행성에 도시를 세우는 일도 왕왕 있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 이상한 점은 도시에는 오직 큰 건물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살았던 도시라면 집도 있고 가게도 있고 기타 잡다한 공간이 있는 법인데, 이 도시는 주위를 몇 개의 큰 건물이 에워싼 형태였다. 비록 몇몇 건물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있어 속이 보이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안을 볼 수 없는 구조였다. 마치 뭔가를 지키기 위해 세워진 도시 같았다. 무엇을 지키기 위해서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런 인상이 강하게 남았다. 나는 넓게 열린 입구로 로버를 몰았다.


아마도 최소 오백 년 동안은 자동차나 기타 운송수단이 달리지 않았을 매끄러운 길을 로버는 아무 방해 없이 달리고 있었다. 입구로 들어서자, 예상대로 겉을 둘러싼 건물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큰 건물이 가운데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리고 각 입구마다 도로라기보다는 포장된 길이 깔려 있었다. 단순히 바닥을 보강 처리한 것으로, 사람이 걷기에는 부적절한 길. 하지만 평범한 로버가 달리기에는 적당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여유롭게 로버를 몰며 과연 끝—그러니까 가운데—에는 뭐가 있을지 궁금해했다. 폐허라면 가운데 덩그러니 남겨진 탑이 적절하겠지. 그리고 나는 승강기도 없는 그 탑의 꼭대기로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간다… 생각만으로도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주위를 훑어봤을 때 탑의 꼭대기는 보이지 않았다. 높은 탑이라면 건물 외벽을 뚫고 내 눈에 보여야 정상인데, 그렇지 않다는 것은 탑은 작거나 아예 없다는 것이 된다. 힘들게 걸어 올라가야 하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됨에 감사하며, 나는 또 하나의 입구를 지나 한층 도시의 중심에 가까워졌다.


이제 내가 지나쳐야 할 입구는 두 개밖에 남지 않은 듯했다. 로버 안에서 입구 쪽을 바라보면 그 뒤로 입구 하나가 더 있고, 그리고 그 안으로 물결치는 무늬가 보였다. 저건 뭘까? 단순히 생각해 보면 역동적으로 물결치는 선과 면은 건물의 외벽이었다. 쿠크다스에 그려져 있는 얇은 물결무늬처럼, 벽을 감싸고 도는 세 줄의 선은 면과의 대조가 두드러져 단단하면서도 외벽에 어떤 역동감을 부여하고 있었다. 일단 여기까지 온 이상,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몸이 살짝 긴장하는 것을 느끼며, 속도를 약간 낮추고 입구 쪽으로 로버를 몰았다. 입구를 지나며 나는 문득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입구는 겉에서 속으로 들어갈수록 조금씩 작아지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내가 들어와 있는 도시 전체는 겉은 높고 속은 낮은, 일종의 오목한 커브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그 가운데,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건물이 있는 거겠지. 앞에 보이는 입구까지는 약 반 마일 정도 남아 있었다.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건물이 과연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하며, 나는 전방에 시선을 집중했다.


“드디어 도착인가.”

후, 하고 한숨을 내쉬며, 로버에서 내린 다음 천장이 둥근 건물을 올려다보며 나는 척박한 땅에 이런 말끔한 건물을 지은 어떤 지성체의 기술력에 감탄했다. 적어도 한두 달 가지고는 이런 건물을 지을 순 없다. 몇 명의 설계사와,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의 건설로봇 그리고 그들 모두를 진두지휘하는 건축가. 나의 눈 앞에 건물을 밑에서부터 한 층 한 층 올리는 모습이 선하게 그려지는 듯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전부 수명을 다했겠지, 건설로봇마저도. 이제는 유적이 되어버린 모더니즘의 한 경향을 보여주는 건물을 빙 돌아서, 나는 입구를 찾기 위해 주변을 세심히 살펴보았다. 설마 입구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닐테고, 아니면 저 위로 우주선이 들어오는 식인가? 이런저런 상상을 해 보았으나, 반 바퀴 정도 돌았을 때 나는 입구를 발견해 냈다. 우주복을 입은 인간 두 명이 들어갈 정도의 넓이에 외벽과 마찬가지로 매끄러운 입구. 멀리서 보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입구 앞에 서서 나는 문을 열 버튼이라든지 스위치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문에 손을 댔을 때, 자동문이 열리는 것처럼 문이 열렸다. 문이 스르륵 열리고, 그 안에서 나오는 것은 다름아닌 로봇이었다. 로봇?


