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mpreintes du beau rêve
친화력 본문
친화력의 일반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는 힘 또는 능력" 보통 사람들은 친화력을 사회 생활을 하면서 자라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친화력을 기르자", "친화력을 키워야 한다" 같은 말이 나온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는 다르게, 친화력은 마음 먹은 대로 길러지는 '후천적 능력'이 아니라 유년기에 타고나는 '선천적 능력', 즉 재능이다. 재능 중에서도 재능이라고 명확히 분별하기 어려운 게 바로 이 친화력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친화력을 기를 수 있는 후천적 능력으로 오해할까? 바로 관계 형성의 독특한 메커니즘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 둘이 관계를 맺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우연히 만나거나 계획을 잡아 만나고, 서로 적당히 화제가 되는 얘기를 하다가 공감대를 형성한다. 여기서 관계가 진전되면 친구가 되거나 연인이 되거나 '좋은' 선후배 사이가 된다. 그리고 서로 점점 더 깊은 얘기를 나눈다. 같이 하는 활동도 늘어난다. 일반적으로 관계는 이런 과정을 거쳐 맺어진다. 여기서 '관계가 진전되면', 이 부분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도대체 어떻게(how) 관계가 진전되는 것일까? 지금까지 비밀을 밝히기 위해 여러 분야에서 많은 사람이 노력해 왔지만, 아직까지 이 영역은 수수께끼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나는 관점의 역전을 제시한다. 친화력은 결코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에 맺는 관계 형성의 과정에서 자연스레 '습득되는' 능력이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 맺는 관계는 가정에 비교적 많은 영향을 받는다. 즉 부모가 외향적이면 보통 자식도 외향적이다. 혹은 가정 내에 억압과 금기가 심하면 자식은 내성적으로 된다. 이런 식으로 친화력은 각자가 타고나는 재능이 된다. 누군가는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도 능수능란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상황에서 낯섦에 고개를 푹 숙이는 사람도 있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친화력은 단적으로 드러난다.
자, 여기서 문제. 과연 친화력이 '0'인 사람도 있을까? 정답은 "있다"다. 참고로 친화력이 두 배라고 해서 사람을 두 배로 잘 사귈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친화력은 '양'적 속성이 아니라 '질'이다. 다시 상상을 전개해 보면, 친화력이 0이면 이론적으로 어떤 사람도 사귈 수 없다. 이 '팔 없는 인간'은 어떤 사람의 눈에도 띄지 않을 것이므로, 충분히 사회 내에 존재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관찰되지 않는다면 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친화력이 '0'인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는 유일한 공간, 인터넷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터넷에서, 친화력이 '0'인 사람은 마음대로 댓글을 달 수도 있고, 게시판에서 의견 개진을 할 수도 있으며, 처음 보는 사람과 채팅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유의미한 '관계'로 진전되지는 못한다. 일반인들에게, 이들은 그저 '익명'으로 남을 뿐이다. 익명이란 바꿔 말하면 이름이 없는, 즉 고유한 '정체성'이 없는 존재다. 사회에서 이들이 받는 대접도 마찬가지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이름이 있다고 해도, 그는 '알바생'이나 '사원', '학생'으로 불린다. 그는 전혀 자신의 '이름'으로 불릴 수 없다. 말하자면 '팔 없는 인간'은 존재의 방식을 박탈당한다.
배려가 전무하고 집단주의와 이기주의가 강한 곳에서 '팔 없는 인간'이 많이 발생한다. 사회적 여건, 다르게 말하면 '안전망'이 충족된 곳에선 이런 '팔 없는 인간'이 매우 드물다. 친화력은 유년기에 타고나는 것이지만, 각 사회마다 친화력의 미니멈치가 있어서 선진국일수록 이 수치가 낮은 것이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대한민국은 제3세계만도 못하다. 친화력이 '0'인 사람이 생존 가능한 최소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느냐가 사회의 수준을 결정한다. 한국에선 수많은 친화력 0들이 '익명'으로 가려지고, 방치되고, '무관계의 버뮤다' 속을 힘겹게 헤엄쳐 나간다.
여기서 다시, '어떻게' 친화력 '0'인 존재들을 인민people으로 호명할 수 있는가. 내가 보기에 정치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복지도 중요하고 최저임금 인상도 중요하지만, 이런 건 절차대로라면 얼마든지 소수자들을 배제하고서 이뤄질 수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소수자들 중에서도 가장 '소수'인 이들이 바로 친화력 0인 존재들이다. 이름을 부여받지도 못하고 존재의 방식을 박탈당한 '팔 없는 인간'들이 인민으로 불리고 정치의 장으로 나올 수 있으려면, 사회는 급격히 그리고 많이 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역사의 '진보'를 믿는 한 사람으로서, 부디 그리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