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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preintes du beau rêve

冬を訪れた贈り物 본문

novel

冬を訪れた贈り物

barde 2013. 11. 18. 15:52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눈송이들은 작고 하얗고 반짝거려서 손에 닿으면 곧 부서질 것만 같다. 잘 닫힌 창문을 통해 천천히 떨어지는 새하얀 눈을 바라보면서, 나는 3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돌이켜 보면 그건 단어 그대로 기묘한 만남이었다.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도 알 수 없는 우연을 하나하나 밟아 나가다 보면, 나는 그 당시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었고 이제 막 겨울로 진입한 계절은 아직 가로수에 남은 낙엽을 차가운 바람으로 하나씩 떨구었다. 해가 아직 산의 그림자에 숨어 있는 6시에 맞춰 어김없이 빗자루로 땅을 쓰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내가 일어나서 가장 처음으로 하는 일은 창문을 활짝 열고 신선한 새벽 공기를 폐에 가득 채우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날만은 여유롭게 심호흡할 정신이 아니었다. 마당에 작은 소녀 하나가 웅크리고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


우선 내가 가장 곤란했던 점은 소녀를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하는 것이었다. 아니, 소녀이면서 고양이기도 한 ‘그녀’를 인간으로 대해야 하는지 고양이로 대해야 하는지부터 의문이었다. 무엇이라 이름을 붙이면 그녀는 나의 것이 된다. 하지만 나는 ‘인간’을 주운 것이지 고양이를 주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선 그녀에게 이름을 물어봐야 했다. 하지만 지금 내 앉은다리 위에 편하게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고양이는 전혀 답해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을 즐기면서, 종종 그르르르 하는 모터를 돌리는 듯한 소리를 내는 고양이는 방금 따뜻한 우유와 통조림 캔에 담긴 참치를 먹고 포만감에 차 있었다. “고양아, 넌 어디서 왔니?” 하고 물어 보았지만 그녀는 크게 하품을 한번 할 뿐 다시 꾸벅꾸벅 졸았다. 우선 나는 동물병원에 가기로 했다.


“혹시 이상한 점은 없나요?”

“아뇨. 약간 영양부족인 걸 빼면 모든 게 정상이에요. 길에서 주운 고양인가요?”

“길에서 주웠다고 할까... 마당에 누워 있던 걸 밥을 먹인 다음에 데리고 왔습니다. 몸이 정상이라는 게 다행이군요.”

“네, 일단 영양제 한 방 맞혔는데, 데려가서 혹시 문제 있으면 다시 오세요.”

“아, 감사합니다.”

다행히도 고양이의 몸에는 아무 이상도 없었다. 그런데 이 녀석, 외형만 보면 완전히 고양이였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새벽의 그 ‘모습’은 전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잠시 꿈을 꾸고 있나 생각해 보았지만, 햇살은 분명히 내 눈을 선명하게 비추고 있고 볼을 꼬집어 봐도 꿈에서 깨거나 하지는 않는다. 겨울의 햇살 덕분인지, 고양이는 껴안은 팔 안에서 다시 꾸벅꾸벅 졸았다. 고양이가 어지간히 잠이 많은 동물이라고 하지만, 계속 졸기만 하는 게 제대로 야옹 하고 말을 할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집에 돌아와서, 마트에서 사 온 고양이용 사료를 넓은 그릇에 담아 밥을 주었다. 다른 그릇에는 물을 적당히 담아 사료 그릇 옆에 놓았다. 고양이는 처음에는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그릇에 고개를 박고 열심히 밥을 먹었다. 와작와작 하는 소리가 식탁 저쪽 끝에 앉아 있는 내 귀에까지 들려와서, 괜히 웃음이 났다. 어이 없어서 웃는 웃음인지, 뿌듯해서 웃는 웃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시간은 6시를 지나 7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할 일 없이 소파에 누워서 옆에 같이 누워 있는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TV를 보다가, 석양이 지는 것을 보고 저녁을 먹기로 했다.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창을 통해 쏟아져 오는 빛의 양은 점차 줄어들어, 수저를 꺼낼 때가 됐을 때는 이미 주위가 어두워져 있었다. 갑자기 거실에서 기척이 들려와서, 나는 고개를 돌렸다. 하마터면 들고 있던 밥그릇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곳에는 새벽에 보았던 것이 분명한 기지개를 켜는 소녀가 있었다.