*


“안녕하십니까. 기억의 도서관에 오신 목적을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잠시 로봇 앞에 서서 “이런, 젠장할!” 이라고 말할 뻔할 걸 가까스로 억누른 채, 이게 대체 뭔 상황인가 궁리해 보았다. 문에 손을 대자 로봇이 나온다. 그리고 로봇은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내게 목적을 묻는다. 로봇이 쓰는 언어가 은하공용어였기에 망정이지, 특정한 방언—무슨 방언인지는 묻지 말라. 필경, 듣는 사람을 화나게 만들 것이다—이었다면 로봇을 쏠 생각마저 했을 거다. 그런데 로봇이 전투기능을 갖춘 무장형이면 어떡하나. 바로 개죽음 당하는 거다. 그런 생각을 하자 입 안에 씁쓸한 맛이 감돌았다. 그래, 일단 아무 말이나 둘러대 보자.

“아, 그래. 목적, 목적 말이지. 책을 열람하기 위해서다.”

“열람 말씀이십니까? 알겠습니다. 허가증을 보여주십시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허가증을 보여달라니. 그런 걸 내가 가지고 있을 턱이 없지 않은가. 나는 여기에 처음 온 방문자에 불과한데. 내가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로봇은 눈치채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저 로봇은 인공지능 수준이 낮은 건가? 아니면 최소한의 필요한 동작만 입력해 둔 건가. 로봇은 유서 깊은 건물 앞에 서 있는 석고상처럼 가만히 서서 나를 초점 없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이 제발,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말아줘. 이판사판이었다. 아무 말이나 지어낼 필요가 있었다.

“그게 말이지. 깜빡 잊고 허가증을 안 가져왔거든. 꼭 허가증이 있어야 하나?”
“허가증이 없으면 도서관에 출입하실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무엇을 보여준다면 임시 허가증을 발급해 드릴 수 있습니다. 혹시 그런 것을 가지고 계십니까?”

살았다. 그래도 융통성이 있는 로봇이구나. 이건 여담인데, 나는 로봇들을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 절대 내가 연방에서 로봇들—그것도 빌어먹을 정도로 합리적이고, 상사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로봇들—과 함께 일해서 그런 것은 아니고, 단지 내가 로봇들에 대해 별로 좋은 인상을 받은 적이 얼마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내가 외행성으로 파견을 나가면, 내 옆에는 꼭, 할 줄 아는 일이라고는 우주선 청소와 계란 토스트를 만드는 일과 커피—그것도 지독하게 ‘로봇의 입맛’에 맞춘 커피—를 끓이는 것밖에 없는 소위 ‘완성형’ 로봇이 붙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로봇이 두 대나 그 이상이 아니라 한 대만 붙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그와 함께 우주선에 올라 출발이라도 한다면, 보통 이런 경우는 두 번에 한 번 정도 있는데, 왜냐면 ‘파견’이라는 것은 언제나 다른 이름으로 바뀔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로봇은 내 옆에서 얼쩡대며 이렇게 묻는다.

“저기요, 제가 해야 될 일이 뭔지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캡틴, 저는 뭘 해야 하죠.”

“이봐, CR-S03, (로봇은 자기 모델명을 불러주지 않으면 점잖게 화를 내는 족속이다. 대체 왜 그따위로 생겨먹었는지 모르겠다. 아마 로봇을 처음 발명한 사람이 자기 아내가 없으면 아무 것도 못 하는, 그저 납땜질이나 할 줄 아는 머저리였나 보지 뭐.) 자기 일은 자기가 찾아보는 게 어때. 언제까지 내 명령만 기다리고 그렇게 고장난 주크박스처럼 같은 소리만 반복할 셈이야. 이제 그만하라고.”

라고 말하면 로봇은 화를 내는 게 아니라, “그런데 주크박스가 뭐죠?” 하고 얼빠진 듯한 대답이나 하는 것이다. 대체 이게 무슨 멍청한 짓거리란 말인가. “그런데 주크박스가 뭐죠?” 라니, 아무리 세상 물정 모르는 네 살 짜리 애라도 그런 질문은 하지 않는다. 아니, 네 살 짜리 애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기 위해 남들의 도움을 구하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여하간 이 정도면 내가 왜 로봇들을 신뢰하지 못하는지 알 것이다. 정말로, 로봇들이란 구제불능이다. 하지만 내가 이번에 만난 이 로봇은 달랐다. 이 로봇은 무려 내게 “혹시 그런 것을 가지고 계십니까?” 하고 친절하게 묻기까지 했다. 나는 나보다 머리 두 개 정도 작은 로봇을 쓰다듬고 싶은 심정이었다. 가만 보자, 우주복 안에 ID 카드가 있을 텐데… 좋았어. 여기 있군.

“이거면 됐나?”

