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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preintes du beau rêve

세상에 빛을 본문

novel

세상에 빛을

barde 2013. 10. 27. 11:41



그녀는 마법사였다, 이 세계가 아닌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로부터 온 마법사였다. 마법사임에 분명했다, 그녀는. 그리고 나는 평범한 소년이자 학생이었다. 나는 그녀를 위해 말한다. 그녀는 나를 위해 말한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말한다. “마법사여, 세상에 빛을!”


17살의 여름, 이라고 적으면 어딘가 아쉽고 그리운 느낌을 주지만, 그 당시 나는 하루라도 빨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싶어서 혈안이 되어 있었다. 지정석인 창가 바로 옆자리에 앉아서 턱을 괴고 바깥을 멍하니 내다보고 있자면, 달리는 또래의 학생이라든가 열심히 호루라기를 불고 있는 체육선생이 보이는 운동장이 바로 앞에 드넓게 펼쳐져 있고, 그 뒤로 얇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둔 채 주택가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다니는 학교는 저 집들에 사는 평범한 고등학생들이 오는 학교는 아니었다. 무언가 ‘특수한 목적’을 띠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도 그 ‘목적’이 뭔지를 알지 못하는, 혹은 다른 목적을 아주 잘 알고 있는 평범하지 않은 고등학교였다. 거기서 ‘그녀’는 돋보이는 존재였다. 언제나 가운데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아니면 앞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존재감은 깊었다. 교실에서는 여자들 몇 명이 서로 무리지어 제각기 쓸모없는 화제에 대해 열심히 떠들고 있었지만, 오직 그녀만은 의자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아서 주위의 모든 소리를 차단하기라도 한 것처럼 가만히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같은 학급의 누구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가장 자존감이 강하다는 반장-그녀는 내년에 학생회장을 노리고 있었다-조차도.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정말 이상할지도 모른다. 나도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를 설득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나는 중간에 ‘사라질’ 운명일지도 모르지만. 어느날 그녀는 갑자기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손에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번역본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책을 내게 빌려주었다.


“재밌었어. 내용은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래? 너라면 분명 ‘재밌다’는 말을 할 줄 알고 빌려줬던 거야. 다행이네. 다른 책도 빌려줄까?”

“아니, 응, 그러고 싶다면 언제든지. 그런데 왜 하필이면 내게?”

“글쎄? 네가 책을 집중해서 읽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보았으니까.”

“정말? 그랬나, 내가.”

기억을 되새겨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심심할 때면 창가 바로 옆자리에 앉아서 문고본을 꺼내들고 시간을 죽였다. 수업시간에는 차마 용기 있게 그런 짓을 하지는 못했지만, 쉬는 시간이 되면 열에 여섯은 어김없이 책을 꺼내서 느긋하게 읽어 내렸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 지나면 책 한 권을 다 읽게 된다. 그래서 나는 한 달에 책 네 권을 읽을 수 있었다. 공부에 치이는 고등학생에게는 꽤나 많은 양이었다. 그녀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지나지 않지만.

“그랬어. 혼요미 군은 말이지, 언제나 책을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는 책장을 넘기며 쏟아지는 햇살을 받고 있었으니까. 내가 언제나 지켜보고 있었거든, 혼요미 군을.”

그러고 보면 내 이름이 ‘혼요미’ 였던 것 같기도 하다.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남자 이름으로는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왜 남자 이름과 여자 이름을 나누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건 어쩌면 부모나 선생도 잘 모르지 않을까? 그때 나는 그녀의 이름을 아직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에게 이름을 물어보는 것도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내 이름을 알고 있는데, 내가 그녀의 이름을 모른다는 게 그녀에게 있어서 얼마나 불편한 일일까.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그녀는 바로 그녀의 이름을 말했다.

“안녕. 내 이름은 제인 아스마일이라고 해. 제인이라고 불러줘.”

“응, 안녕 제인. 제인은 좋은 이름이구나. 가타가나로 “ジェイン” 이라고 쓰는 거야? 아니면 혹시 읽는 법이 따로 있는 거니?”

“아니, 제인ジェイン이라고 쓰든 젠ジェーン이라고 쓰든 그건 네 마음이야. 어차피 ‘읽는 법’은 같으니까. 그리고 나는 동아시아에서 태어나지 않아서 한자 이름을 안 써. 미안, 혼요미 군.”

“아니 아니, 미안할 건 없으니까. 다시 한번, 책을 빌려줘서 고마워. 혹시 도서관에도 자주 들르니? 본 적은 없지만.”

“도서관은 가끔 들르긴 해. 나는 책을 사서 읽기 때문에 도서관에 갈 일이 별로 없지만. 가끔 구할 수 없는 책이 있거든. 예외적인 경우야. 혼요미 군은 도서관에 자주 들러?”

“아니... 나도 그다지 자주 들른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음. 책을 ‘좋아한다’고 해서 혹시나 하고. 그렇구나, 직접 사서 읽는구나.”

