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mpreintes du beau rêve
<바람이 분다> - 그 모든 말들의 한가운데에서 본문
하나의 ‘짜증’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이자 마지막 작품 <바람이 분다>가 개봉하기 전에, 사람들은 이번에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어떤 ‘꿈’을 우리에게 보여줄지 잔뜩 기대했다. 그리고 영화가 ‘제로센’의 설계자 호리코시 지로를 다루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마자, 한국에서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양분되었다. 하나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비행기(밀리터리)’와 ‘평화주의’ 둘 중에 결국 전자를 택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일단 영화가 개봉하기 전까지 말을 삼가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영화 예고편이 유투브에 공개되었을 때 전자의 반응은 극에 달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극우’라는 말부터 시작해서-정작 미야자키 하야오는 2ch 등에서 ‘재일’이라고 까이는 형편인데도 불구하고-, 전쟁을 미화했다느니, ‘일본인’이라 어쩔 수 없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리고 후자는 그에 맞서 영화가 9월 5일 한국에서 개봉하기 전까지 침묵을 지켰다. 침묵을 ‘지킨 것처럼 보인다’ - 왜냐면 이들의 반응은 거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가 한국에 개봉했을 때, 미야자키 하야오를 옹호하는 사람은 소수로 줄어들었다. 영화가 ‘다루고자 하는 바’가 명확했기 때문이다. 이제 더이상 미야자키 감독의 ‘순수’를 믿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그의 진심을 보았다고 한목소리로 말하고, 또는 외치고 있었다.
나는 둘 사이에서 계속 짜증이 난 채로 있었다. 처음에 <바람이 분다風立ちぬ>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부터,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뭔가 ‘다른 꿈’을 그릴 것임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게 무엇인지 잘 몰랐다. 나중에 일본에서 개봉하고 난 뒤에 간략한 소개가 나오고 나서야, 영화의 줄거리를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었고, 정작 영화에 대해 ‘제대로 알았다’는 마음이 든 것은 두 번째로 극장에서 風立ちぬ를 보고 나서였다. 그리고 여전히 짜증이 난 채로 누군지도 모를 ‘군중’들을 향해 악다구니를 쓰는 트윗을 몇십 개 가량 했고,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지금 이런 글을 쓰고 있다. 아니, 지금은 오히려 ‘분이 풀리지 않았다’기보다 그냥 ‘답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나 역시 초중고 12년간 역사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교육’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피해국의 입장에서 볼 때 응당 ‘정당한’ 서술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위와 같은 반응을 보였던 것도, 중등교육 의무라는 현실을 생각해 보면 실로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나는 방향을 약간 바꿔서, 風立ちぬ라는 ‘작품’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작품을 보고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을 말하기로 했다. 이 편이 긴 글을 쓰는 데도 낫고, 내 건강을 위해서도 훨씬 좋은 길이다.
왜 지로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나
처음에 의문이 들었던 것은 마지막 신에서 지로가 전쟁의 포화 앞에서 ‘멈춘’ 것이었다. 왜 지로는 거기서 멈출 수밖에 없었을까, 영화관을 나오면서 내가 처음으로 생각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지로는 분명 ‘더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었다. 나호코의 유령을 보고 지로는 고맙다는 말을 한다. 그리고 카프로니의 초대를 받아 와인을 마시러 내려간다. 영화는 여기서 끝이 난다. 감동적인 결말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어딘가 머리를 간지럽히는 부분이 존재한다. 지로는 왜 멈출 수밖에 없었을까. 하지만 영화를 두 번째로 보고 나서 나는 이것이 하나의 ‘착각’임을 깨달았다. 지로는 거기서 ‘멈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멈춘 것은 참혹한 전쟁을 겪었던 7500만 명의 일본인이라고 말해야 한다. 따라서 지로 혼자가 멈춘 것이 아니라, 제로센이 포화 속으로 사라지면서 7500만 일본인이 한때의 ‘꿈’에서 깨어나 버렸다. 그들은 강대국과 마주한 ‘현실’을 깨닫고 만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프로이트를 인용해 ‘꿈’은 계속해서 반복(반복강박)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 ‘꿈’을 말하고 싶다고도 덧붙였다. 그러나 그는 <일반의지 2.0>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더 이상 꿈에 매력을 느끼지 못해서 수정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지진 이후에 필자는 꿈을 꿈으로 솔직히 이야기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고쳐 쓰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 책은 지진 전의 필자만이 쓸 수 있는 책이었다.”