“카드를 인식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인증 완료. 임시 허가증이 발급되었습니다. 출입을 허용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로봇은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난다. 일단 당면한 문제는 해결된 셈이다. 자, 그럼 안으로 들어가서 뭘 하면 좋을까? 도서관에 우주선을 위한 연료가 있을 리는 없지만, 일단 들어가 보지 않으면 그 무엇도 시작되지 않는다. 나는 ‘기억의 도서관’이라는 이름 하나만을 되새기며, 적절한 긴장과 함께 건물 안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건물은 높이 3층에 가운데가 뻥 뚫린 열린 공간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가운데에 분수 따위가 있는 것은 아니고, 사용자들이 자료를 검색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터페이스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척 보기만 해도 지난 몇 백년 동안 아무도 이용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하긴, 그 누가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이런 작은 행성으로 부러 찾아와 도서관에 들어오겠나. 더구나 이 도서관은 쓸모도 알 수 없었다. 기억의 도서관이라니, 대체 뭘 보관한단 말인가? 기억이라면 뇌를 스캔해서 그 정보를 특정한 저장장치에 저장해 둘 수 있었다. 설마 그런 ‘뇌의 기록’들이 가득 들어차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나는 의구심을 가지고 인터페이스 앞으로 접근했다. 화면을 가볍게 터치하자, 밝은 빛이 들어오더니 경쾌한 여성의 목소리가 나를 맞았다.

“안녕하세요. 기억의 도서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무엇을 검색하시겠습니까?”

“글쎄… 일단 이 도서관이 뭘 보관하고 있는지부터 알려줘.”

“알겠습니다. 네비케력 312년에 완공된 기억의 도서관은 기존의 도서관이 감당하던 자료들이 저장용량을 압도하게 된 것을 계기로, 그 중에서 꼭 필요하지 않은 문서들, 정보들, 기억들을 한데 모아 정리해 두기 위해 건설되었습니다. 여기서 ‘꼭 필요하지 않다는’ 기준이란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됐어. 대충 무엇을 위한 건물인지는 잘 알겠군. 그래서, 왜 이름이 ‘기억의 도서관’이 되었나?”

“이 도서관이 ‘기억의 도서관’이라는 이름을 부여받게 된 것은, 이름을 짓는 과정에서 우연히 ‘기억의 도서관’이라는 이름이 나왔고,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여 ‘기억의 도서관’이라는 이름으로 최종 결정되게 되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기억의 도서관’이 기억만 보관하는 게 아니라는 이유로 반대를 표했지만, 다수결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기억의 도서관’은 그 이름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용도폐기된 자료들에 적당한 이름을 붙일 궁리를 하다가 그런 이름이 나왔다는 거군. 그럼 한 가지 더. 도서관에 언제 사람이 마지막으로 출입했나?”

“기록을 살펴보면 지금으로부터 627년 전에 사서가 퇴직으로 도서관을 떠나고 나서입니다.”

그것 참, 더럽게도 오래 방치된 도서관이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630년 전에, 네비케력을 쓰는 어떤 행성에서는 ‘기억의 도서관’에 예산을 쓰는 것을 아깝게 생각했을 거다. 예산이 부족했다기보다는 더 이상 이런 쓸모를 알기 힘든 곳에 돈을 쓸 필요를 못 느꼈기 때문이겠지. 그런 이유로 몇 년 지나지 않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기억의 도서관’을 홀로 지키고 있던 사서는 떠나버리고 말았고, 쓸데없이 높은 외벽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소행성 B3엔 도서관만이 남아 긴 세월을 견디고 있었다. 그리고 627년이 지난 뒤에, 우주선에 연료가 부족해져서 혹시라도 연료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한 인간이 도서관의 침묵을 깼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자, 세월의 아득함과 남겨진 도서관의 쓸쓸함에 어떤 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원래 가지고 온 목적은 이루지 못할 게 분명했다. 도서관에 연료 따위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좋아. 나는 마음을 정했다. 그리고 인터페이스에게 말했다.


*


나는 곧바로 3층으로 올라갔다. 말이 3층이지, 실은 이 도서관은 엄밀하게 말해 층수 구분이 없었다. 올라갈 때는 엘리베이터처럼 ‘생긴 것’을 이용했는데, 재밌는 게 이 엘리베이터는 당시의 최신 기술—이 도서관이 네비케력으로 약 700년 전에 지어진 건물임을 감안했을 때—로 지어진 모양인지, 자력으로 움직이는 물건이었다. 작동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엘리베이터에 탄 사용자가 버튼을 누른다. (라고 해도 하나밖에 없다.)
  2. 엘리베이터 주위에 강한 전자기장이 걸린다. 여기서 동력을 얻는다.
  3. 약 5초 정도 상승한 뒤, 서서히 감속하며 멈춘다. 탑승자에게 가해지는 충격은 거의 없다.

내가 3층으로 올라온 데서 아마 눈치챘으리라 생각하지만, 3층은 ‘기억의 도서관’의 단 하나밖에 없는 열람실이었다. 지금은 아무도 이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지만, 630년 전만 해도 사서는 저기 보이는 책상에 앉아서 사람들을 기다렸을 것이다. 나는 책상으로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책상에는 이제 아무 것도 없었지만, 터치해서 작동하는 식의 일체형 모니터는 방문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책상에 손을 대자 모니터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켜졌고, 나는 얼떨결에 그만 세 걸음 뒤로 물러났다.