“하하, 혼요미 군은 재밌어. 좋아, 우리 친구友達가 되자. 친구가 되면 즐거울 일이 많을 거야. 같이 하교도 하고, 책도 같이 읽고, 밥도 같이 먹고... 그런 게 ‘친구’가 하는 일이 아닐까? 혼요미 군은 혹시 친구 있어?”

“응,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나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중학교 때 사귀던 친구를 몇 명 잃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연락하는 친구들이 두셋 정도는 있었다. 그러나 그들과는 자주 만나지 못했는데, 서로 멀리 떨어져 지내고 있기도 하고 다들 공부 때문에 바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 중에서 가장 바쁘다고 할 수 있었다. 왜냐면 조기졸업을 하기 위해 수업을 남들의 1.5배 정도로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해서 내가 도서관에 가는 것은 주로 책을 읽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는 학생은 나 말고도 몇 명 있었지만, 책을 읽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거기서 그녀를 본 적은 없었다.

“있긴 있어, 그런데 자주 만나지는 못해. 다들 바쁘거든.”

“헤에, 그렇구나. 나도 친구가 없어서 새 친구를 구하던 참이었거든. 마침 혼요미 군이 있어서 다행이었어. 혼요미 군도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 같았으니까. 그게 누굴까?”

“부끄러워, 그런 말을 들으면. 딱히 그리워하는 사람은 없어. ...아니, 한 명 있기는 하지만.”

“그래? 그 얘기도 듣고 싶은데, 같이 하교할 때까지 미루어 둘까? 혼요미 군은 어때? 괜찮아?”

“좋아. 여자하고 같이 하교한다고... 아니, 방금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해줘. 이상하네,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오니.”

“응, 뭐가? 그럼 좋아. 같이 하교하자.”

그녀는 즐거운 듯이 말하고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뒤에서 그녀가 의자에 앉는 모습을, 책상에서 교과서를 꺼내 펼치는 연속되는 동작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그녀는 보랏빛이 도는 긴 생머리를 하고 있었다. 오후의 햇빛이 느슨하게 비춰 들어와 연보라색에 가까웠다. 순간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빗질하고 싶다는 욕망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와의 하교를 위해 잠시 마음 속에 짓눌러 두었다. 이제 막 여섯 번째 수업이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수업이 전부 끝나서 나서, 나는 그녀와 함께 교문을 지나 하교할 수 있었다. 여기에 특별한 의미는 없으리라 믿는다. 특별한 의미가 생긴다면, 분명 그것은 한때의 ‘아련한 추억’으로나 남아 먼 세월을 지나쳐 끊임없이 나를 번뇌케 할 것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나는 왜 지금 새삼스레 이런 ‘말’을 하고 있을까. 그녀는 내 옆에서 고개를 아주 살짝 숙이고 걷고 있었다. 어디를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매고 있는 얆은 빨간색 리본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리본은 진자처럼 주기를 띠고 좌우로 느리게 흔들렸다. 그것은 그녀의 걸음과 보조를 맞추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리본은 오른쪽으로 움직이고, 다시 한 걸음 내딛으면 리본은 왼쪽으로 움직였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 그녀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나는 당황했다.

“뭘 그렇게 뚫어져라 보고 있는 거야, 혼요미 군? 설마 가슴을 보는 건 아니겠지, 후후.”

“아냐, 아냐. 리본을 보고 있었어. 흔들리는 게 재밌어서.”

“흔들리는 게? 헤헤, 역시 혼요미 군은 재밌어. 리본이 흔들리는 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니. 그런 건 고등학생이라면 누구도 하지 않는다구. 다들 앞만 보고 달리느라 바쁘거든.”

“나도 바쁜 건 마찬가지야. 하지만... 지금 리본을 봐 두지 않으면 나중에는 보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잘 모르겠어. 그런데 리본이 중요하지 않으면 어떤 게 ‘중요한’ 걸까? 봐, 리본은 옷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잖아. 그렇지 않니?”

“글쎄. 리본은 실용적인 용도는 거의 없으니까. 나비넥타이도 마찬가지고. 장식을 위해서 다는 게 아닐까?”

“아냐, 그렇지 않아. 리본은 중요해. 내 생각에는 리본은 목걸이와 같다고 생각해. 목걸이는 중요하니까, 리본도 마찬가지로 중요해. 으으, 왜 몰라주는 걸까.”

내가 한숨을 쉬자 그녀는 몸을 90도 돌려서는 내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강하게 말했다.

“아니야! 혼요미 군의 마음은 잘 알고 있어. 누구보다도 내가. 하지만 여기엔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어려운 부분이 있어. 어려운 지점이라고 할까, 리본에 대해서는 그래.”

“맞아, 말로 하려면 너무 어려운 것 같아. 실제로 말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는데, 사람들은 입으로 하는 ‘말’에 너무 의지하지.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라고는 하지만.”

“그래, 혼요미 군. 이러면 어떨까? 네가 리본을 그림으로 그리는 거야. 그러면 너도 거기에 대해 조금은 더 나은 ‘전망’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말로만 하는 것과 그림으로 그리는 건 다르잖아? 그림은 어때, 잘 그려?”

