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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preintes du beau rêve

겨울에서 봄까지 본문

novel

겨울에서 봄까지

barde 2015. 3. 21. 05:04



라미레지를 받았다. 꿈에서, 아니 바로 어제.


그녀는 프랑스로 유학을 간다고 했다. ENS인가 어딘가, 굉장히 엘리트가 되고 싶은, 아니면 이미 엘리트인 애들이 가는 곳이라는데, 고등학교 입시 이후부터 계속 서연고… 만 외워온 나는 잘 모르는 대학이다. 엄밀히 따지면 ‘대학’이 아니라고 했나. 국내에선 보통 “고등사범학교”라는 이름으로 통용된다고 하지만, 우선 이 “고등사범학교”라는 이름부터가, 너무 낡았다. 요새는 이런 촌스러운 이름을 쓰지 않고, “교원대학”이라는 세련된 이름을 사용한다. 아니면 “교육대학”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거나. 그래서 이 “고등사범학교”라는 이름은 일본에서 온 것인데… 쉽게 말하면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칠 교원을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대학이다. 대학이 아니라고 앞에서 말했지만, 우선 대학이라고 해 두자. 그런데 프랑스의 경우는 좀 다르다. 나치가 일으킨 전쟁으로 프랑스가 한바탕 쑥대밭이 되고 나서, 전후 한참 제자리를 찾아가던 때에, 프랑스에 철학 붐이 일었다. 그것도 엘리트들이 모여 있는 “고등사범학교”에서, 『자본』을 읽는 모임이 열리기도 하고, 이런저런 유명한 철학자들이 고등사범학교를 나오면서, 어쩐지 “철학의 중심지”라는 이미지가 생겼다. 그 당시를 살아보지 않아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68혁명’이 일어나기도 했던 60년대 후반에는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사르트르, 알튀세르, 랑시에르, 데리다, 푸코 등등… 한국에서 한때 유명했던 들뢰즈는 고등사범학교를 나오지 않고 소르본을 졸업했다. 그래서 철학적 전통이 좀 다르다, 저기 나열된 사람들과는. 뭐, 그건 데리다도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들뢰즈는 그게 특히 심한 사람이라.


그런데 서론이 너무 길었다. 여하간 고등사범학교는 엘리트가 되기 위해서나, 아니면 이미 엘리트인 사람이 가는 곳이고, 그녀는 그곳에 문학 공부를 하기 위해 갔다. 나는 문학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이것이 나를 ‘교양 없는 사람’으로 보이게 만드는 데 적당한 기여를 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녀는 내 앞에서는 문학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한결 부담 없이 그녀 앞에서 이런저런 흥미와 화제를 꺼낼 수 있었고, 그녀는 내가 토스한 공을 받아치거나, 아니면 그대로 등 뒤로 넘겨버렸다. 솔직히 말하면 그대로 등 뒤로 넘겨버린 때가 많았다. 그래도 나는 굴하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해 나갔고, 보통 그녀가 먼저 지쳐서 남은 커피를 빨대로 쪽 빨아마셔 버리고는 “가자” 하고, 짧게 말하고 일어나는 편이었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이야기다. 꿈에서 나는 라미레지를 받아서 그것을 어항에 넣어두고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지만, 현실의 나는 라미레지를 최대한 오래, 가장 좋다면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키워야 할 의무가 있었고,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그것에 대한 길고 긴 주석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물고기를 키워본 적이 없었다. 아, 젠장. 이렇듯 꿈은 언제나 무책임하다. 직사광선을 피해서 놓은 그늘진 곳에서, 라미레지는 그저 꼬리를 살랑거리며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세계를 살펴볼 뿐이었지만.


우선 한 자 반 정도 되는 어항에 라미레지를 집어넣는 것부터 시작했다. 라미레지를 어항에 집어넣는 일은,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았다. 소일을 평평하게 깐 어항에 받아놓고 하룻밤 재운 수돗물을 조심스레 붓는다. 그리고 유리봉처럼 생긴 히터기와 여과기를 설치하고 수초를 심기만 하면 된다. 그 밖에 자잘하게 필요한 일이 몇 가지 있었지만, 나는 그런 것에는 개의치 않는 타입이었다. 적어도 전공 공부를 위해 사흘 밤낮을 새우는 일보다는, 라미레지를 어항에 집어넣는 일이 훨씬 쉬웠다. 어항에 라미레지를 넣자, 녀석은 꼬리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주위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주위라고 해 봤자 바닥에는 소일에, 하늘(적당히 하늘이라는 이름을 붙였다)에는 수초에, 그리고 저 꼭대기에는 여과기에서 뿜어져 나온 거품이 넘실대고 있다. 약하게 틀어 놓았기 때문에, 거품은 많지 않은 편이었다. 그리고 라미레지는 잠시동안 그렇게 있었다. 나는 라미레지가 새로운 환경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동안, 늦게 점심을 차려 먹었다. 김치볶음밥에 걸쭉하게 끓인 카레우동. 반찬은 단무지밖에 없었다. 밥을 먹다가 어항 쪽을 쳐다보니 라미레지는 내가 바라보는 방향에서 왼쪽을 향해 있었다. 물고기의 눈으로 보면, 바로 내가 보이는 방향이다. 나는 밥을 먹다 말고 일어나서, 어항의 양쪽 유리벽에 손을 대고 라미레지를 위에서 바라보았다. 라미레지는 그저 꼬리를 살랑대었다. 나는 그 여유로움이 참을 수 없었다. 이제 막 하루가 지났을 뿐이었다.