“Operation System. Hello to new wanderer.”

모니터에는 이러한 말이 은하 공용어로 반짝거리며 나타났다. 그리고 아마도 이 도서관을 설립한 행성에서 사용할 법한 언어로 바뀌어 반짝거렸고, 다시 몇 가지 언어를 보여주다—무슨 언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눈에 익은 언어는 없었다—처음의 은하 공용어로 돌아왔다. 나는 모니터를 조작해 안에 기록된 정보를 열람할까 생각해 보았지만, 로그인 화면에서 암호가 걸려 있었기 때문에 쉽게 포기했다. 그리고 모니터가 다시금 긴 잠에 빠지도록 내버려 두고, 로비에서 인터페이스에게 안내받은 대로 중앙에서 세 번째 서가로 향했다. 이곳에는 사서의 개인적인 ‘기록’들이 몇 개 있었는데, 등록번호는 001-G986부터 099-G986까지였다. 그렇지만 99개의 번호 모두에 기록들이 할당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이곳에서 일하며 그렇게 많은 기록을 남길 이유도 없겠지만 말이다. 나는 그곳에 잠들어 있던 몇 개의 기록 중 하나를 골라서, 3층에서 대출처리를 한 뒤에 다시 로비로 내려왔다.


로비로 내려오니 나를 반겨주는 건 로봇이었다. 로봇은 팔을 흔들며 나를 향해 다가왔는데, 마치 집에 선물을 양손에 사 들고 온 삼촌을 반기는 조카 같았다. 비슷하게 나는 한 손에 대출한 ‘기록’을 들고 있었고, 로봇은 처음에 봤을 때와 같은 속도로 내게 다가왔다.

“기억의 도서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혹시 더 필요한 일이 없으신가요?”

“아냐, 이제 됐어. 도서관에서 내가 볼 일은 다 봤으니까. 혹시 퇴관할 때도 ID카드가 필요한가?”

“아닙니다. 도서관을 퇴장할 때는 그냥 나가시면 됩니다. 대출한 자료의 연장은 한 번 가능하며, 그 기간은 자료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대출한 기간의 절반입니다. 또한 자료의 반납은 에사드 성립, 국립 도서관에서도 가능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사서에게 문의하거나, 키오스크에 질문하고 싶은 내용을 물으면 됩니다.”

“그런 건 이제 됐으니까, 너도 여기서 잘 있으라고. 그나저나 도서관은 에너지를 어디서 가져오는 거지? 혹시 알고 있나?”

“내부에 작은 핵융합 발전소가 하나 있습니다. 이곳에서 필요한 양의 에너지를 생산해, 도서관의 에너지 수위가 일정 수준 밑으로 떨어지면 다시 가동을 시작합니다.”

그렇다는 말이지. 700년 전에 에사드라는 곳은 핵융합 기술을 이미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전에 연방과 접촉했다면 있을 법한 일이다. 연방은—비록 무료는 아니지만—행성 발전에 꼭 필요한 과학기술 등을 제공하는 데 적극적이니까. 이것은 연방의 이념과도 이어지는데, 연방의 이념은 “가능한 모든 곳에—가능한 기술과 지식과 자원을” 이다. 즉 연방에서 하는 일은 크게 세 가지(중재자의 역할을 포함한다면 네 가지)다. 하나는 기술 전수, 둘은 지식 공유, 그리고 셋은 자원 개발이다. 이 중 연방이 가장 중시하는 것은 물론 자원 개발이지만, 그렇다고 그게 연방이 하는 일 중에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진 않는다. 실제로 연방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일하고, 또 예산을 많이 가져가는 곳은 바로 중앙청(Central Office)이다. 그리고 그 다음이 바로 기술국(Department of technology)이다. 자원 개발은 연방의 많고 많은 부 중에서도 중간 정도에 속한다. 하지만 점점 투자가 늘어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아직 연방이 접촉하지 못한, 잠재력을 품고 있는 수많은 항성계가 은하 안이나, 아니면 주변부—즉 나선팔—쪽에 있기 때문이다. 연방 얘기는 이쯤 하기로 하자. 나중에 더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여하간 나는 로봇에게 작별인사를 한 뒤에, 도서관을 나와 로버를 주차해 둔 곳으로 걸어갔다.


