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mpreintes du beau rêve
망설임과 시험 본문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이란 라이트노벨이 있다. 이 '가벼운 소설'은 일본의 독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어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되었는데, 따라서 라이트노벨을 보지 않는 나도 작품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독후감을 쓰는 것처럼 줄거리를 질질 읊고자 내가 키보드에 손을 얹은 것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중요한 이야기가 있고 또 지금 내가 거기에 대해 쓰고자 하기 때문에, 우연에 우연을 겹쳐—역사의 끝에서 보면 이것 또한 필연의 톱니다—하나의 글이 엮이기 시작했다. 제목이 말하는 바와 같이, 나는 여기서 '망설임'과 '시험'에 대해 쓸 작정이다. 망설임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의미 그대로의 '망설임'이지만, 시험은 그것과는 많이 다른, 성경에서나 종종 볼 수 있는 '시험'이다. 그렇다면 이 둘이 어떻게 엮일 수 있을까? 아주 재밌게도, 둘은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에서 서로의 양 팔을 잡는다.
이 작품의 중심 인물이 되는 것은 카미조 토우마 그리고 인덱스다. 인덱스는 학원도시에 살게 된 토우마에게 어느 날 갑자기 '던져지는'데, 처음 본 남자에게 다짜고자 밥을 달라고 요구한다. 여기서 토우마가 전형적인 고등학생이라 자연스레 무시해 버린다면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겠으나, 카미조는 그런 '전형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그래서 인덱스는 최소한의 구원을 받게 된다(비록 나중에 그녀의 '걸어다니는 교회'가 토우마의 이매진 브레이커(환상살)에 파괴되더라도). 빨리감기를 해서, 토우마가 미사카 시스터즈(이하 미사카 동생)의 한 개체를 만나는 부분부터 시작해 보자. 토우마는 미사카 동생의 본체인 미사카 미코토를 만난 뒤에 우연찮게 그중 하나를 만나게 된다. 토우마는 처음에 외형이 같은 그녀를 보고 미코토라고 생각하지만, 고글과 눈동자를 보고 '미사카'가 아님을 알아챈다. 여기서 미사카 동생은 말 끝마다 "미사카는 미사카는" 하는 후렴구를 덧붙인다. 토우마는 그런 그녀를 친절하게 대해준다.
카미조가 다른 개체를 만날 때도, 변함없이 "미사카는 미사카는" 하는 말버릇을 듣게 된다. 알고 보니 그들은 원래 진짜 미사카의 복제로 생성된 2만 명의 미사카 동생이었다. 그래서 동생들은 하나의 네트워크 안에서 소통할 수 있으며, 2만 명 분의 기억이 네트워크에 모인다. 그래서 미사카 동생 사이에 의견 충돌이 생기는 것도 인간이 고민하는 것과 흡사하다는 묘사가 나온다. 그러나 그들을 일반적인 안드로이드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야기를 더 따라가 보면 알겠지만, 미사카 네트워크—결코 개체가 아니다—는 카미조 토우마에 대해 연애 감정 비슷한 감정을 경험한다(초능력자와 우주인이 나오는 다른 애니메이션이 생각나지 않는가?). 좋다, 여기까지 정리하면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을 처음 접한 독자도 미사카 네트워크에 대해 파악할 수 있으리라 본다. 이제 핵심적인 질문, "미사카는 미사카는"이 의미하는 가장 본질적인 요소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미사카 동생의 말투는 성조 없는, 말 그대로 '기계의 목소리" 그대로지만, 단순히 녹음된 말을 반복하는 기계와 다르게 상황에 맞는 적절한 말을 바로바로 답해낸다. 그러나 도대체 "미사카는 미사카는" 하는 후렴구는 왜 붙는 것일까? "제작자의 독특한 취향"이라고 하면 문제는 쉽게 해결되는 듯 보이지만, 작가의 코멘트가 없는 이상 저것도 옳은 답변이라고 보기 어렵다. 보통 저 말 뒤에 붙는 것은 생각의 표명이거나 감정의 표현이다. "미사카는 미사카는" 하고 운을 뗀 뒤에 미사카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거나,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상대에게 드러낸다. 그렇다면 혹시, 미사카 동생—이면서 동시에 미사카 네트워크의 일부—은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을 '망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도 말 끝마다 꼬박꼬박 "미사카는 미사카는" 하는 후렴구를 붙여가며 말이다.
하지만 이 가설은 한 가지 난관에 부딪친다. 바로—생각이나 감정의—표현은 말버릇 전에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표현이 발화 전에 결정되어 있는데, 망설임이 표현을 연기할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앞에서 미사카 동생은 일반적인 안드로이드가 아니라고 말했다. 거칠게 표현하면 안드로이드는 생각=연산할 줄 아는 데이터베이스다. 데이터베이스는 결론을 내지 못한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생각'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연산'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네트워크는 다르다. 네트워크는 기존의 인공지능이 머물렀던 한계에서 벗어나 자신—이면서 동시에 네트워크의 일부—의 '기분'을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분화되었다. 하지만 그것을 확정적인 사실로 말하지는 못한다. "나는 ~라고 생각한다"가 미사카 동생의 발화엔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에둘러 "미사카는 미사카는"이라는 망설임으로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할 수밖에 없다.
미사카는, 미사카 동생은 어떤 억양의 변화 없이 오직 "미사카는 미사카는" 하는 망설임으로 자신의 '기분'을 전달할 수밖에 없다. 그녀의 기분이 받아들여질지 그렇지 않을지는 온전히 움직이는 입장, '능동태'에 달려 있다. 그러나 반대로 시험에 드는 것도 '능동태'다. '피동태'로 머무르는 타자가 갑자기 거부할 수 없는 창백함으로 다가와 주체를 시험에 들게 할 때, 바로 이 순간 '능동태'의 윤리로움이 결정된다. 액셀러레이터는 만 명이 넘는 미사카 동생을 죽이면서도 그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대화에 빠져 "미사카는 미사카는" 하는 망설임을 알아채지 못했다. 반면에 카미조는 우연찮은 계기에 의해 망설임을 알아채고 미사카 동생들을 끝없는 학살로부터 구해내었다. 그러나 액셀러레이터가 그대로 지옥에 빠질 정도로 작가는 무자비하지 않았다. 이후에 그는 '라스트 오더'라는 미사카 네트워크의 총괄 명령command자를 만남에 따라 다시금 구원의 기회를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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