다시 하루가 더 지났을 때는 이미 라미레지가 들어 있는 어항은 내 방의 풍경을 이루는 하나의 오브제로 자리잡고 있었다. 밥은 언제 주면 좋을지 몰라서 그냥 아침에 한번, 저녁에 한번 줬다. 어떤 날에는-주로 늦잠을 자서 지각한 날에는-아침에 밥을 주는 걸 까먹고 저녁에만 줬다. 그럴 때는 조금 더 많이 줬다. 라미레지는 한 마리였지만, 아직 짝이 없어도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여자친구 없이 잘 지내는데, 라미레지라고 잘 지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아니, 내가 지금 ‘잘 지내고’ 있는 건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라미레지는 잘 지내고 있다. 물고기는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인식하고 적응하는 데는 능했지만, 나머지는 전부 관심 밖이었다. 내가 어항 바로 곁을 지나가도 라미레지는 지느러미를 돌리지도 않았다. 오직 밥을 줄 때만, 라미레지는 위로 위로 올라와서 사료를 작은 입으로 먹었다. 그 작은 몸으로 티스푼 하나 정도 되는 사료가 전부 들어갔다. 라미레지 키우는 일도 꽤나 재밌다고 생각했다. 아직 일주일도 안 지났지만. 나는 소위 ‘물고기 오타쿠’인 친구 A에게 라미레지 키우는 일에 대해 물어보았다. 친구는 내가 한 마리만 기르고 있다고 하자 자신의 라미레지를 한 마리 선물해 주겠다며, 이틀 뒤에 보자고 말했다. 나도 마침 그 날에는 일정이 없었기 때문에, 친구의 제안을 승낙했다. 친구는 라미레지와 함께 자신이 안 쓰는 도자기 그릇도 하나 가져온다고 했다. 고맙기 그지없지만, 그런데, 라미레지는 원래 한 쌍으로 기르는 건가?


약속한 날, 친구는 오후를 조금 지나서 내가 사는 방으로 찾아왔다. 점심을 먹고 온다고 말했기 때문에, 나도 친구가 오기 전에 점심을 밖에서 사 먹어 두었다. 친구는 단단한 종이백에 잘 넣은 작은 어항과, 그것보다 더 작은 도자기를 가져왔다. 이제부터 친구 A는 그냥 ‘A’로 부른다. 친구라는 말을 생략해도, 그가 나의 친구임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A는 어항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어쩌다 라미레지를 기르게 된 거야? 원래 너는 책 말고는 관심을 가지고 있는 취미도 없었잖아? 아닌가.”

“맞는 말이야. “어쩌다 보니,” 라고 말하면 정확할까. 여자친구가 내게 “잘 부탁한다”며 맡기고 갔어. 저번에 말한, 지금은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있는 그녀 말이야.”

“아, 그 여자 말이군. 그 여자라면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었지.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프랑스 유학이라니. 어디라고 했더라? 에콜 노르말?”

“에콜 노르말 쉬페리에르. 줄여서 ENS. 한국에서는 ‘고등사범학교’라고도 불러. 실제로 하는 역할은 일반적인 ‘교원대학’과는 약간 다르지만. 그녀는 문학을 공부하러 갔어. 그것도 가장 골치 아픈 불문학을.”

“불문학이라… 그럼 프랑스로 갈 생각을 예전부터 했겠네. 그런데 그녀는 영문학과 출신 아냐? 왜 불문학을 고르게 된 거지.”

“그것도 얘기하자면 긴데… 우선 네 용건부터 먼저 말해봐. 그래, 라미레지를 한 마리 데리고 왔다면서?”

“어, 참 그랬지. 자, 네가 수컷이라고 말해서, 암컷으로 데려왔어. 그런데 조금 클지도 모르겠네. 나이는 이제 6개월 정도야. 잘 부탁한다.”

“이것도 그냥 기르면 되는 거야? 사료는 두 배로 주면서?”

“응, 어차피 먹는 양은 비슷하니까. 네 어항의 물에 적응하는 기간이 필요할 테니까, 이 어항에 네 어항 물을 조금씩 넣으면서 ‘균형’을 맞춰봐. 그리 어렵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이 도자기 말인데…”

말하면서 A는 손바닥만한 도자기를 집어들었다. 실제로는 어른 손바닥보다 조금 더 작았다. 회색이 감도는 유백색의 작은 그릇이었다.

“이건 그냥 내 어항의 컨셉에 안 맞아서 가지고 있던 거야. 그래서 한번 씻기는 했지만, 어떨진 모르겠네. 한번 넣어봐. 넣어보고, 안 맞으면 다시 돌려주든지 아니면 가지고 있든지 해. 현재 나한테는 그다지 필요 없는 물건이니까.”

“고마워. …더 할 말은 없어?”

“글쎄… 한 달에 한 번씩 물갈이 잘 하고. 청소는 너무 꼼꼼하게 하지 말고. 나머지는 크게 문제 없을 거야. 혹시 문제 생기면 다시 나한테 전화해. 아참.”

A는 중요한 일이 생각난 듯 잠시 말을 멈췄다. 나는 그가 크게 뜬 눈을 볼 수 있었다.

“아무리 여친의 부탁이라고 하지만, 네가 왜 라미레지를 기르게 됐는지는 모르겠어.”

그렇게 말하고 A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내 방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딱히 없었으므로, A는 이제 안에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은 종이백을 들고 얇은 외투를 챙겨 입었다. 나는 A가 엘리베이터를 타러 복도를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A는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결코 깨끗하다고 말할 수 없는 내 방을 보고, A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그는 심지가 곧은 사람이었다. 반대로, 나는 그렇지 못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칭- 하는 소리가 들려와서, 나는 문을 조용히 닫았다. 라미레지만큼이나 나른한 오후였다.