*


도서관에서 로버를 타고 바로 우주선으로 돌아온 나는 우선 구조신호를 보냈다. 가까운 곳에 보내는 신호를 받을 만한 행성이 과연 있을지 걱정하며, 나는 내가 도서관에서 가져온 ‘기억’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대출일자: 네비케력 1043년 37주의 제5일. 반납일자: 네비케력 1093년 37주의 제4일.” 다행히도 기억들은 최장 50년까지 대출이 가능했다. 기억들을 대출하고 나서, 나는 당장 기억들을 재생기에 접속해 살펴보지 않았다. 가지고 온 휴대용 재생기에 기억들을 옮겨 담으며, 나는 내가 왜 이런 일들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뚜렷이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기억들을 대출해야 했다. 나밖에 여기에 온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겹치고 겹친 우연으로 ‘기억의 도서관’에 왔기 때문에.


우주선에서 기다리는 한 시간은 지구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보내는 한 시간보다 더 따분하고, 괴롭다. 우주선 안에 있으면, 어쩐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꼭 움직이고 있지 않아도, 시간이 느려지는 느낌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예전에 이런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 우주선에서 구조요청을 보낸지 1년만에 극적으로 발견되어 자신이 사는 곳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은하인. 그의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가 1년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지금도 생생하게 되새길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저 눈을 뜨면 밥을 먹고, 음악을 듣고, 신호를 다시 보내보고… 그리고 수면장치에 들어가 한 일주일 정도 잡니다. 일어나면 다시 앞에서 했던 일들을 반복해요. 식량을 아끼기 위해 음식은 버틸 수 있는 최소한으로 먹으면서, 언젠가는 내가 보낸 신호를 듣고 구하러 와 주겠지 하는. 그 마음만을 계속 품고 버텼어요.” 어쩌면 나도 그와 같은 마음가짐을 가지고 큐브에 갇힌 하루하루를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나는 반드시 ‘그곳’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신호가 잘 보내졌는지 확인한 뒤에, 나는 재생기를 꺼내 저장되어 있는 기억들을 읽어들였다.


*


우주선 안에 갇힌지 두어달 정도 지났을까. 지직거리는 잡음이 조종간에 자리잡은 마이크로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마이크에 귀를 기울였다. 5분 정도 잡음이 계속 들려오다, 잘 분간되지는 않지만 은하 공용어임이 분명한 언어로 메시지를 말하고 있었다.

“일주일 뒤에 구조선을 띄우겠습니다.”

내가 보낸 신호를 그쪽에서는 대체 언제 잡아낸 것일까? 한 달 전? 아니면 그보다 전? 한 달 전이라면 앞으로 일주일만 기다리면 이 지긋지긋한 공간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다. 이제까지 버텨온 시간에 비하면 짧디짧은 시간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일마저도 버겁기 그지없었다. 지금까지 아껴온 식량으로 7일을 버티기에는 충분하다. 아마 계속 깨어 있어도 조금 남을 것이다. 주변 상황을 다시금 점검한 뒤에 나는 구조선을 기다리는 일주일 동안 뭘 할지 생각해 보았다. 기억들은 두 번이나 돌려 보았다. 더 이상 신호를 보낼 필요도 없었다. 나는 큐브 한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우주대백과사전>을 읽기로 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빠르게 흘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주대백과사전>이 재밌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별로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두 달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수월하게, 일주일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우주대백과사전>만 읽었던 것은 아니었다. 중간에, 주로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나는 샐린저의 <나인 스토리즈>—페이퍼백이 아니었던 건 유감이었지만, 이제 고집해서 페이퍼백을 읽는 사람은 적어도 연방 안에는 없다—를 읽었고,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을 읽을 때는 내가 마치 그러한 날을 보내고 있는 것만 같은—아니,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말하자면—그런 기분이었다. 알다시피 이 이야기에는 시모어 글래스—글래스 가의 맏이로, 8개국어를 할 줄 아는 엄청난 천재다—가 나온다. 시모어 글래스는 ‘바나나피시’란 물고기가 있다고 시빌이라는 여자아이에게 거짓말을 하는데, 이 애는 재밌게도 바나나피시를 본 적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시모어는 그 말을 듣고 ‘설마!’ 라고 외친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읽고, 내가 시모어와 같은 꼴이 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레비아탄에 도착해서도 ‘기억의 도서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기로 작정했다. 만약 내가 이야기를 꺼낸다면, 사람들은 기억의 도서관을 본 적이 ‘있다’고 답할 테니까.


연료를 싣고 온 우주선과의 접선이 끝나고, 중간에 밀폐된 터널로 연결된 공간에서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과 만난 뒤에 나는 원래 가고자 했던 목적지까지 갈 수 있는 연료를 지급받았다. 보수는 도착이 완료된 뒤에 지불하는 것으로 처리했다. 연방이라면 그 정도는 알아서 처리해 주겠지. 직원은 <우주대백과사전>을 읽느라 약간 피로해진 나에게 이런 말을 던졌다.

