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mpreintes du beau rêve
저녁형 인간 본문
해가 느릿하게 떠오른다. 푸른 빛이 점차 방을 잠식해 간다. 어둠은 그림자로 바뀌고, 흐릿하던 사물은 제모습을 찾는다. 불을 켜지 않은 채 아침을 맞으면 방은 이런 느낌이 된다. 모두가 깨어나는 아침에 졸음을 느끼는 건 기이한 경험이다. 고질적인 불면 때문이지만, 오후 늦은 시간에 일어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마 나는 평생을 가도 새벽을 맞는 농부의 마음을 알지 못할 것 같다. 저녁 열 시에 자서 여섯 시에 일어나는 규칙적이고 모범적이기 그지없는 생활 사이클을 가진다는 건, 현재의 나에겐 상상조차 무리다.
그러나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새벽 나절을 고요함과 집중 속에서 보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거다. 새벽은 집중과 창조의 시간이다. 모두가 움직이는 낮에 생활에 치이고 따사로운 빛에 눈이 부시더라도, 새벽에는 집중을 방해하는 그 어떤 것도 없다. 내가 있는 방을 제외한 주위는 전부 새카맣고, 가끔씩 들려오는 술주정이나 고양이 우는 소리 외엔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아침형 인간'들이 모두 곤한 잠에 빠져 있는 시간에, 나홀로 깨어있는 느낌은 실로 뿌듯하다.
어쩌면, 사람은 정말로 두 가지 타입으로 나눠지는지도 모른다. '아침형 인간'과 '저녁형 인간'. 최첨단을 달리는 세련된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은 전자다. 아침형 인간이 되지 않으면 사회에서 낙오되고, 결코 '훌륭한 인간'이 될 수 없다. 사회의 부속품이 된 인간에게, 스마트폰처럼 어디에서나 자본주의는 속삭인다. "아침형 인간이 되세요, 사회에서 낙오하지 않고 살아남고 싶으면." 그러나 속삭임이 통하지 않는 부류가 있다. 포유류와 조류 모두로부터 외면받은 박쥐처럼, 그들은 모두가 잠든 밤에 활동한다.
타입이 다른데, 한 가지 생활 방식만을 강요할 수는 없다. 저녁형 인간에겐 '저녁이 있는 삶'이 있는 법이다. 누구도 그의 저녁을 궤도로부터 어긋난 저녁이라고 매도할 수 없다. 하지만 모두가 자신을 관리하게 만드는 현대의 자본주의는 이미 '아침형 인간'이 되지 않으면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저녁형 인간은 정말로 박쥐가 되었다. 그들은 밤에 활동하는 이점을 말하지만, 누구도 이를 귀담아 들어주지 않는다. 슬픈 일이지만, 저녁형 인간은 계속 박쥐로 살아야 할 운명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