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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preintes du beau rêve

인상 #4 본문

etc.

인상 #4

barde 2013. 4. 22. 23:28


사진 출처는 여기


“고양이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


새벽 네온사인으로 가득한 이름이 붙은 골목을 걸으며 나는 몇 명의 사람들과 아직까지 불이 켜져 있는 주점과 골목길 사이를 누비는 택시와 그 속에 앉아 있는 택시기사의 얼굴을 보았다. 그 얼굴은 분명 고단함에 지친 얼굴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뭐였을까? 새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봄이 온다는 걸 알리기라도 하듯 쌀쌀하지 않았고 서늘한 바람이 가끔 다리에 불어오는 정도였다. 고픈 배가 뇌에 신호를 보냈다. 무언가를 먹고 싶다는 마음이 떡볶이집이나 주점을 지날 때마다 들었다. 하지만 의사의 한 마디에 마음은 수면 아래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결국 나는 잔고를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만족감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소설에 너무 자신이 드러나잖아, 좀 더 여우같이 글을 쓰는 게 어때?”라고 K로부터 말을 들었을 때는 이미 레테의 강을 건넌 이후였다. 인간이 다시 태어나면 여우나 고양이가 될 수 있을까? 성불하면 극락세계로 간다는 두 종교의 밀회에서 태어난 것 같은 이야기가 있다. 나는 여기서 극락세계를 현세로 바꾸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인간이란 고양이로 다시 태어나기만 해도 만족하고 일생을 보내야 마땅한 존재가 아닌가? 라는 의문을 품은 채. 하지만 고양이는 그리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터키나 일본에서 태어났다면 만족스런 한생을 보내겠지만, 나머지 나라에서는 고양이의 손이라도 거들떠 보지 않을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검은 고양이는 맥주를 파는 가게 앞에 앉아 있었고 회색인가 노란 고양이는 벽돌로 쌓은 화단 위에 올라앉아 있다가 어느새 구석 너머로 사라졌다. 내가 한 걸음 다가가자 검은 고양이는 벌떡 일어나더니 왼쪽으로 타박타박 걸어가며 내 눈치를 보았다. 나는 고양이를 찍으려고 사진기를 들고 조심스레 고양이에게로 다가갔는데, 역시나, 눈치가 빠른 고양이는 내가 일정 거리 이내로 진입하자마자 바로 그 날렵한 몸을 쭉 빼고는 털을 곤두세웠다. 몇 장 찍긴 했지만 밤이라 제대로 담겼는지 알지 못한 채로 나는 가게 앞을 돌아서 나왔다. 바로 옆에는 저렴한 물건—종류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을 파는 구멍가게를 할아버지 한 분이 보고 있었다.


“동학”이라는 이름이 붙은 주점 앞을 걷고 있을 때였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건물 안쪽에서 음악 소리가 작게 들려오고 있었다. 건물 입구는 한눈에 봐선 보이지 않았는데, 세로로 세운 간판 바로 옆에 龍라는 한자가 적힌 나무로 짜인 낡아 보이는 대문이 있었다. 아무래도 그곳으로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주점은 골목의 끝, 그러니까 주점이 늘어서 있는 거리와 원룸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골목 사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골목의 끝에서 거리를 바라보면 건물을 둘러친 화려한 네온사인의 치장이 보였다. 지난 세월의 촌스러움을 드러내는 데코였지만, 지금까지 살아남아 새벽을 밝힐 수 있었다. 나는 살아남은 양식과 안식처에 대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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