“몰골이 초췌하시네요. 하긴, 열 주를 버텼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아뇨.” 라고 대답한 다음 거기에 뭘 덧붙이려고 했지만, 나는 말을 그만두었다. 적게 먹어 얼굴살이 빠진 것은 맞으니까. 그리고 팔다리가 약해진 것도. 두 달 동안 우주선에 박힌 사람이 <우주대백과사전>을 읽는 것도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우주대백과사전>은 이제 아무도 읽지 않는, 교양 있는 은하인의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그야말로 ‘대백과사전’이니까. 직원은 나에게 한 잔의 휴식을 권유했지만, 어떤 차—지구에서 마실 법한 차를 생각하면 곤란하다—가 나올지 알 수 없었으므로 나는 정중히 사양했다. 그 대신 갈 때까지 먹을 식량을 조금 부탁했다. 직원은 특유의 친절한 미소로 “알겠습니다.” 라고 답한 뒤, 건너편으로 빠르게 사라져 갔다. 터널에 혼자 남은 나는 살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뒤로 밀려오는 허탈함을 느꼈다. 내가 이제껏 버틴 이유는 버틸 가치가 있었던 거겠지. 일단 그렇게 믿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벗은 안경을 쥐고 나의 우주선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


재출발과 도착은 순조로웠다. 어떤 방해물도 없었고(앞에서 말했던 빌어먹을 로봇도), 연료가 떨어지는 일도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앞에서 다짐했듯, 도착한 곳에서 단 한 번도 ‘기억의 도서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돌아올 대답을 두려워했는지도 모르겠다. 두려워할 이유 따위는 없었다. 그냥 넘겨버리면 그만일 테니까. 그럼에도 나는 ‘기억의 도서관’에서 겪었던 일들을 비밀로 간직했다. 비밀로 간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일 년 정도 일—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곳에서의 일 년은 지구에서 삼 년하고도 조금 긴 정도이므로, 길다면 긴 시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행성의 감각이란 것은 기묘해서, 이를테면 내가 공전주기가 오 년인 행성에서 살게 된다면, 지구에서 보내는 일 년은 아마 금방 지나가 버릴 것이다. 하지만 나의 소속을 생각해 보았을 때, 내가 다시 지구로 돌아갈 일은 없었다. 지구는 이미 내가 돌아가기에는 너무나 먼 곳이 되어 있었다. 거기에 별 유감은 없지만. 일 년이 지난 뒤에, 드디어 반 년—물론 레비아탄의 시간으로 반 년이다—정도 자유시간을 낼 수 있었다. 나는 에사드로 가는 왕복 티켓 한 장을 끊었다. 행성간 워프를 이용할 수 있는 기간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에사드로 가는 인원은 매우 적었다. 나는 자그마치 한 달을 기다리고서야 에사드로 출발할 수 있었다. 행성간 워프를 이용할 수 있는 최소 인원 열 명을 채우고 나서였다.


*


“여기가 에사드 성립 도서관입니까?”

“네, 맞습니다. 입구는 저쪽입니다.”

겉으로 봐서는 지구의 숲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처럼 보이는 한 우주인이 나에게 길을 알려 주었다. 에사드에는 특이하게도 ‘성립 도서관’이라는, 국립보다 한 차원 위에 있는 도서관이 있는데, 이름만 ‘성립’인 게 아닌 모양이었다. 건물은 겉으로만 보면 돔형 경기장처럼 보였다. 크기도 경기장과 비슷했고, 모양새도 타원형으로 둥그런 게 영락없는 경기장이었다. 하지만 저 거대한 건물은 행성의 모든 자료가 총망라되어 있는 ‘도서관’이라고 한다. 나는 도서관을 향해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저기, 다른 행성에서 온 사람도 출입이 가능합니까?”

“네. 우선 ID 카드를 보여주세요.”

나는 소매에 달린 주머니에서 ID 카드를 꺼냈다. 직원은 ID 카드를 하얗고 네모나게 생긴 넓적한 판으로 갖다대더니, 키보드를 몇 번 두드리고 나서 카드를 다시 돌려주었다.

“되셨습니다. 도서관 이용 종료 시간까지 이용 가능한 임시 열람증이 발급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임시 열람증은 ID 카드에 저장되어 있다. 나는 출입구에 ID 카드를 가져다 댄 뒤, 허가를 알리는 알림을 듣고 나서 도서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우선 목표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사서에게 갈 필요가 있었다. 에사드의 사서는 내 말을 듣고 나서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는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며, 에사드에 자리잡은 거대한 도서관과 작은 행성에 버려진 ‘기억의 도서관’을 생각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은하 공용어로,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 보이는 사서가 점잖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나는 메모해 둔 종이를 꺼낸 뒤에, 사서에게 종이를 보여주며 물었다.

“혹시 S. L. 이라는 사서를 찾아볼 수 있을까요?”