“아니, 잘 그리는 편은 아냐. 하지만 리본 정도는 어떻게든 그릴 수 있어.”

“좋아. 그럼 내일까지 리본을 그려서 내게 보여줘. 거기서부터 시작하자.”

말을 마치자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마주한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가야 한다면서 손을 흔들고 사라졌다. 나는 그녀의 연보랏빛 머리칼을 더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지만, 그것도 같이 그림으로 그리자는 생각을 하고 앞으로 쭉 걸어갔다. 앞으로 쭉 가다보면 내가 사는 집이 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나는 내 성姓이 적힌 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집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누군가 있는 모양이었다. 맛있는 저녁을 기대하면서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녁을 ‘여느 날과 같이’ 가족과 함께 먹고-메뉴는 메로구이였다. 나는 메로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가장 좋아하지는 않지만-, 나의 방에 들어가서 우선 내가 한 일은 색연필과 스케치북을 꺼내는 일이었다. 스케치북을 펼쳐서 비어 있는 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은 다른 친구들과 비교했을 때 잘 그리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리본 정도는 바르게 그릴 수 있었다. 그녀가 매고 있던 리본이 빨간색이었기 때문에, 나는 샤프로 테두리 선을 딴 뒤에 색연필을 이용해 안을 빨강으로 채웠다. 리본을 다 그리고 나서 그녀의 작은 얼굴을 그리고, 그리고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올이 굵은 편이 아니라 바람에 살랑살랑 흩날리는 정도였으므로, 나는 샤프를 이용해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머리카락을 그렸다. 살랑살랑, 사각사각. 그림을 그리고 있자니 밖에서 바람에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그녀의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소리라고 생각하자니, 그림을 그리는 나의 손도 어느새 빨라져 있었다. 다 그리고 보라색 색연필로 ‘힘을 주지 않고’ 색을 더해갔다. 이윽고 스케치북에는 그녀의 상반신이 나타나 있었다. 나는 무척 행복했고, 행복한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스케치북을 품에 안고 잤다. 그날 밤에는 아무 꿈도 꾸지 않고 편하게 잠들 수 있었다.


“혼요미 군, 그림은 다 그렸어?”

“응. 그렇게 잘 그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봐 준다면.”

“보여줘. 사실 나 어제, 혼요미 군 생각을 했거든. 혼요미 군이 그림을 그리는 생각을 했어. 리본을 그리고 내 얼굴을 조심스레 그리던 모습을...”

나는 그녀의 말에 놀랐다. 그녀는 내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본 것도 아닌데, 어떻게 리본을 그리고 얼굴을 그렸다는 사실을 알까. 혹시 그녀에게는 텔레파시를 감지하는 능력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나는 그녀 앞에서 더욱 주의할 것을 다짐했다.

“자, 여기. 원한다면 뜯어서 가져가도 좋아. 네 그림이니까.”

“고마워.”

그녀는 내 스케치북을 받아서 한장 한장 넘기며 자신이 그려져 있는 페이지를 찾는다. 나는 의자에 가만히 앉아서, 그녀가 자신이 그려진 장을 주의깊게 보고 있는 것을 지켜본다. 그녀는 눈동자를 한곳에 고정시키고 말이 없다. 갈수록 초조한 마음이 들어서, 나는 손가락을 나무책상에 규칙적으로 두드리며 그녀가 빨리 그림을 보고 스케치북을 내게 돌려주기를 바란다.

“잘 봤어. 혼요미 군, 이건 네가 가지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여기서 뭔가 더 ‘나올 게’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그 날의 공기라든가, 흘러넘치는 빛이라든가, 있잖아? 혼요미 군은 나를 잘 그렸으니까, 공기나 빛도 충분히 그려낼 수 있을 거야. 그럼 기대할게!”

곧 수업종이 울렸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자리-교실의 정가운데-로 돌아갔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가 의자에 앉는 모습을 바라보며 뭔가 설명하기 힘든 아쉬움을 느낀다. 그녀는 늘 그랬던 대로 교과서를 꺼내서 정확한 페이지를 펼친다. 나도 다시 고개를 원위치로 돌려서 교과서를 펼치고 페이지를 확인해 본다. 여기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도 모르고, 옆에 앉아 있는 이름 없는 여자아이도 모른다. 그런데 왜 그녀에게는 ‘이름’이 없을까. 그녀에게는 ‘제인’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왜 그녀에게는 이름이 주어지지 않은 걸까. 내 이름에서 두 자를 떼서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마음을 옆에 앉아 있는 아이에게 말하지 않은 채, 펼쳐진 교과서에 의미 없는 낙서를 하기 시작한다.


수업이 모두 끝나고,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그녀와 하교를 하게 되었다. 클래스메이트들은 아무도 내가 그녀와 같이 하교하는 모습에 신경쓰지 않는다. 제 갈 길 바쁘다는 듯이 그들은, 두 명이나 세 명으로 무리지어 같이 어딘가로 사라진다. 이 넓은 세계에 단 둘만 남은 느낌이 든다. 그녀는 오늘도 같은 색 리본을 매고 있다. 나는 이제 그녀의 리본이 중요한 이유를 잘 안다. 그녀도 마찬가지로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녀가 말을 걸어온다.