그 이후로도 생활은 변함없이 무료하게 이어져, 나는 대학을 계속 다니면서 라미레지를 키웠다. A가 선물해 준, 작은 어항에 들어 있던 라미레지 한 마리는 다행히도 새로운 공간에 잘 적응한 모양이다. 그 둘은 처음에는 지느러미를 건드리기도 하면서 서로를 탐색하다가, 시간이 지나자 적당히 체념하고 서로를 자신의 짝으로 받아들였다. 밥은 티스푼 한 개 정도 더 주었고, 한 쌍인 둘은 먹이에 있어서만큼은 서로에게 양보하지 않았다. 나는 그 모습을 위에서 지켜보며 재밌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언제나 먹을 게 생기면 내게 먼저 맛보게 해 주었다. 푸딩이든, 초콜릿이든, 빵이든 그녀는 나에게 반을 떼 주고 나서야 자신의 입에 가져다 대었다. 그런 점은 나중에 생각해 보면 참 고마웠다. 비록 나는 그녀에게 그녀가 행한 대로 해 주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라미레지는 자라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 자랐다. 시간이 지나고 겨울이 가까워져 왔을 때 즈음에는, 라미레지는 내 검지손가락 정도로 커져 있었다. 그의 짝은 그보다 약간 더 컸다. 어항에 넣어둔 작은 도자기는 라미레지가 자라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는 모양이었다. 라미레지는 도자기 속으로 들어가거나 주위를 훑어보면서 이게 먹을 수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살펴보는 것 같았다. 아쉽게도 도자기는, 라미레지의 작은 입으로 들어가기에는 너무 컸다. 이런저런 행동을 하는 라미레지를 관찰하다 보면 시간이 잘 갔다. 어느 때는 어항에서 눈을 떼자 사위가 어두워져 있기도 했다. 나는 불을 켜고 좁은 내 방을 훑어보았다. 그곳에서 어항은 이미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졸지에 나는 객이 되어 라미레지를 보필해야 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나는 예전에 읽었던 데리다의 “환대에 대하여”를 떠올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주인에서 객이 된 나는 환대를 받아야 하는 입장 아닐까?’ 하지만 나는 오히려 주인인 라미레지를 환대하고 있다. 상황은 180도 역전되었고, 나는 이제 환대를 기대할 수 없는-물고기에게 어떻게 환대를 기대할 수 있을까!-객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한숨을 쉬고, 물고기와 대화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따위의 시덥잖은 생각을 한 뒤에, 외투를 걸치고 저녁을 먹으러 방을 나왔다.


그녀는 프랑스로 유학을 간 뒤에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꾸준히 내게 연락을 해 왔다. 나는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으면서도 그녀의 연락을 내심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전화나 문자를 걸어올 때마다 연락이 와서 기쁘다는 표정을 최대한 감추기 위해 애썼다. 뭐,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우스꽝스러운 표정이 그녀에게 보여질 리도 없겠지만. 듣기로는 그녀는 학업 때문에 매우 바쁜 것 같았다. 아직 1학기라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다른 대학원생들에 비해 그리 많지 않다고 그녀는 말했지만, 나는 그녀가 자신의 일에 대해 겸손하게 말하는 방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 밖에도 프랑스에서의 생활에 대해, 주로 한국과의 차이점에 대하여 내게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나는 프랑스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물가가 한국과 크게 차이가 안 난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다지 흥미를 끄는 내용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장을 봐 왔는데 100유로도 안 들었다면서, 이 정도면 2주일을 버틸 수 있다고 기쁜 듯이 내게 말했다. 나는 책상 위에 올려둔, 다 먹고 빈 껍데기만이 남아 있는 유명한 모 체인점의 도시락을 바라보았다. 도시락은 고무줄로 한번 둘러싸서 냄새가 나지는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혹시 프랑스에도 ‘도시락 비슷한 것’을 사 먹을 수 있는 매장이 있냐고 물어볼까 하다가, 그냥 그만두었다. 그런 얘기를 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혹은, 그녀를 기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그 밖에도 프랑스 사람들의 습관이라든지, 매일 아침 카페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 생활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그 어느 것도 나의 흥미를 끌지는 못했다. 미안했지만,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나는 내가 왜 한국에서 대학생이 된 지금까지 계속 살아왔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단지 우연에 지나지 않았음을, 만약 내가 다른 기회를 만났다면 지금쯤 다른 곳에서-이를테면, 일본이라거나-공부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나는 그녀의 말에 호응을 하거나 적당한 곳에서 웃었고, 그녀는 나의 노력을 알아 주었는지 거기에 대해 불평의 말을 덧붙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전화를 내 쪽에서 끊었고, 나는 도시락을 내일은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다시 누웠다. 이제 가을학기가 끝날 때까지 한 달 정도 남아 있었다. 한 달이라, 긴 시간이라면 긴 시간이지만, 전체 세월과 비교해 보면 짧아도 너무나 짧은 시간이다. 그 시간을, 나는 라미레지를 키우면서 보낼 것이다. 생각이 들어서 어항을 보았을 때는 이미, 라미레지는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수초 사이에서 살랑거림을 멈춘 채 잠들어 있었다. 라미레지에게는 잠이 주어졌다. 나도, 슬슬 졸음이 몰려오는 것을 느끼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안녕하세요.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나요?”

“아, 그게 말이죠. 실은 제가 아는 청설모 씨가 짝을 구하고 싶다고 해서요. 그런데 그 분이 말씀하시기를, 꼭 ‘파란 꼬리’를 가지고 있는 짝을 구하고 싶다네요. 그런데 청설모 중에 ‘파란 꼬리’를 가지고 있는 청설모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리고 만약 조건에 맞는 청설모를 발견한다고 해도, 그 분이 제가 아는 청설모 씨의 짝이 되는 데 응해줄지도 모르겠고 해서, 여기까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여쭙고 싶습니다만, 혹시 ‘파란 꼬리’를 가진 청설모를 찾을 수 있을까요?”

“청설모 말씀이시죠. 한번 검색해 보겠습니다.”

손가락 만한 안경을 쓰고 있는, ‘무엇이든 찾아드립니다’ 사무소에서 비서로 일하는 라미레지 양은,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모니터에 손을 가져다 대고 내 귀에는 들리지 않게 뭐라고 뻐끔뻐끔거렸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정수기에서 물을 한 번 받아 마셨고, 옷매무새를 다듬었으며, 혹시나 눈에 눈곱이 끼지 않았을까, 주의하며 손가락으로 눈 주위를 매만졌다. 라미레지 양은 쉽게 ‘파란 꼬리’를 가진 청설모에 대해 알아내었다. 그녀는 나에게 모니터를 직접 보여주면서, 입을 뻐끔거리면서 말했다.

“여기 보시면 ‘청설모’에 대한 프로파일이 나와 있습니다. 그 중에서 ‘꼬리’ 카테고리를 보시면, ‘파란 꼬리’를 가진 청설모가 수백 명 정도 있다고 나오고, 가까운 곳에는 20명 정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암컷인지 수컷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루 정도 시간을 주시면 그것까지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혹시 더 궁금한 점은 없으신지요?”

“음, 네. 내일 다시 와서 확인해 볼게요. 비용은 내일 같이 내면 될까요?”

“그렇게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안녕히.”

“다음에 또 오세요.”