내 물음에 사서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는다. 아마도 이런 요청은 사서가 이 도서관에 부임한 이래로 처음이겠지. 수천만 가지에 이르는 자료는 한번에 검색해 낼 수 있지만, 600여 년 전에 죽어버린 사서는 과연 기록이 남았을지도 의문이다. 사서는 나뭇가지와도 같은 팔을 모니터로 뻗는다.

“S. L. 이라. 직원 명부에서 한번 검색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라…”

“그렇지요. 600년 전에 죽은 사람이니까요.”

그는 모니터에서 눈을 돌려 나를 쳐다본다. 작은 안경 뒤에 감추어져 있는 눈빛이 묘하다. 추측해 보면 ‘이 사람, 대체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겠지. 그러나 600년 전에 죽은 사람의 이름을 굳이 불러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성립 도서관의 사서는 전문가답게 바로 답을 도출해 낸다.

“아, 여기 있네요. S. L. 670년 전 ‘기억의 도서관’ 부임. 640년 전 정년퇴직으로 ‘기억의 도서관’의 사서 자리에서 물러남. 찾으시는 분이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손수 검색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그러면서 그는 웃음을 지어 보인다. 내가 우주선에서 터널로 나왔을 때, 직원이 보여준 웃음과 비슷한 웃음이다. 하지만 그때만큼 차갑지는 않다. 아무래도 이곳의 사서는 고객들을 위한 웃음을 기본으로 탑재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나는 휴대용 재생기를 꺼낸 뒤에, 사서에게 그것을 넘겨주며 한 마디 덧붙인다.

“이걸 가지고 계셨다가 성립 도서관의 도서관장님에게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무리라면 꼭 보여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여기엔 640년 전에 남긴 중요한 ‘목소리’가 담겨 있습니다. 저는 ‘기억의 도서관’에서 기억을 대출해 왔습니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사서는 더욱 당황한 눈빛으로 나와 재생기를 번갈아 바라본다. 마치 나무가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만 같다. 그래, 이상한 부탁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리 어려운 부탁은 아니잖아? 나는 살짝 웃음을 지으며 간절하게 눈빛을 보낸다. 사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재생기를 받아들더니 나의 부탁에 간결하게 대답한다.

“알겠습니다. 제 손이 닿는 데까지 노력해 보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재생기는 돌려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쩌다 기억의 도서관을 방문하게 되었습니까? 그 곳은 에사드에서도 몇십 광년이나 떨어진, 아주 먼 곳일 텐데요.”

“도서관이 있는 행성 주변을 지나다가 마침 연료가 떨어져서요. 혹시 연료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도서관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황량하기 그지없더군요.”

“저도 기억의 도서관은 그 이름만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시군요. 저는 처음에 당신의 부탁을 들었을 때 부탁보다도 기억의 도서관이란 말에서 놀라움을 느꼈습니다. 이제 그곳은 아무도 찾지 않는, 버려진 곳이거든요. 예산도 이미 오래 전에 끊겨서 로봇 하나가 거기를 지키고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신기합니다. 기억의 도서관을 방문해서 기억을 대출해 온 사람을 만날 줄이야.”

“저도 우연만 아니었다면 기억의 도서관에 들를 일도 없었을 겁니다. 세상 일은 알 수 없는 법이죠.”

나는 그런 식으로 사서와 10분 정도 대화를 나눴다. 사서는 친절하게도, 자신이 에사드 성립 도서관이 자리잡은 나라의 국립 도서관에서 일하다 3년 전에 성립 도서관의 사서로 부임하게 됐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지구보다 약간 작은 행성 에사드는 성향으로 따지자면 학문의 행성이라고 했다. 에사드에는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를 포함하여 총 네 개의 거대한 나라가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크고 융성한 나라는 에사드가 속한 연방 중에서도 손에 꼽는 학문의 성지라고 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에사드 성립 도서관’이 있다고, 사서는 자못 자랑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자신이 맡고 있는 도서관이 연방에서 제일가는 도서관이라는 자부심. 그것이 에사드를 학문의 행성으로 불리게 하는 원동력일 테다. 나는 설명을 다 듣고 나서 솔직하게 감탄을 표현했다. 감탄에 기뻐했는지 사서는 추가로 한 가지 사실을 알려주었는데, 에사드 성립 도서관의 자료들은 협약에만 가입되어 있으면 다른 행성에서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연방 내에서 자료가 부족한 행성들은 에사드의 풍부하다못해 흘러넘치는 자료를 이용한다고도 덧붙였다. 그래서 ‘성립 도서관’은 단지 자국의 학문 발전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 연방 전체, 아니 은하 전체의 학문 발전에 도움을 주는 곳이라는 말로 설명을 끝마쳤다. 사서의 말이 과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미리 알아본 바로는 에사드 성립 도서관은 행성이 속한 연방에서는 유명했으니까. 만약 내가 학문을 잘 알았다면 더 반짝이는, 경외에 찬 눈빛으로 이 넓디넓은 도서관을 바라볼 수 있었겠지. 하지만 이 정도로 만족하는 게 평범한 은하인의 지위에 있어서는 걸맞다. 사서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한 뒤에, 나는 도서관 밖으로 걸어나와 이산화탄소 때문에 약간 뿌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러니 책 읽는 거 말고는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냐고.”