“혼요미 군, 혹시 내가 아까 한 말에 대해 생각해 봤어? 공기, 빛 말야.”

“응... 생각해 봤는데, 그건 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당장 뭘 그릴 수는 없어.”

“그렇겠지. 그런데 혹시 이 말 알아? “멀리 돌아가는 히나””

“갑자기 무슨 소리야? 멀리 돌아가는 히나라니?”

“아니, 그냥 예전에 들었던 말인데, 무슨 뜻인지 몰라서.”

“히나가 멀리 돌아간다는 말이 아닐까? 다른 의미가 있나?”

“모르겠어. 한번 검색해 보는 편이 좋을 것 같아.”

그래서 나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얇고 긴 스마트폰을 꺼내서, 인터넷 앱을 열고 검색하기 시작한다. “멀리 돌아가는 히나” 결과 0건.

“어라? 분명히 있었던 말인데... 이상해.”

“글쎄, 혹시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이를테면 ‘히나’가 아니라 ‘하나’였다든지 하는. 사소한 실수, 종종 하잖아? 나도 그런 적이 몇 번 있어. 제인도 그런 게 아닐까?”

“아냐, 분명히 ‘히나’였어. ‘하나’ 같은 말은 달라. 그건 말의 성질이 다르거든. 성격이라고 해야 하나, 속성이라고 해야 하나, 비슷한 의미로. 다시 검색해 봐. 다른 검색엔진도 있지?”

나는 그녀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하지만 다른 검색엔진에서도 “멀리 돌아가는 히나”는 결과 0였다. 나는 울적한 그녀의 얼굴을 처음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드문 일이었다.

“됐어. 이 세계에서 “멀리 돌아가는 히나”는 없나봐. 아쉽네, 재밌는 말이었는데. 혼요미 군, 배고프지 않아? 우리 저녁이나 먹고 갈까? 아는 잘 하는 식당이 하나 있는데.”

“좋아.”

우리는 사거리에서 방향을 틀어 그녀가 잘 안다는 식당으로 향했다. 해가 점점 낮아지는 늦은 오후였다.


그녀가 나를 안내한 식당은 높이가 낮은, 나무로 지은 오래돼 보이는 곳이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공간은 두 명이 들어가 앉기 좋은 방으로 하나하나 구분되어 있고, 저 끝으로 여러 명이 모여서 대화하기 좋은 넓은 방이 하나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바로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종업원이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안내한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능숙하게 안내를 받아 넓은 방을 제외하고 안쪽에서 두 번째 방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도 그녀를 따라 방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차를 따르는 작은, 미세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때? 좋지? 혼요미 군이라면 분명 좋아해 줄 것 같아서, 예약을 하고 온 거야. 여기는 원래 차를 파는 곳이지만, 예약을 하면 ‘정식’을 먹을 수 있거든. 정말 맛있어. 기대해도 좋아.”

“으응. 차만 마셔도 배가 부를 것 같긴 하지만. 하하.”

그녀는 나를 여기에 데려온 게 내심 기쁜지 물을 따르기도 하고 젓가락을 놓기도 하면서 부산이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라면 뭘 먹든 좋았지만, 그런 말을 그녀 앞에서 주의깊지 않게 내지는 않았다. 그녀, 제인은 크고 반짝이는 두 눈동자에 바로 위에 걸려 있는 등롱의 불빛을 담아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혼요미 군, 나 말이지. 네가 그려준 그림에 대해서 계속 생각해 봤거든, 수업이 끝날 때까지. 혼요미 군이 그려준 거라서 우선 기뻤는데 말야, 기쁨이 가라앉고 나니까 그림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었어. 나를 그렸잖아, 그렇지? 그런데 그 모습은 내가 알고 있는 나의 모습이 아니었던 거야.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은 좀 더 어둡고, 어두침침하고, 음기가 나올 것만 같은 불안정한 모습이었거든. 그런데 혼요미 군의 그림 안에서 나는 밝고, 반짝거리고, 생기가 넘치고, 곧 밝은 웃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어. 그게 나는 너무 신기해서 계속 그림을 생각했던 거야. 아까 공기와 빛 얘기를 하긴 했지만, 혼요미 군의 그림에 그게 없었던 건 아니었어. 오히려 너무 잘 드러나 있어서 이상했던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설명이 이상하지만.”

“잘 알 것 같아, 네가 말한 건. 그림이라... 음. 그럴 수도 있겠지. 나는 너를 앞에서 직접 보고 그림을 그리지 않았으니까, 실제 너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나올 수도 있어. 그게 좋았다면 다행이지만.”

