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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preintes du beau rêve

<돌아가는 펭귄드럼> 리뷰 본문

etc.

<돌아가는 펭귄드럼> 리뷰

barde 2013. 8. 26. 09:27





1. 들어가며


<돌아가는 펭귄드럼(輪るピングドラム)>은 기묘한 애니메이션이다. 어쩌면 '이상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이 애니메이션은 은유와 상징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펭귄이 나온다, 알 수 없는 범죄집단이 나온다, 테러가 벌어진다, 그리고 죽을 병에 걸린 소녀는 펭귄 모자를 쓰고는 갑자기 변신해서 생명을 되찾는다. 여기서 나열한 몇 가지 사건은 순서대로 나열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정도만 가지고도 이 애니메이션을 ‘기묘하다’고 말하기에는 충분할 것 같다. 실로 <돌아가는 펭귄드럼>은 기묘하기 그지없다. 어째서 이런 애니메이션이 2011년에 등장한 것일까? 질문이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바꿔서, 애니메이션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2. 죄를 짊어진 아이들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주로 네 명이다. 고등학생인 칸바, 쇼우마, 둘보다 약간 어린 여동생 히마리, 그리고 히마리의 친구 오기노메 링고다. 칸바와 쇼우마는 여동생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펭귄 모자를 쓰고 여동생이 다시 살아나기는 했지만, 그녀가 갑자기 변신해서는 “펭드럼을 찾아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 ‘펭드럼’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 채 둘은 끊임없이 같은 자리에 되돌아온다. 변신한 히마리는 새디스틱한 여성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중에 더블 H가 등장하는 것에서 잘 알 수 있듯, 그 모습은 히마리가 바라던 ‘우타히메歌姫’의 모습이었다. 히마리는 꿈에서나마 자신의 ‘꿈’을 이룬다.


오기노메는 언니 모모카의 일기를 ‘운명’이 적힌 일기라고 생각하며 망상에 빠져 있는 여고생이다. 그녀는 모모카가 일기에 자신의 ‘운명’을 적었다고 생각하며, 거기에 맞춰 행동하기 위해 선생인 타부키를 괴롭힌다. 그러나 언제나 자신의 꾀에 말려 실패하고 만다. 쇼우마는 ‘펭드럼’이라고 생각되는 모모카의 일기를 얻기 위해 오기노메 옆에 붙어 다니지만, 오기노메는 절대 일기를 내 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전반부는 이렇듯 개인간의 갈등이 두드러진다. 일기를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사랑’을 이루고자 하는 소녀,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펭드럼을 찾는 형제, 그리고 뜬금없이 공주님으로 변신하기만 하는 착한 여동생.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개인간의 갈등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은 갑자기 ‘공적인 사건’의 위치로 올라선다. 알고 보니 쇼우마와 칸바, 히마리의 부모는 테러를 저지른 집단의 간부였다. 그리고 오기노메의 언니 모모카는 ‘16년 전의 테러’로 목숨을 잃었다. 추가로 등장하는 두 어른도 실은 모모카의 절친한 친구였다. 개인들은 혼자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운명의 무게에 괴로워한다. 쇼우마는 자신이 ‘저주받았다’고 말한다. 오기노메는 실은 자신이 타부키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타부키와 유리는 모모카와의 즐거웠던 과거를 회상한다. 죄를 지은 사람은 사라지고, 죄를 짊어지고 괴로워하는 사람만이 존재한다.



3. 달콤한 악(悪), 사과(링고)


그러다 갑자기 ‘사네토시’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의사가 등장한다. 그는 ‘약’으로 여동생을 살릴 수 있다고 말하면서, 칸바에게 혼자 힘으로 감당하기 힘든 돈을 요구한다. 그런데 어쩐 일일까, 칸바는 순순히 돈을 마련해 온다. 여동생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사네토시를 따라다니는 검은 토끼 두 마리는 토끼였다가 소년으로 변신했다가 한다. 사네토시를 진짜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검은 토끼도 알 수 없는 존재로 남을 뿐이다. 그렇다, 사네토시는 사실 ‘유령’이었다. 16년 전에 집행한 테러를 실패한 원한이 서린 혼. 칸바는 슬프게도 거기에 말려들고 만다. 가장 소중한 존재인 ‘여동생’을 살리기 위해.