실은 나는 ‘파란 꼬리’를 가진 청설모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파란 꼬리’를 가진 청설모는 분명히 존재하고, 그 사실이 내 머릿속에 메모지를 집어넣은 것처럼 기입되어 있었다. 나는 ‘무엇이든 찾아드립니다’ 사무소를 나와서 거리를 둘러보았다. 거리에는 라미레지, 구피, 시클리드, 그 밖에 이름을 알지 못하는 열대어들, 그리고 다람쥐, 청설모, 햄스터 등의 설치류 동물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나머지 동물, 이를테면 사자나 독수리 같은 동물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갑자기 배가 고파져서, ‘물고기’를 요리해서 내 놓는 식당에 들어갔다. 주방에는 요리사로 보이는 라미레지 한 명이 열린 공간에서 물고기를 손질하고 있었고, 카운터를 보는 라미레지 아주머니가 나와서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나는 스시 한 세트를 주문했고, 10분 정도 기다리자 넓고 평평한 그릇에 그럴 듯하게 놓여진 스시가 나왔다. 나는 우선 손수건으로 손을 닦은 다음에, ‘손’으로 새우초밥을 하나 집어서 먹어 보았다. 맛있었다. 그리고 나는 차례차례 계란말이, 참치, 오징어, 군함말이, 광어, 연어 등을 먹어 나갔다. 나는 언제나 연어를 마지막에 먹었다. 연어를 스시 중에서도 특히 좋아하기도 하고, 연어를 마지막에 먹는 게 ‘습관’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스시를 다 먹었을 때는 이미 저녁이 되어 있었다. 지갑에 있던 만 원짜리 지폐를 두 장 꺼내서 값을 치렀고, 밖으로 나와서 연인의 지느러미를 부여잡고 흔들거리고 있는 열대어들 사이를 계속 지나쳤다. 거리에 일루미네이션이 보였다. 나는 갑자기 라미레지는 뭘 하면서 밤을 보내는지 궁금해졌다. 일단 아직 문이 열려 있는 백화점에 들어가 보았다. 라미레지는 비롯해서 열대어는 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의류 매장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신 열대어들이 즐겨 찾는 코스메틱 매장이 1층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아쉽게도 열대어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무엇을 사거나 할 수는 없었다. 2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2층에는 놀랍게도 게임 소프트와 도서 등이 있었다. 열대어들은 서서 눈을 책에 두고-비록 완전히 책에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독서를 하거나, 게임 소프트를 살펴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딱히 흥미로운 점이 보이지 않았다. 3층에 올라가기 전에 나는 내가 할 일을 떠올렸다. 그리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와서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에는 열대어들과 설치류들이 많이 보였다. 추측하기로는 퇴근시간인 것 같았다. 나는 처음 나에게 의뢰를 맡겼던 청설모 씨가 사는 집으로 향했다. 열차는 두 정거장 째에 지상으로 올라갔고, 지상을 달리는 전차는 덜커덩거리는 소리를 내며 밤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나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반짝거리는 네온 불빛과, 졸려 보이는 오렌지빛 가로등과, 낮고 빽빽하게 자리잡은 주택들이 보였다. 지붕 위에 쌓인 눈은 거의 녹아가고 있었다. 청설모 씨가 사는 집은 사무소에서 지하철로 25분 거리에 있다. 다행히도 내가 그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는 저녁을 차려놓고 밥을 먹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염치 불구하고 청설모 씨의 식탁에서 밥을 같이 먹었고, ‘파란 꼬리’를 가진 청설모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했다.

“그래요? 나는 혹시 여기에 없으면 저기 멀리라도 가야 하는 줄 알았지. 다행이네요. 한숨 덜었어요. 바쁜 저를 대신해서 알아봐 주어서 감사합니다. 요즘 들어 부쩍 일이 많아져서요.”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일이라고 해도 복잡한 건 아니고, 그 왜 이번에 눈이 많이 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눈을 치울 사람이 필요한데, 막상 새로 사람을 쓰려고 해도 들어오는 사람이 얼마 없어서, 그 일을 저희들이 도맡아서 하게 되었지요. 이제 거진 다 끝내긴 했습니다. 내일 정도면 끝날 거에요.”

“그거 다행이네요. 눈이 많이 왔다고 해서 고생하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분명.”

“맞아요. 저희 같은 사람들이 없으면 공사를 시작하지도 못한다니까요. 나 참, 사람들은 비나 눈이 왔다고 하면 교통에 대한 불편밖에 모르니. 실제로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닌데 말이죠.”

“그나저나 ‘파란 꼬리’를 가진 청설모를 찾은 다음의 이야기입니다만,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이른바 ‘구애’ 말이죠? 일단 본능에 맡겨볼 생각인데… 요즘 청설모들은 그렇게 안 한다고 해서 걱정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동네 청설모들은 서로 본능적으로 맞는 짝을 찾았거든요. 저 같이 연애에 관심이 없던 청설모는 조용히 나무나 탈 뿐이었지만요. 그런데 이렇게 막상 짝을 구하게 되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 부분’까지 어떻게 소우 님에게 맡겨보고 싶습니다.”

‘소우 님’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말한다. 나는 임시로 그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청설모의 부탁을 듣고, 나는 국물을 마시면서 내가 ‘그 부분’에 대한 일을 맡을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생각하는 데 오래 걸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청설모 씨에게 낙담할 만한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가능한 세심하게 말을 골랐고, 말을 시작했을 때는 이미 식사를 거진 마친 뒤였다.

“이렇게 말하는 점, 우선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부분’에 대해서라면 저보다는 제 여자친구에게 상담하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자친구는 현재 프랑스에서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에, 청설모 씨가 바로 연락을 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됩니다. 만약 그래도 청설모 씨가 원하신다면, 간접적으로나마 물어볼 수는 있습니다만…”

“제발 그렇게 해 주세요. 저야 여자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으니까요. 그런데 소우 님에게 여자친구가 있었다니, 놀라운 사실이네요. 아, 소우 님이라면 분명 독신으로 살고 있을 거라고 멋대로 상상해 버렸거든요. 이거, 미안하게 됐습니다. 여자친구가 있었다니.”

“아뇨, 다들 그렇게 말하곤 하니까요(웃음). 오늘, 저녁을 대접받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다음에 또 방문할 일이 있기를 바랍니다.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온다면 더 좋겠지요.”