나는 그녀 앞에서 말하는 데에 따른 긴장으로 짧게 말을 마치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아직 차는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도 마찬가지로 물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우리 둘 다 물을 마셨다. 생각해 보면 물은 놀라운 물질이 아닌가. 서로를 이어주기도 하고 반대로 서로를 떼 놓기도 하는 물, 물이란 모순적이면서도 하나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결코 단 하나의 성질을 갖지는 못한다. 아무리 이름으로 제약을 걸어 한 가지 성격으로 귀착시켜 보려 해도, 인간의 실존은 이름을 우습다는 듯 쉽게 벗어나버린다. 내 이름이 ‘혼요미’라고 하지만, 이건 그녀가 내게 붙여준 이름이 아닌가. 나는 그녀에게 “책을 열심히 읽는 남학생”으로 각인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스스로 자신을 ‘제인’이라 이름붙였다. 여기엔 인간의 인식으로는 알 수 없는 우물들이 몇 개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차가 나와서, 우리는 종업원이 따라주는 차를 천천히 마셨다. 정식의 시간은 길었다.

“혼요미 군, 그림 얘기는 재미없지?”

“아냐. 재밌긴 한데,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너무 다른 것 같아. 그림하고 말은. 말은 한정된 사태나 사물밖에 표현할 수 없어. 아무리 단어를 덧붙여 묘사를 하려고 해도, 풍경이나 사물은 금방 말 밖으로 벗어나버리고 말지. 나는 이 ‘말’이라는 데 대단한 회의감을 가지고 있거든. 제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말’이라는 것에 대해서?”

“흠. (하는 소리를 내며 생각하는 표정을 짓는 건 그녀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맞아. 말은 한정적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은 토대를 창조해 내. 여기에 말의 신비로움이 깃들어 있는 게 아닐까? 토대라고 말하지 말고 어떤 틀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나는 여기에 대해 예전에 생각해 보았지만, 결국 현실이라는 것은 말 밖에 있다. 말로 아무리 현실을 묘사해 내려고 해도, 언제 어디서나 현실이 말을 벗어날 ‘구멍’은 존재한다. 말은 수챗구멍 속으로 빠져나가는 현실을 그저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게 말의 한계다.

“말이 틀을 짜 낸다는 건, 반은 동의하지만 나머지 반은 동의할 수 없어. 자, 시를 생각해 보자. 시에서 사용되는 ‘말’은, 분량에 따라 다르지만 한정적이지. 시가 그려내는 작은 세계가 있어. 그건 시의 수만큼이나 무한할 테고. 하지만 나머지는 시를 읽는 독자가 채워 넣어야 해. 시인이 의도한 바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말의 사이사이에는 빈 구멍이 있어. 너도 동의하겠지만, 말의 사이사이를 채워넣는 과정에서 ‘감상’이랄 게 생기지. 감상은 곧 ‘구멍 채우기’에 다름 아닌 거야.”

“맞아, 혼요미 군. 하지만 이런 경우를 생각해 봐. 만약에 네가 소설 속 등장인물이라고 하면, 소설가가 너를 쓰지 않으면 ‘혼요미’라는 존재는 존재하지 않던 게 되잖아? 아니면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어. 네가 어떤 소설을 쓴다고 해 봐. 너는 쓰지 않은 소설의 등장인물을, 그가 참다운 의미에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니?”

한 방 먹은 느낌이었다. 그녀에게는 도무지, 어떻게,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 없다. 그녀가 나를 이곳, 정식을 파는 찻집에 데려온 것도 바로 이를 위해서였다. 그녀는 나의 존재근거, 요컨대 내가 생각함으로 인해 반드시 존재한다는 존재의 제1근거를 허물어버린 것이다. 여기서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그녀는 다음 수를 준비해 두어, 적절한 말로 나를 궁지에 몰아세울 게 틀림없었다. 그녀가 그런 ‘의도’를 가지지 않았다고 너그럽게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나를 세 보 앞서있다. 묵묵히 앉아서 차를 마시는 것밖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곳에서 나는 무력했다.

“왜 그래? 얼굴이 안 좋아 보여.”

누구 때문인데 그래. 나는 그녀의 지금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는 것으로 복수를 만족해야 했다. 머릿속으로 스케치를 끝냈을 때 정식이 나왔다.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는 나는 그녀의 존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젓가락을 들었다. 한 시간이 지나고, 우리는 후식을 먹게 되었다.


“오늘 저녁 먹어서 좋았어. 다음에도 이럴 수 있으면 좋겠네.”

“하하하, 나도 마찬가지로.”

밥값을 그녀가 냈기 때문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밥값을 그녀가 냈다는 데 불만이 있다는 게 아니었다. 이 모든 상황들이 계획되어 있다고 한다면, 내가 그녀의 식사 제의를 거절하고 집에 혼자 돌아가는 일은 불가능했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나는 속절없이 식사에 만족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리본과 얼굴을 길게 보는 것을 즐기면서.

“혼요미 군, 그림은 언제 다시 그릴 생각이야?”

“사실 아까 밥을 먹을 때 생각해 뒀어. 주말에 그리려고. 이번엔 좀 더 크게.”

“와! 얼마나?”

“음... A3 정도 될까? 너무 커도 별로지만.”

