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mpreintes du beau rêve
비참과 윤리 본문
비참이란 무엇인가. 비참이란 자신이 세계 안에서 절대적으로 안전하지 못하다는 감각, 다시말해 세계 안에서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다는 것을 느낄 때 발현하는 감각이다. 그래서 비참은 인간에게서 활기를 빼앗고 웅크리게 만들며, 그가 감각하는 모든 인격체가 적대가 되며 어떻게든 자신이 보호받을 수 있는 '감옥'을 만들고자 한다. 비참 안에서는 어떤 것도 명확하게 볼 수 없다. 명확하게 볼 수 없고, 생생하게 느낄 수 없고, 오직 자신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고통만이 자신을 옭아매는 것을 끔찍히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공동체 내에서, 한 명 혹은 소수의 인간이 비참을 느끼면 다른 '인간'은 공감 능력을 상실하는 대신에 비참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한 기만에 불과하다.
인간의 비참이 서로에게 '죄'를 짓게 만든다. 비참을 던지고 비참을 주워먹고 비참을 덕지덕지 바른다. 가장 가시적으로 권력이 작동하는 곳에서, 비참은 최대가 되고, 죄의 크기는 한층 커진다. 비참이 목을 매고 비참이 총을 들고 다른 비참을 살해한다. 비참이 다른 비참에 공감할 수 있어야 윤리가 자라난다. 그러러면 우선 비참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비참의 심연에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같은 비참이 전혀 다른 마음을 자라나게 할 수도 있다. 공감 대신에 증오와 끝없는 자괴감이 자리잡는다. 증오는 다른 비참을 비참으로 느끼게 만들지 못하고 대신 적대로 여기게 만들며, 자괴감은 자신이 속하지 못한 세계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킨다. 비참은 기입된 폭력성과 충동으로 드러난다. 여기엔 어떤 구원도 없다.
다시, 비참이 다른 비참에 공감하는 순간이 있다. 비참은 눈물을 흘리며 다른 비참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비참은 더 이상 비참이 아니게 된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비참이 다른 비참에 비해 덜 비참하거나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모두에게, 고통은 고유한 고통이다. 드러나는 고통이 다른 고통에 공감할 수 있게 만든다. 그리고 여기서, 어쩌면 '윤리'라고도 할 것이 자라난다. 윤리는 처음에 연민의 형태로 드러난다. 비참이 다른 비참을 쓸어안는다. 다른 비참을 보고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연민으로만 남으면 비참은 비참인 채로 머문다. 연민에서 자비가, 다른 비참에게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는 자비가 되어야 비참은 비로소 비참의 감옥을 벗어난다. 존재자를 얽매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는 다시 절대적으로 안전해진다.
사회는 고통받는 자에게 비참이 되라고 강요한다. 비참이 되어 다른 비참과 오직 고통만을, 끝없는 아픔과 폭력만을 공유하도록 강제한다. 그리하여 비참은 죄를 짓는다. 다른 비참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자신을 더욱 두터운 감옥에 가두며, 영원히 그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 권력이 미시적으로 작동하든 가시적으로 작동하든, 죄의 총량은 늘어만 간다. 그러나 누군가는 비참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다른 비참으로 말미암아, 비참에서 스스로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어려운 일임과 동시에 매우 드문 일이다. 우리는 누군가가 자비를 베풀어 주기를 기대한다. 비참을 서로 공유하고 있는 이상, 자비는 현현하지 못한다. 누군가가 구세주가 되기만을 바라고 있다. 비참은 이렇게 거대해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