“예, 부디 그렇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도 이제 중년을 바라보고 있는 나이라, 어떻게든 짝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시다시피 청설모는 적극적으로 짝을 구하지 않으면 개체수가 점점 줄어가니까요. 그런데 차라도 한잔 하고 가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맥주라도?”

“맥주는 좋지만 오늘은 차로 하겠습니다. 내일 또 마실 일이 있어서요. 동창인 사카모토가 이번에 대학을 졸업한다고 해서요. 그 축하 겸 해서 마시러 갑니다. 차는 어떤 종류인가요?”

“뭐, 저 같은 서민의 집에 좋은 게 있을 리는 없고, 평범한 녹차입니다. 예전에 직장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에게서 얻은 건데, 지금은 퇴사하고 혼자서 라멘집이라나 뭐라나를 하고 있다고 들었지만, 대접할 일이 없어서 혼자서 조금씩 마시다가, 이렇게 내어드리게 되니 개인적으로 즐겁기도 하고 그렇네요. 저기 잠시만 앉아 계시면, 과자와 함께 내 오겠습니다. 심심하시면 TV라도 보고 계세요. 얼마 안 걸리니까요.”

말을 마치고 청설모 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찬장에서 녹차잎이 들어있는 동그란 통을 꺼냈다. 나는 그릇을 정리하고 거실에 놓여져 있는 코타츠에 발을 집어넣고 앉았다. TV를 틀었지만 딱히 재밌는 방송이 없어서, 대신 재킷에서 핸드폰을 꺼내서 메일을 확인하고 트위터를 읽었다. 트위터에는 누가 결혼한다는 말이 올라와 있었다. 그 밖에도 다른 말들이 많았지만, 나는 그것들을 일일이 주의깊게 보지는 않았다. 어차피 지나가면 그만인 말에 불과하다. 부엌에서 청설모 씨가 찻잔을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따뜻한 코타츠에 발을 집어넣고 있으니 졸음이 왔다. 나는 테이블에 팔을 올리고 고개를 숙였다. 물을 끓이는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떴을 때는 아침이었다. 나는 좁은 자리에 누워 있었다. 물을 끓이는 소리는 옆방에서 물이 흘러가는 소리였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오전 10시였다. 오늘은 12시에 수업이 있었기 때문에, 집에서는 11시 반에는 나와야 했다. 도시락은 어제와 같이 책상 위에 놓여져 있었다. 뭐라도 점심을 먹긴 먹어야 했다. 나는 주의깊게 샤워를 하고, 옷을 대충 챙겨입고 도시락을 분리수거 쓰레기통에 버린 뒤에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당연하게도, 오직 ‘인간’들만이 거리를 걸어다니고 있었다. 라미레지나 청설모 같은 존재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청설모 씨를 오늘 밤에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는 아직 내게 차를 대접해 주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코타츠에서 든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집에서 나오기 전에 라미레지가 있는 어항을 곁눈으로 훑어보았다. 라미레지는 두 마리가 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아직 햇살은 방에 온전히 가 닿지 못했다. 햇살이 방을 메울 때쯤에는 이미, 나는 그곳에 없을 터였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하루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저녁에는 이미 학교 근처 라멘집에서 라멘을 사 먹고 집에 들어와 있었다. 달리 만날 사람도 없었고, 나를 부를 사람도 없었다. 나는 혼자였다. 대학교에 들어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녀가 어떻게 나를 남자친구로 받아들였는지 모를 정도로, 나는 사람들에게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거기에 그냥 그대로 있었다. 나는 하나의 오브제가 된 그들을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때로는 술을 마시거나 하는 일이 있었지만, 그것은 한때의 유희에 불과했다. 시간이 지나면, 학기가 끝나면 그들은 나로부터 점점 멀어져 갔다. 연락을 해 오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내 쪽에서 연락하는 일도 없었다. 나는 그렇게 사람들과 소통하는 법을 익혔다. 그러나 ‘소통’은, 대부분의 경우 오래 가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소통을 바란다고 말할 수 있을까. 거기에 대해서는 아직 답을 구하지 못했다. 답을 구하기를 바라는지도 의문이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 라미레지는 언제나 있는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한 마리는 도자기 곁에서 쉬고 있고, 다른 한 마리는 활발하게 움직이지는 않고 꼬리만 살랑대고 있었다. 작은 몸이 쉼없이 운동하고 있었다. 나는 라미레지를 보고 벌새를 생각했다. 벌새는, 공중에 떠 있기 위해 쉼없이 날개를 퍼덕거려야 한다. 그래서 벌새는 작은 몸에도 불구하고 많은 열량을 필요로 한다. 그에 반해, 물 속에서 사는 라미레지는 많은 열량을 필요로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공기 아래서 사는 인간은, 필요 이상의 열량을 섭취하고 있다. 전부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었다. 누구도 그런 사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라미레지에게 밥을 주고, 노트북을 열어서 메일을 확인하고 과제를 하는 척을 했다. 시간이 적당한 속도로 흘렀다. 밤이 찾아왔고, 나는 노트북을 닫고 자리에 누웠다. 곧바로 잠이 오지 않아서, 다시 핸드폰을 켜서 이런저런 도움이 안 되는 정보를 검색했다. 러시아에 운석이 떨어졌다고 했다. 어딘가에서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세상은 여전히 끔찍하게도 기괴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맛있는 음식에 대해 생각하며 잠에 빠졌다. 나른한 새벽이었다.


청설모 씨가, 내가 자고 있는 코타츠로 다가왔다. 그는 코타츠에 조용히 무거워 보이는 찻잔을 올려놓았다. 찻잔이 합판에 닿는 소리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눈 앞에 동그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는 청설모가 보였다. 그는 나를 보자 앞니를 드러내며 부끄러운 듯이 말했다.

“평소보다 공을 들여 끓이긴 했는데, 어떻게 소우 님의 입에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한번 드셔 보시죠. 두 번 우려낸 녹차입니다.”

나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손을 들어 잔을 집었다. 갓 따라낸 잔은 차의 열기로 조금씩 뜨거워지고 있었다. 조심스레 손가락을 움직여서 아직 뜨겁지 않은 부분을 집어서 들었다. 한 모금 마셔 보았을 때, 좋은 향이 입 안에 퍼졌다. 나는 다시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청설모 씨를 향해 말했다.