“그럼 내가 액자를 살게. 혼요미 군에게 받은 그림을 끼워둘게.”

“뭐, 그럴 것까지야. 잘 그리는 것도 아닌데.”

“아냐! 아까 말했잖아, “너무 잘 드러나 있다”고.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혼요미 군 하나뿐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전혀. 나를 과대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나는 아니거든.”

“헤헤. 여전히 재밌는 소리를 하는구나. 그럼 다음 주에 봐!”

그녀가 손을 흔들며 사라져 간다. 밤이라 연보랏빛 머리카락은 잘 보이지 않는다. 가로등 불빛에 반사된 그녀의 머리카락은 오히려 짙은 보라색이다. 남색같아 보이기도 한다. 나도 화답해 손을 흔들며 그녀가 골목 저 끝까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본다. 집에 돌아가면 끝없는 어둠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일부터 주말이었기 때문에, 나는 공부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바로 잠들었다. 고요하고 침울한 밤이었다.


여기서부터, 그러니까 그녀와 만난 다음 날부터 나의 생활은 180도 뒤바뀌었다. 나는 이제 예전만큼 열심히 공부에 열중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부는 다른 학생들이 하는 정도로만 했다. 그리고 그 대신 그림을 하루에 하나씩은 꼭 그렸다. 모델은 주로 그녀였지만-달리 그릴 만한 상대도 없었으므로-, 그녀를 그리는 게 따분할 때면 공원이나 학교에 스케치북을 들고 앉아서 주위의 모습을 천천히 그렸다. 나는 ‘넓은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넓은 그림은 내게 맞지 않았다. 대신 나는 내 반경 2m 정도에 자리잡은 풍경을, 잘 깎은 연필을 들고 세심히 관찰하면서 그려 나갔다. 어떤 때는 도화지에 나무가 그려졌다. 또 어떤 때는 달리는 사람이나, 움직이는 꽃이나, 바닥에 깔려 있는 낙엽들이 화폭에 자리잡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의 그림은 점점 더 세밀하고 능숙해져, 나중에는 친구에게 콘테스트에 한번 내 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의를 받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 그림을 어딘가에 내지는 않았다. 별로 내키지도 않았고, 누군가를 위해, 혹은 보상을 위해 그림을 그린다는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그림을 봐 줄 사람은 그녀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적어도 그 때는 그랬다. 방학을 맞이하고, 해는 길어졌다가 점차 짧아지기 시작했다. 이제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다. 추운 가을이.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었던 건 가을학기가 시작하고 사흘이 지나서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개학일과 그 다음 날에 학교에 등교하지 않았다. 선생도 그 이유를 잘 모르는 눈치였다. 반 아이들은 물론 그녀의 거취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내 옆자리에 앉은 아이에게 혹시 이유를 물어볼까 하다가, 곧 그만두었다. 그녀라고 제인이 왜 학교에 오지 않는지 알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틀간의 걱정을 훅 불어서 날려 보내기라도 하듯, 그녀는 경쾌한 모습으로 등교했다. 나는 곧바로 그녀의 자리로 향했다.

“안녕, 제인.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안녕. 혼요미 군, 내가 왜 학교에 오지 않았는지 궁금하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지?”

“그러지 마, 짓궂게. 어차피 네가 말해줄 거라고 믿고 있어. 그러니 괜찮아.”

“정말? 그런데 이를 어쩌나, 나는 바로 말해줄 생각이 없는데.”

“괜찮아. 언젠가는 말해줄 테니까.”

“...농담이야. 나중에 하교할 때 말해줄게. 조금만 기다려.”

말의 끝에 그녀는 나를 향해 가볍게 눈웃음지었다. 나도 거기에 화답해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교실 앞에서 반장이 HR을 알려서 나는 자리로 돌아갔다. 오늘은 옆자리에 앉는 아이가 늦는 모양이었다. 나는 거기에 큰 주의를 두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은 그녀가 왔으니까.


수업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른 채 나는 하루의 1/3을 보냈고, 이윽고 하교시간이 다가오자 이미 책가방을 챙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방을 메고 교실을 나왔을 때 그녀는 이미 나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우리는 손을 잡았고, 서로의 체온을 확인하며 정문까지 쭉 걸었다. 방학이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우리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나 있었지만, 둘 다 그런 소문에 연연하지는 않았다. 이제 우리는 서로를 가장 잘 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보다는 그녀의 믿음이 더 강했던 것 같았다. 그녀는 말했다.

“혼요미 군, 요즘도 그림 그려?”

“어, 그려. 요즘은 그냥 주위의 모습을 그리고 있어. 잘 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해. 봐 줄 사람이 없으니 잘 모르겠지만. 보여줄까?”

“나중에. 지금은 걷는 데 집중하자. 벌써 가을이 왔어. 자연에 가을이 만연해. 울긋불긋한 단풍이 가장 아름다워지는 계절이야. 멋지지 않니?”