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참혹한 미증유의 재난을 겪고 나서 아즈마는, “꿈을 꿈으로 솔직히 이야기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솔직한 표현으로 보인다. ‘꿈’이 대지진이라는 인간의 무력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재난, 재앙 앞에서 순식간에 증발해 버린 이상, 아즈마는 차마 ‘일반의지 2.0‘이라는 자신의 ‘꿈’을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갑자기 현실로 돌아와서 피해를 입은 곳을 돕고, 서로 함께 살아갈 길을 찾으며, 더불어 자신이 있을 ‘위치’도 재점검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꿈’이 있을 곳은 당분간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아즈마는 그러한 사실을 깨닫고 <일반의지 2.0>을 수정하지 않았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다시 <바람이 분다>로 돌아와서, 나는 지로가 ‘멈추었다고’ 보인 것은 착각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멈춘 것은 7500만 명의 일본인이라고도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작중 지로가 ‘머뭇거린’ 모습은 기억에 남는다. 중후반에 지로는 토마스 만의 소설 <마의 산>을 연상케 하는 산 속 호텔로 요양을 떠난다. 그곳에서 지로는 <마의 산>에서 이름을 따 온 카스토프라는 독일인을 만난다. 그는 지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중국과 한 전쟁을 잊어요. 만주국 건설을 잊어요. 국제연맹 탈퇴를 잊어요. 세계를 적으로 돌린 것도 잊어요. 일본은 파멸합니다. 독일도 파멸합니다.”
뒤에 그는 담배연기만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 버리지만, 지로는 그를 잊지 않는다. 그가 한 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스스로 일으킨 전쟁으로 일본과 함께 독일도 망한다는 것이다. 지로는 그곳에서 근심걱정을 잊으려 했지만, 과연 자신이 전투기를 설계하는 입장에서 완전히 ‘잊을’ 수 있었을까? 그러므로 여기서 ‘잊으라’는 말은 반대의 의미를 띠게 된다. 정말로 그러한 사실들을 ‘잊으라’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산 속 호텔’이라는 공간에서만 현실을 회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로는 끊임없이 전쟁으로 파멸하는 나라의 모습을 본다. 그것은 그를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니 그 이후로도 계속 괴롭혀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호코는 지로에게 “살아가”라고 말한다. 간절히, 애절한 마음을 담아 말한다. 전쟁 이전의 지로에게 ‘멈춤’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는 끊임없이 전투기를 설계하고, 또 설계하는 수밖에 없었다. ‘시대라는 바람’이 그를 거기까지 내몰아 왔다. 우리는 지로의 그러한 ‘위치’를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지로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못한다. 그는 끝끝내 살아 나갔기 때문이다.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이것’을 말하고자 했다고 믿는다. 살아야 하는데, 어떠한 합당한 이유도 없다. 그러나, 우선 살지 않으면, 어떠한 것도 불가능해지고 만다. 모든 가능성은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것은 허무 그 자체다.
그 모든 말들의 한가운데에서
다시 작품 밖의 ‘나’로 돌아와서, 이곳에서 나는 수많은 ‘말’들을 본다. 그 중에 어떤 말들은 언어에 대한 세심한 고려가 들어가 있으며, 다른 말들은 전혀 그러한 고려가 담겨 있지 않은, 무신경하기 그지없는 말이다. 모두가 말할 자유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말’들은 제각기 평등한 위치에서 동등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 진정으로 ‘가치 있는’ 말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어떤 때는 백 마디, 천 마디 말보다 한 편의 영화가 더 많은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유작이 될 <바람이 분다>는, ‘명작’이라고 말하기에 주저함이 없다. 지브리를 좋아한다면,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한 거장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라도, <바람이 분다>를 반드시 보아야 한다. 일본의 대문호 나츠메 소세키의 <마음>에는 이러한 구절이 나온다.
“나는 과거의 한 사건을 계기로 사람을 믿지 않게 되었네. 자네도 예외가 아니었지. 하지만 더 이상 자네만큼은 의심하고 싶지 않네. 자넨 거짓을 말하기에는 너무 단순한 사람이거든. 나는 죽기 전까지 이 세상에 단 한 명이라도 좋으니 마음 놓고 흉금을 터 놓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 자네가 그 단 한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되어줄 수 있겠는가? 자네는 스스로 양심에 한 점 거리낄 것 없는 진실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위와 같은 질문을 미야자키 감독은 <바람이 분다>라는, 혼신을 기울여 그려낸 작품을 통해 던진다. 여기에 진심으로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적어도 한국에는 아주 드물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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