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mpreintes du beau rêve
자신의 공간을 가지지 못한 자들 본문
자신의 공간이 없는 청춘들은 공간을 ‘빌리기’ 위해 카페로 향할 수밖에 없다. 나도 사정은 마찬가지라, 책을 읽기 위해서나 글을 쓰기 위해서나 그것도 아니면 단지 시간을 죽이기 위해, 카페에 들러 음료를 하나 사서 자리에 앉아 있는다. 보통 앉아 있으면 짧으면 30분 정도, 길면 2시간 정도 시간을 보낸다. 책을 하나 들고 가기는 하지만, 집중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건 절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신경을 건드리는 사람들 때문이다. 그리고 앞에서 ‘글을 쓰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실은 과제가 아니면 글을 쓰기 위해 카페를 찾지는 않는다. ‘절대적 안정’이 없으면, 나는 한 자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나를 까다롭다고 매도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정당하다. 하지만 그건 다른 얘기고, 지금부터 할 얘기는 ‘공간’에 관한 것이다.
왜 인간에게 주어지는 공간은 한정되어 있을까? 이 질문은 대답하기 쉽다. 사람은 많은데 공간은 유한하기 때문이다. 그럼 다른 질문. 한 인간에게 충분한 공간은 어느 정도일까? 어떤 사람은 세 평 정도면 충분히 살 수 있다고 대답한다. 다른 사람은 적어도 열 평은 되어야 뭘 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가족이 있으면 서른 평 정도는 있어야 충돌 없이 살 수 있다. 각자마다, 필요로 하는 공간의 넓이는 다르다. 하지만 제대로 자신이 필요로 하는 ‘공간’을 부여받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대부분은 누워 잘 곳 외에 공간을 부여받지 못하고, 극히 일부만이 분에 넘치는 공간에서 생활한다. 그래서 자신의 공간이 없는 사람들은 공간을 ‘빌리기’ 위해 비싼 커피값을 감당하면서 카페로 가거나 도서관으로 간다. 공간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빌리는’ 것이다.
자신의 ‘공간’이 중요한 이유는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우선 공간이 있어야 뭐라도 할 수 있다. 이야기를 하든, 의논을 나누든, 작업을 하든, 글을 쓰든, 공간이 없으면 이 모든 것은 불가능해진다. 그리고 자신의 공간에 타인이 침입하는 것은 협업을 제외하고는 방해가 될 뿐이다. 다른 사람의 방해가 없는, 조용한 공간이 요구된다. 여기에는 카페 같은 소란스러운 공간은 적절하지 않다. 그러나 혼자 뭘 하고 싶은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빌릴 수 있는 공간조차 없기 때문에 카페로 향한다. 위에서 내가 말한 것처럼, 카페에서 무언가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 기껏해야 독서나 할 수 있을 뿐이다. 타인은 지옥이라고 사르트르는 말했다. 모두가 의도치 않게 다른 이의 지옥이 된다. 여기에 안정과 정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상대방을 지옥으로 매도하는 것은 나 또한 지옥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언제나 적절하지 않은 때에 적절하지 않은 공간에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은, 소란스러움을 감내하거나 찜통 같은 방 안에서 인내심을 기를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 청춘들에게 필요한 것은 격려나 희망 따위가 아니라 자유롭게 유용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다. 출발선에 자리를 잡지 않으면, 달리기를 시작할 수조차 없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고 단테는 말했지만, 나는 이 말을 조금 바꿔서 말하고 싶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공간과 시간을 제공하지 않은 자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
부디 그리 되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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