“멋져. 너랑 같이 단풍을 볼 수 있다는 게. 이 시간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헤헤, 마치 혼요미 군은 내가 곧 사라져버릴 것처럼 얘기하네. 그럴 것 같아?”

“모르겠어. 여름방학 동안에는 계속 그림을 그렸어. 네 생각을 하기도 하고, 때때로 멀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면서 그림을 그리면 왠지 아무 생각도 안 하고 그릴 때보다 더 명징하게, 선명하게 그려진다는 느낌을 받아. 그리고 나는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거지,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그래. 잘 알아. 나도 마법을 쓸 때는 그런 느낌을 받거든. 평소에는 아무 느낌이 없지만.”

제인이 ‘마법‘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마법이 무엇인지 물어보고자 했지만, 굉장히 껄끄러운 질문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묻지 않았다. 나중에 그녀가 내게 설명해 줄 때가 올 것이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기로 하자, 그녀가 입을 열 때까지. 우리는 언제나 헤어지는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그녀가 손을 흔들고 사라지는 짧은 시간이 어느 때보다 길게 느껴졌다. 나는 손에 스케치북을 들고 있었다. 이제 나는 그녀를 그릴 것이다. 조금 더 선명하게, 조금 더 아름답게. 그녀는 마법사였다.


이제 이야기도 막바지에 다다랐다는 느낌이 온다. 나는 여기서 이야기를 중단할까 하는 심정으로 펜을 잠시 놓아 보지만, 그래도 끝까지 설명해야 할 것 같아서 다시금 펜을 든다. 시간을 조금 앞으로 돌려 본다.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의 기억의 거의 끝에 위치한, 가을이 막 겨울로 바뀌기 전의 시간이다. 달로 따지면 11월 말이었다. 알다시피, 11월에는 휴일이 이틀 있다. 내가 그녀를 마주한 것도 두 번째 휴일을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 날은 학교에서 국제 올림피아드에 나가는 선배를 독려하기 위해 수업을 한 시간 쉬고 교장 선생님의 말을 듣는 시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국제 올림피아드라니, 듣기만 해서는 대단하게 여겨지지만, 막상 그 선배는 태연한 표정을 하고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모두가 자랑스러워 할 만한 일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그 모든 관심과 기대와 바람과 경외를 넘어 저 높은 곳에 유유히 떠 있는 것만 같았다. 프로젝터는 넓은 화면에 대강당의 모습을 비춰주고 있었다. 교장의 지루한 연설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말했다, 쉬지도 않고. 옆을 슬쩍 보니 그녀는 여학생들 사이에 앉아서 가만히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두 손은 가만히 무릎 위에 얹은 채였다. 그녀가 무엇을, 누구를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교장을 보고 있지는 않다는 것만은 명확했다.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그녀에게 메일을 보냈다. 저녁에 약속이 있냐는 메일이었다. 휴대전화의 진동이 느껴졌는지 그녀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메일을 확인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내 쪽을 바라보아서, 나는 휴대전화를 흔들어 보였다. 그녀는 내 메일에 다만 짧게 답장했다. 성의가 느껴지는 메일이었다.

“이제 막 약속을 잡은 참이야. 저녁에 보자.”

그녀의 메일을 확인하고 나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나 말고도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몇 명 있어서, 그리고 그들도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걱정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쓸 수 있었다. 그녀와 할 일을 생각하고 있자 앞에서 교장이 연설하는 내용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이랬다.

“OO군은 우리 XX고등학교의 명예를 드높이고 나아가 세계에서 인정받는 올림피아드에 출전하게 됨으로써 본인의 위치를 최고로 끌어올리고...”

아무래도 좋을, 시덥잖은 내용이었다. 아마 연설을 듣고 있는 선배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나는 나보다 몇백 배나 머리가 좋을 그 선배에게 처음으로 동질감을 느꼈다. 연설은 그리고도 20분이나 더 이어져, 선배가 말을 시작했을 때는 이미 15분밖에 시간이 남지 않아 있었다. 그리고 선배는 5분만에 짧게 말을 끝냈다. 선배가 말을 끝내자 강당에 있던 모든 학생들이 박수를 쳤다. 그는 진정으로 찬사받을 만했다. 남은 10분은 교실에 돌아가서 쉬는 시간으로 활용했다. 그녀는 내 메일을 보고 놀랐다고 말했고, 나는 의외라고 답했다. 날은 흐렸지만 비가 올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아직 단풍나무 가지에 남아 있던 단풍이 쓸쓸하게 매달려 있었다. 나는 단풍을 가리켰고, 단풍을 바라보며 그녀는 말했다.

“꼭 우리 처지 같네. 그래도 낙엽은 땅에 떨어져 흙에 섞여 자양분이 되겠지. 우리는 나중에 죽고 나면 뭐가 될까? 혼요미 군은 그런 생각, 해 본 적 없어?”

“해 본 적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진지하게 고민한 적은 없어. 언제나 잘 모르겠다는 결론이 나서. 아직 어리기도 하고, 일단 살아봐야 알 수 있는 게 아닐까?”