“좋네요. 이런 차는 오랜만에 마셔 봅니다. 아마도 ‘여기서’밖에 마실 수 없겠지만.”

“그런가요? 소우 님이라면 차를 즐길 줄 아셨는데 말입니다. ‘여기서’라는 건, 다른 사정이 있다는 말인지요?”

“그렇다고 할 수 있겠네요. 사실 저는 그리 차를 즐기는 편도 아니라서… 하지만 이렇게 차를 마시는 건 좋아합니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기분을 즐기면서요.”

“하하, 역시 ‘풍류’를 아시는 분입니다. 저는 그저 하루의 피로를 푸는 겸 해서 마시는 거지만요. 시간은 아직 넉넉히 남아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간에 대해서라면, 걱정하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이 집을 나가야 할 테니까요. 그래도 지금은 느긋함을 즐기고 싶군요. 제게 허락된 시간을 말입니다.”

“예, 아무렴요.”

청설모 씨는 어제보다 더 노련해 보였다. ‘시간’은 우리가 식사를 마치고 나서 겨우 30분 밖에 흐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청설모 씨는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차를 마시는 그의 표정이 어제와는 달라 보였다. 나의 마음 속까지도 꿰뚫어볼 듯한, 투명한 눈이었다. 나는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과자를 하나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느리게 시간이 흘렀고, 주위의 풍경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똑딱거리는 시계의 소리가 들려왔다. 오디오 덱이나 액자, 화분 등과 같은 오브제가 눈에 보였다. 벽에 걸어놓은 유화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누구의 그림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다시 청설모 씨를 바라보았다.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어디였더라… 아무리 생각해 내려고 해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나보다 열 살은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그의 얼굴은, 달의 뒷면과도 같은 주름과 그늘을 가지고 있었다. 빛을 받지 않는 것처럼, 혹은 빛을 너무 많이 쬐어서 다 타버린 것처럼, 청설모 씨의 얼굴에는 짙은 그림자가 져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니면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듯, 청설모 씨는 나에게 활짝 웃음지어 보였다. 나는 마저 차를 홀짝이는 수밖에 없었다. 후루룩, 후룩 하는 차를 마시는 소리와, 이따금 소리를 줄인 TV에서 나오는 웃음소리를 제외하면, ‘우리’를 감싸고 있는 것은 정적 뿐이었다.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나는 마음 속의 심지가 다 타버려서야 청설모 씨의 집에서 나올 수 있었다.


집을 나와서 곧바로, 나는 대학 시절부터 잘 알고 있는, 지금은 카운슬러 일을 하고 있는 비버의 상담실로 향했다. 비버 군은 앞으로 드러난 앞니--뻐드렁니라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은--가 멋진 친구였다. 그는 나보다 몇 배는 더 공부를 잘 해서, 내가 새로운 캠퍼스로 건너와서 문학과 철학 수업을 듣느라 진을 빼는 동안 심리학과를 3년 반만에 졸업해 버리고, 바로 같은 대학의 대학원에 진학한 다음에 어떤 유명한 연구실로부터 와 달라는 제의까지 받았지만, 그것을 단칼에 물리쳐버리고 카운슬러가 되어버렸다. 실로 ‘되어버렸다’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비버 군은 단숨에 심리학도에서 카운슬러로 변신했다. 나는 가끔씩 그를 찾아갔다. 고민이 있을 때나, 아니면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그것도 아니면 그냥 비버 군에게 세상살이에 대해 불평을 털어놓으면서 술이나 마시고 싶을 때 내가 비버 군을 찾아가면, 그는 언제나 보여주는 밝은 미소로 “오늘은 무슨 일로 찾아왔어?”라고 묻고, 내 이야기를 듣고 나면 “그래, 가자”라며 나의 손을 잡아끌고 단골 술집으로 향했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나보다 영리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나이 든 사람들을 제외하면 비버 군 정도밖에 없었다. 이것도 자만인지 모르겠지만, 여하간 비버 군은 내가 무슨 고민을 가지고 와도, 전혀 곤란한 표정을 짓지 않고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비버 군은, 일을 정리하고 집에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아직 아내를 얻지 못했다. 아니면 그냥 독신으로 사는 게 편한 건지도 모른다.) 내가 상담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을 때, 비버 군은 내게 여느 때와 같은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거기에는 어딘지 모를 피곤함이, ‘지쳤다’고 말해도 좋을 피로감이 감돌아 있었다.

“오늘따라 많이 피곤해 보이네? 아무래도 오늘은 집에서 쉬는 게 좋겠지?”

비버 군은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지만, 나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응, 오늘은 미안하게 됐어. 손님 한 사람--그는 절대 ‘환자’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이 방금 전까지 나를 붙잡고 늘어져서 말야. 얘기를 들어주느라 얼마나 진을 뺐는지. 시계를 보니 벌써 저 시간이란 말이더군.”

나는 그의 말에 시계를 돌아보았다. 시계는 오후 7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카운슬러에게는 꽤나 늦은 시간이었다. 나는 비버 군에게 개인적인 고민을 털어놓으려는 계산을 접었다. 그러기에는 비버 군의 웃는 얼굴이, 너무나 지치고 슬퍼 보였다. 나는 비버 군에게 다음에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한 뒤에, 지하철에 다시 올라 나의 집으로, 아무도 나를 반겨주는 사람이 없는 다다미 넉 장 반짜리 집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계속 지나갔다. 사람들이 지나가는 수를 세다 보면, 어느샌가 시간이 갔다. 나는 이제 기말 레포트만을 앞두고 있었다. 넉살 좋은 교수님이 즉흥적으로 내는 기말 시험이 있었지만, 나는 교수님과 마찬가지로 ‘즉흥적으로’ 시험을 쳤다. 성적은 A+ 아니면 C+가 나왔다. 합하면 B+니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다. 그녀는 내가 그런 식으로 대학의 수업을 얼렁뚱땅 넘기는 것에 대해 웃기도 하면서, 동시에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태클을 걸기도 했지만, 나는 그녀가 실은 나의 심정을 이해하고 있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어디까지나 ‘속으로 생각한’ 것으로, 그녀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 없었다. 그녀는 내게 말했다.

“너 그러다 8학기 내에 졸업 못 하는 수가 있다? 그러면 어떡하려구.”