말을 마치고 바로 헛웃음을 흘렸다. 이것도 하나의 아이러니일까. 날이 좋지 않으면 도서관이나 방 안에 틀어박혀 학문에 매진한다. 난롯가에 모여 앉아 학구적인 주제를 가지고 밤이 새도록 열띤 대화를 나눈다. 상상해 보면 나쁘지 않은 풍경이었다. 에사드, 학문의 행성. 누가 처음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잘 붙였다. 그러면 내가 태어난 고향인 지구는 어떤 이름이 어울릴까? 가속화된 온난화로 결국 물에 잠겨버리고 말았으니까, ‘바다의 행성’이 적절할까?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다시 지구로 돌아갈 일은 없을 거다. 도서관을 뒤에 남겨두고, 나는 시 외곽을 도는 트램을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천천히 걸었다.


*


“레비아탄으로 가는 워프에 탑승하시는 승객분들께서는 10번 플랫폼으로 오셔서 탑승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레비아탄으로 가는…”

이런, 서둘러야겠다. 에사드에 있으면서 긴장감이 쭉 빠져버린 탓인지, 나는 바다에서 헤엄치는 돌고래처럼 한껏 여유를 부렸다. 하지만 이산화탄소 가득한 공기 아래, 산소나 기타 등등이 공급되는 우주복을 입고 돌아다니느라 쉽게 지쳐버린 것도 사실이었다. 에사드에 살고 있는 나무—미안하지만 나무 이외의 이름을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나는 나무들을 좋아한다—들이 그런 모양으로 진화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지독한 행성의 환경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학문의 행성’ 자체는 그리 나쁜 곳이 아니었고, 도서관 또한 안에서 월드 시리즈라도 한다면 멋질 법한 곳이었지만, 그래도 에사드에서 평생 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어디까지나 연방에 소속된 사람이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있을 곳은 대기가 있고 지면이 단단한, 생명체가 사는 행성이 아니라, 아무 것도 살지 않는 우주 아래다.

에사드에서 원래 있던 거대한 행성으로 돌아오는 워프에 올라타면서, 나는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한 마디 문장을 되새겼다. 문장은 말하는 자의 의지가 본디 그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간결하고 짧았다. 그래서 더욱 울림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우주선과는 다르게 워프에 오르는 느낌은 언제고 익숙해지지 못할 것이 뻔하다. 이상하다. 마치 저 멀리 우주의 끝에라도 가 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다. 좌석에 가만히 앉아서 곧 출발한다는 기장의 안내를 들으며, 나는 내가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들었던 문장을 되새겼다. 그것은 이랬다.

“기억의 도서관으로부터, 경의와 축복과 환영을 담아 방문자에게. 저는 이제 도서관을 떠나지만, 도서관만큼은 계속 이 자리에 남아 당신을 기다릴 것입니다. 지성의 알고 싶다는 의지가 영원히 이어지는 한.”

지성의 알고 싶다는 의지가 영원히 이어지는 한. 나는 그 한 마디만을 되풀이했다.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


“자네, 그거 아나? 지도에서도 안 나오는 소행성에 자리잡은 ‘기억의 도서관’이라는 곳에 다시금 사서가 부임하게 되었다는군. 무려 648년 만이라는데.”

“처음 듣는데. 기억의 도서관? 무슨 도서관 이름이 그 따위인가?”

“왜, 기억의 도서관, 좋은 이름이구만.”

“대체 어디가 좋은 이름인지 모르겠는데. 거기에 대체 뭐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래도 봐, ‘중앙도서관’ 같은 이름보다는 훨씬 낫잖아. 안 그래?”

우주 어딘가에 자리잡은 거대한 뷔페 겸 식당에서 커피를 마시며, 나는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재밌는 일이었다. 미리 뉴스를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기억의 도서관’으로부터 대략 2천 광년 떨어진 곳에서 그 이름을 들을 줄이야.

‘학문의 행성’으로 유명한 행성 에사드의 의회에서 기억의 도서관에 다시 사서를 보내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이제 앞으로 약 50년 동안은 기억의 도서관에 사서가 머물며 호기심에 방문하는 은하인들을 맞을 것이다. 그 이후로도 에사드에서 사서를 파견해 도서관에 남을지 어쩔지는 잘 모르겠지만, ‘기억의 도서관’에 잠들어 있는 기억과 목소리들은 계속 대출되며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그저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했을 뿐이니까.


젠장할, 너무나 맛있는 커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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