“혼요미 군은 어른스럽게 말하네. 나와는 다르게. 이미 혼요미 군은 어른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혼요미 군의 그림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어. 아, 이 소년은 벌써 어른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어른의 눈을 가지는 것,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거야.”

“그럼 궁금한 게 어른의 눈이 뭔데? 뭘 보고 그걸 알 수 있는 걸까?”

“글쎄. 그건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도 잘 모르지 않을까. 나도 마찬가지고.”

그녀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내 눈을 지그시, 훑어보듯 바라보았다. 나도 그녀의 눈을 자세히 바라볼 수 있었다. 그녀는 눈동자에 바다와 함께 하늘을 품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아주 넓고도 깊은,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였다.


수업을 마치고, 하교 시간이 지나서 우리는 같이 언제나 저녁을 먹는 라멘집으로 향했다. 아직 맥주는 마실 수 없었지만, 식당에 사람이 없을 때는 평생 라멘만 끓여온 모습을 한 주인 아저씨가 우리를 위해 작은 잔에 생맥주를 담아 주었다. 그녀는 술을 마시지 않았기에 맥주를 마시는 것은 언제나 내가 되었다. 그 날도 손님은 샐러리맨 한 사람이 있었지만, 바로 먹고 나가 버려서 아저씨는 우리 앞으로 생맥주 한 잔을 탁 하고 놓아 주었다. 아저씨는 말했다.

“라멘에는 생맥주가 빠지면 섭섭하거든. 가볍게 한잔 해.”

언제나 하는 말씀이었지만, 나는 대답하는 대신 맥주잔을 들어 한 모금 깊게 들이삼켰다. 아직 맥주맛은 잘 몰랐지만, 라멘의 진득함을 맥주가 중화시켜 주는 듯했다. 그녀는 내가 맥주를 마시는 것처럼 우롱차를 마셨다. 시간은 벌써 저녁을 지나 어두운 밤이 되어 있었다. 겨울다운 긴 밤의 시작이었다.

“혼요미 군, 라멘 먹고 나서 잠시 시간을 내 줄 수 있어? 할 말이 있거든.”

“나는 딱히 상관 없지만, 왜?”

“이유는 그때 가서 말해줄게. 괜찮지?”

“그래. 제인 좋을 대로 해.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좋아. 고마워, 혼요미 군.”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됐는데, 제인의 상냥한 말투는 나를 무방비하게 만든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에게 그런 식으로 상냥하게 말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꼬박꼬박 붙이는 ‘혼요미 군‘이라는 이름도, 가끔은 이게 정말로 내 이름이 맞나 싶을 정도다. 그렇다고 내 진짜 이름이 어딘가에 따로 있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제인은 자기 몫의 라멘을 다 먹고 나를 기다렸다. 나는 맥주와 함께 라멘을 천천히 먹었다. 아직 밤이 되려면 멀었다. 나의 마지막 밤이.


제인이 나를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공터로 불렀을 때, 이미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할 건지를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잠깐만, 나는 방금 공터라고 했다. 그런데 그녀가 나를 공터가 아닌 다른 곳, 예컨대 자신의 집이나 도서관으로 불렀어도 사정은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여하간 그녀는 나를 공터로 불러들였다. 우선 그녀는 교복을 벗었다. 두꺼운 겨울용 교복 안에는 그녀의 내밀한 몸이 아니라 마법사들이 입을 법한 로브가 있었다. 그녀는 로브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안녕, 혼요미 군. 이제 내 정체를 밝혀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불렀어. 내 이름은 제인 아스마일이 맞아. 그리고 나는 이제 막 마법학교를 졸업하는 마법사야. 이제부터는 그냥 자연스럽게 말할게.”

그녀는 잠깐 목을 가다듬었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는 전혀 다른 자의 것이 되어 있었다.

“책 읽는 자여, 거기 그대로 서서 나의 말을 들으라. 그대에게 주어진 임무는 단 하나, 나의 마지막 시험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그대는 이제 그대가 맡은 모든 일을 마땅히 일이 그래야 하는 대로 잘 수행해 냈으니, 다시 무로 돌아가 영원한 안식을 맞으라. ......”

말을 마치고 그녀는 주문같아 보이는 말을 외었다. 그녀가 주문을 전부 외었을 때, 나는 내 몸이 양초처럼 녹아 흘러내리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푸름을 가지고 깊고 넓었다. 녹아 내리지만 나는 그녀의 눈 속에서 평생 살아갈 것임을 직감했다. 그녀는 아름다운 두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나도 마지막으로 형체를 유지하는 두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내가 녹아내림과 동시에 나를 둘러싸고 있던 세계도 함께 녹아내려, 제대로 형체를 유지한 채 버티고 서 있는 것은 오직 그녀밖에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감사했다. 그녀는 이제 훌륭한 마법사로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부터 나는... 마지막으로 그녀는 낮아진 내 머리를 짚었다. 그녀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아주 작게 말했다.

“그대와 함께 한 모든 시간이 빛으로 충만하기를. 세상이여, 안녕.”



이윽고 빛이 사라졌다. 그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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