“몰라. 등록금은 부모가 내 주겠지. 학자금 대출을 받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에이, 그래도 졸업은 해야 할 것 아냐.”

“졸업은 당연히 해야지. 대졸이 아니면 ‘제대로 된 인간 취급’을 안 해 주는 세상인데. 나는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지만, 내가 ‘제대로 된 인간’이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너를 포함해서.”

“으응, 나는 별로 그렇지는 않은데. 정수, 너는 이미 제대로 된 인간이니까.”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없잖아. 나 같은 녀석이.”

나는 그녀에게 말하지 못하는 비밀 몇 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도 마찬가지로 내게, 말하지 못할 비밀을 몇 가지 가지고 있겠지. 나는 그녀에게 비밀에 대해 캐 묻지 않았고, 그녀도 마찬가지로 내게 비밀에 대해 묻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나는 이 놀랍도록 안정한 ‘균형’이 좋았다. 그녀는 내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녀가 한때 엄청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녀는 그런 점에 있어선 도사였다. 나 말고 그녀의 과거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은, 그녀의 절친한 친구 몇을 제외하면 없었다. 나는 가끔씩 그녀의 과거를 끄집어내기를 즐겼고, 그 때마다 그녀는 부끄럽거나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녀의 곤란해하는 얼굴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세상은 왜 이렇게 재미없는 것일까.’ 어쩌면 나는 그녀 이전에 ‘여자’를 사귄 경험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도 마찬가지로, 나 이전에 ‘남자’를 사귄 경험이 없을지도 모른다. 둘 다 마찬가지로 ‘이성’에 대해 몰랐다. 그녀와 손을 잡고, 볼을 마주치고, 키스를 하고, 관계를 가지면서 점점 서로에 대해, 이성에 대해 알아간다고 느꼈지만, 실은 나는 아직도 이성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안심시켰다.


내가 비버 군을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사흘이 지나서였다. 비버 군은 쉬는 날에 나에게 불려 나와도, 전혀 싫은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런 비버 군을 이용하기를 좋아했다. 이번에는 내가 비버 군을 잘 아는 술집으로 끌고갔다. 고기가 불탄 위에서 타는 냄새가 매캐하게 떠도는, 실로 비버 군이 좋아할 만한 곳이었다.

“와, 오랜만에 식사다운 식사를 해 보네. 소우, 오늘은 네가 내는 거지?”

“물론이지. 마음껏 먹으라고. 나중에 몰래 화장실에 간다고 하면서 도망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비버 군은 나의 농담에 옅은 웃음을 띠었다. 나는 비버 군이 우스워서 웃는다고 생각했다. 비버 군은, 우습지 않은 막돼먹은 농담에는 단호했다. 그는 언젠가 소개팅에서 누군가가 “독일ドイツ과 도너츠ドーナツ는 한 글자 차이잖아요~” 라고 말했을 때도, “아닙니다, 도너츠에는 장음이 붙기 때문에, 모라로 따지면 독일은 3모라, 도너츠는 4모라로, 무려 1모라나 차이가 납니다.” 라고 답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를 벙찌게 만든 일이 있었다. 나는 그런 비버 군의 이야기를 그의 친구인 세키 군에게서 들었다. 세키 군은, 심리학을 전공하면서 비버 군과 함께 어울려 다니던 친구였다.

“그래서 비버가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 “내 이름은 비버ビーバー라니까요. 비바ビーバ가 아닙니다.” 라고. 그 녀석, 얼마나 깐깐한지 몰라.”

“헤에, 그거 재밌네. 그래서 상대방이 뭐라고 했는데?”

“아무 말도 못 꺼냈다니깐. 1분 정도 얼어 있다가 하는 말이, “아, 예. 죄송하게 됐습니다. 비버 님.” 이러고는 그냥 가 버렸어.”

“그것 참. 비버 군도 융통성이 너무 없어 큰일이야. 특히 장음에 있어서는 봐 주는 법이 없으니. 저러니까 여자친구를 못 만드는 거지…”

“그래도, 비버를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는 게 신기한 일이라니까~”

세키 군은 그렇게 남 얘기하듯 비버 군에 대해 말하기를 즐겼다. 나는 비버 군에게 “세키 군이 자네에 대해 고자질을 하고 있으니, 주의해 주게” 라는 말을 일부러 하지 않았고, 비버 군도 내심 눈치채기는 했지만 내가 말을 꺼내지 않는 이상 세키 군을 입에 담는 일은 없었다.

“오늘은 뭐부터 먹을까. 소혀 어때? 오, 안창살도 맛있어 보이네. 여기 주문이요!”

나는 비버 군이 알아서 주문을 하는 동안, 저번에 내가 차마 입에 담지 못했던 ‘고민’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내가 이걸 비버 군에게 상담한다고 해서, 과연 고민이 해결될 수 있을까. 해 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비버 군의 일이니까. 나는 그를 믿었다.

“저기, 하고 싶은 얘기가 하나 있는데 말이지.”

“뭔데, 또 여자친구 얘기냐?”

“어, 엇? 내가 네게 여자친구 얘기를 한 적이 있었나?”

“물론 있었지. 그 왜, 세 달 전에 세키 군하고 함께 술을 마셨던 자리에서.”

아뿔싸. 나는 그때 이미 여자친구가 프랑스로 떠나버렸다는 사실을, 자제해야 한다는 사실도 망각한 채로 비버 군과 세키 군에게 말해버렸던 것이다. 비버 군은 그 사실을 용케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아, 제발 잊어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그래서 내가 네게 충고해 줬잖아. 여자친구에 대해선 이제 그만 잊어버리라고.”

“아, 하지만 오늘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닌데… 어물쩡 넘기려는 게 아니라, 진짜로 다른 고민이 있어서 너를 부른 거야.”

“그래, 그렇겠지. 천하의 소우가 고작 여자 문제로 고민할 리가 없잖아?”

말하면서 비버 군은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어유, 이 얄미운 비버 녀석. 오늘따라 툭 튀어나온 앞니가 볼썽사나워 보였다. 나는 비버 군이 미리 따라주었던 맥주를 한 입 마셨다. 목넘김이 좋은, 잘 넘어가는 에비스였다.