화가 흐르면 흐를수록 충격적인 사실은 계속 밝혀지지만, 반대로 시청자들은 가면 갈수록 의문에 빠질 따름이다. 그래서 ‘사과’가 의미하는 게 뭐냐? 펭귄은 대체 왜 등장하는 거냐? 테러집단은 ‘옴진리교’를 말하는 건가? ‘펭드럼’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거냐? 애니메이션은 마지막 화에서도 그 비밀을 전부 밝히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관객의 ‘질문’으로 남겨둘 뿐이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16년 전의 ‘테러’란 바로 일본 열도를 나쁜 의미로 전율케 했던 ‘옴진리교 사린가스 살포사건’을 말한다. 이것은 일본인에게 커다란 상흔trauma으로 남았다. 끊임없이 같은 자리로 16년 전의 ‘외상’은 되돌아온다. 외상은 본성상 강박적이라, 끊임없이 거기에 속한 인물을 괴롭힌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살아서 숨을 쉬는 모든 인물은 무력하다.


그런데 ‘사과’는 대체 무엇일까? 언뜻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를 떠올리게 한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브와 함께 에덴동산에서 쫓겨난다. 여기서 ‘인간의 역사’가 시작했다고 성경은 말한다. 만약 ‘사과’가 선악과라고 한다면, 사네토시는 뱀이 되고 선악과를 나눠 먹은 칸바와 쇼우마는 죄 지은 자들이 된다. 하지만 칸바와 쇼우마는 죄를 ‘지은’ 게 아니라, 죄를 ‘물려받은’ 것뿐이다. 여기에 중요한 차이가 있다. 죄를 ‘짓고’ 사라진 자는 반성할 수 없다. 하지만 죄를 ‘물려받은’ 자는 그에 대해 반성할 수 있다. 칸바는 결국 사네토시의 꾐에 말려들어 범죄집단에 가담한다. 쇼우마는 그런 칸바에게 분노를 느낀다. 부모의 죄를 알고 그럴 수는 없다, 쇼우마는 말한다. 마지막에, 둘은 함께 죄의 과실을 나눠받아 산화한다. “운명의 과실을 함께 먹자!”



4. 운명이 도달하는 곳


이 작품에서 선과 악은 태극무늬처럼 섞이면서 명확히 분별되지 않는다. 형제의 부모나 사네토시 같은 사람들은 다만 좋지 않은 때에 좋지 않은 장소에 있었을 따름이다. 스피노자는 말한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태어났다면, 또는 자유롭게 살아가는 한 선과 악에 관한 어떤 개념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각주:1]” 악은 사물 자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악은 다만 다른 것과 맺는 관계 속에 존재할 뿐이다. 그 자체로 악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신이 악이라고 알지 못하고 행하더라도 죄는 분명히 남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죄’를 짊어지는 사람도 함께 존재한다. 누군가는 반드시 죄에 책임을 져야 한다. 소중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외상을 안고 살아가기 위해서.


[운명이 도달하는 곳運命の至る場所]이라는 23화의 부제는 가혹한 문장이다. 운명이 도달하는 곳이 죽음이라면, 그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돌아가는 펭귄드럼>은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칸바와 쇼우마는 결국 죽음을 택한다. 히마리와 링고는 두 사람이 없는 세계에서 함께,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간다. “운명을 갈아탄다”는 말은 곧, “운명을 뒤바꾼다”는 말이다. 같이 살았던 사람의 흔적과 존재가 깔끔하게 사라진 낯선 세계. 히마리는 기억에 없는 곰인형에 남겨진 쇼우마의 쪽지를 보고 이유도 모른 채 펑펑 눈물을 흘린다. 그 낯선 세계는, 사라진 사람을 생각하면 쓸쓸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어찌할 바가 있는가, 남겨진 자는 자신을 위해 사라진 자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을.

  1. 『에티카』, 4부, 명제 4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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