“하여튼! 내 여자친구에 대해서는 이제 그만 하자고. 어차피 2년 뒤에는 돌아오게 되어 있으니까. 아니, 이러다 평생 프랑스에서 산다고 말해오면 어떡하지? 나도 프랑스에 가야 하나?”

“이런이런… 네 말대로 그만 하는 게 좋겠어. 너는 정신을 쓸데없는 곳에 너무 많이 소모해. 그건 멘탈적으로 좋지 않아. 게다가 이번에 의뢰 하나를 맡았다면서? 그것도 신경써야 할 텐데.”

“맞아. 의뢰를 하나 맡았어. 글쎄 말이지, 청설모가 갑자기 내게 찾아와서는 하는 말이…”

맥주를 마시니 말이 술술 잘 나왔다. 나는 비버 군에게 청설모 씨가 나에게 ‘파란 꼬리’를 가진 청설모 짝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한 일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비버 군은 내 이야기를 주의깊게, 그러나 고기가 타지 않게 뒤집어 주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들었다. 나는 그에게 청설모 씨가 내게 저녁 대접을 해 준 일까지 말해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가, 고기를 한 점 집어먹고 나서(“맛있다! 죽여주는데, 이거.”), 꼭꼭 씹고 나서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비버의 입은 무겁다.

“아마 별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 사람을 찾는 건 네 특기잖아? 청설모라고 해서 그리 어려울 게 있겠어? 찾아준 다음에야 결혼하든 말든 둘이 알아서 할 일이지. 네가 간섭할 일은 아냐.”

“물론 그렇기는 하지. 하지만 청설모 씨가 나를 바라보는 눈이 심상치 않았다니까. 뭔가를 더 요구하는 눈이었어. 게다가 차까지 대접한 걸 생각하면 더더욱.”

“아냐, 그건 그냥 대접일 뿐이라고. 저녁만 먹고 가라고 인사하는 편이 더 이상한데. 교토에서는 부부즈케라고 먹고 가 버리라는 뜻으로 오차즈케를 내 온다고 하지만, 여기는 삿포로잖아. 교토에서와 같은 일은 없어. 분명 선의를 담아서 대접한 것에 불과해.”

“좋아, 그렇게 생각하도록 하자. 네 말대로 청설모 씨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그 뒤의 일은 그가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는 거야. 그렇게 해야 나중에 트러블이 안 생기겠지.”

“이제 고민 끝인가? 더 할 말은 없는 건가?”

“더 할 말이 있기는 하지만, 정확히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어. 하지만 열려 있던 서랍 하나가 정리되어 다시 닫힌 기분이 드는데. 아, 나도 고기나 먹어야겠다.”

말을 마치고 우리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고기를 먹는 일에 집중했다. 비버 군은 벌써 2인분째를 먹어치우고 있었고, 나는 1인분 정도 먹었을 뿐이지만, 비버 군의 장단에 맞춰 조금씩 조금씩 먹는 양을 늘리고 있었다. 비버 군은 맥주를 한 병 더 주문했고, 나는 그의 잔에 맥주를 따라주면서 ‘매일같이 이런 삶을 누릴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소망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시간은 금세 1년이나 지났다. 라미레지는 한 마리가 죽었고, 다른 한 마리는 자신의 두 새끼와 함께 한 가족을 꾸리고 살아갔다. 길고 길었던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다가왔는지도 모르게 지나가고, 평상에 드러누워서 일어날 줄을 모르는 여름이 이제 막 지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계절은 늦여름, 달로는 9월이었으며, 하늘이 점차 높아지는 게 보였다.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내게 연락을 해 왔다. 그리고 하는 말이, 자기는 프랑스에서 계속 살기로 결정했다는 말이었다. 나는 그녀의 말에 동의도 부정도 하지 못했다. 내가 그녀의 있을 곳을 어떻게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또한 그녀는 한 가지 말을 덧붙였는데, 나에게 있어 그것은 문자 그대로 밥 대신 빵을 먹으라는 소리와 다름없었다.

“너도 프랑스에서 살지 않을래? 여기는 좋은 사람들이 많아. 프랑스어는 1년만 어학원에서 배우면 배울 수 있을 테고. 돈 걱정은 할 필요 없어. 저축해 놓은 돈이 있고 월급이 매달 나오니까, 절약하면 2년은 어떻게든 먹고 살 수가 있을 거야. 그 뒤로는 네가 일자리를 구해야겠지만. 그 전까지는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해. 어때? 올 생각이 있어?”

“아니, 없어. 없지만, 나는 네 말대로 프랑스에서 살아갈 운명인지도 몰라. 프랑스에 대해서 아는 거라면 철학자들, 이름만 알고 자세한 이론은 알지 못하는 철학자들과 뛰어난 소설가들, 그리고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듯한 이름밖에 모르지만, 나는 네가 프랑스에서 자리를 잡은 일에 대해 다행스럽게 생각해. 그러나 지금은 갈 생각이 없어. 무엇보다 대학을 졸업하지 않으면 안 되거든, 너도 잘 알다시피. 좋은 답을 전해주지 못해 미안해.”

“아냐, 나도 사실 그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그럼 1년 뒤에 보자. 그 때까지는 올 수 있다고, 지금 이 자리에서 약속해 주지 않을래?”

“지금 이 자리?”

“그래,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말야.”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현실에서 그녀와 통화를 하고 있는 것일까. 몽롱한 정신으로는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청설모는 듣기에 ‘파란 꼬리’를 가진 짝과 만나서 잘 살고 있다는 모양이다. 비버 군은 이제 카운슬러 일을 접고 미국의 대학원에 전문적인 공부를 하기 위해 떠났다. 세키 군은 듣기로는 운이 좋게 소설가로 데뷔했다는 모양이다. 나 참, 그런 시덥잖은 녀석이 무슨 소설을 쓴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제 ‘문학’이라는 것도 망해버린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나는? 아아, 젠장할. 이렇듯 꿈은 언제나 무책임하다. 나를 이곳에 던져놓고 한 마디도 도움이 되는 말을 남겨놓지 않은 꿈을, 나는 체념한 채로 받아들였다. 스토리 레벨로는 파탄에 이른 영화, 그것이 나의 삼반생이었다.


라미레지와 나는 오늘도 건강히 잘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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