*


“안녕. 반가워. 너는 인간이니?”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파 앞에 서 있는 나를 올려다보며 질문했다. 나는 여기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동전을 굴리고 있었다. 당황할 때 쉽게 드러나는 버릇이었다. 소녀는 잘그락거리는 소리에 잠시 주머니 쪽을 보더니, 다시 내 눈을 똑바로 마주보고는 재차 물었다.

“왜 대답 안 하니? 인간 아닌 거야?”

“...인간이지. 그러는 너는 뭔데?”

“나는 고양이야. 흔히 사람들이 ‘고양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

“...하지만 지금의 너는 고양이가 아닌걸. 거울이라도 보는 게 어때?”

“거울? 거울이 뭐니? 들어본 것 같기는 한데.”

“거울이란 건 말야, 빛을 반사하는 얇은 판을 말하는 거야. 그러니까 네가 그 앞에 서면 반사된 네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지. 잠깐 기다려. 가져올 테니까.”

그렇게 말하고 방으로 들어간 나는 잠시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무엇보다 새벽엔 잘 보이지 않던 소녀의 알몸이 형광등 불빛 아래 구석구석까지 보여서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별로 남자답지는 않지만 나도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이기 때문에, 갑자기 여성의 알몸을 보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 일단 옷을 입혀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친 나는, 서랍을 뒤져서 작은 몸에 맞을 만한 티셔츠와 바지를 찾았다. 옷은 작년에 전부 정리해서 작은 건 거의 없었지만 대충 적당한 한 벌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거울. 마침 책상 위에 손바닥만한 작은 거울이 있어서 옷과 함께 챙겨서 거실로 나왔다. 소녀는 여전히 소파 위에 무릎을 포개고 앉아서 아무 털도 없는 팔을 핥고 있었다. 고양이였던 습관이 남아 있어서 그런 것일까. 처음에는 옷을 그녀에게 주고 입으라고 말했지만, ‘옷’이란 것을 왜 입어야 하는지 납득하지 못해서 그냥 억지로 입혔다. 처음에는 조금 저항했지만,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주자 저항은 줄어들었다. 바지까지 입히고 난 뒤에 나는 그녀의 얼굴 앞에 거울을 들이밀어 직접 그녀의 모습을 보게 해 주었다. 그녀는 잠시 거울 속의 ‘인간’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한 마디 했다.

“이 아이, 귀엽네.”

아니, 그거 바로 너라니까요. 나는 그녀에게 자신의 모습을 납득시키기 위해 거울을 가지고 이곳저곳을 비추어 주면서 그것이 그녀의 진짜 모습이라는 사실을 몇 번이고 설명했다. 이 짓을 한 30분 정도 했을까, 드디어 그녀는 거울 속의 ‘인간’이 그녀 자신이라는 사실에 동의했다.

“그런데 고양이는 이렇게 안 생겼는데? 이상하다.”

여기서 나는 거울을 든 채로 미끄러질 뻔했지만 말이다. 그녀도 배가 고플 거라고 생각해서 식탁에 앉힌 다음에 밥을 퍼서 그녀 앞에 놓았다. 혹시나 밥그릇에 코를 박고 먹을까봐 또 30분간 숟가락 쓰는 법을 가르쳤다. 젓가락은 무리일 것 같아서 가르치지 않았다. 그녀는 숟가락을 어설프게 들어서 밥을 입에 가져다 쑤셔넣고 또 국물을 마시고 계란말이를 입에 쑤셔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뭔가 이상해 보였지만, 저대로면 그럭저럭 세 살 애기는 되었으므로 나는 만족했다. 곁에서 같이 밥을 먹으면서, 나는 얼마만에 다른 ‘사람’과 같이 먹는 밥인지 생각해 보았다. 거의 1년 만인가. 1년이란 긴 세월을, 나는 의연한 척하며 혼자서 견뎌오고 있었다.


밥을 다 먹고 다시 잠들어버린 그녀를 소파에 눕히고 담요를 덮어 준 다음에, 숙제를 하기 위해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몇 문제 풀다가 다시 그녀를 보고 싶어서 거실로 나갔다. 잠깐, 여기서 ‘보고 싶다’는 말에는 애틋한 감정이라든지 사랑스러운 감정이 전혀 담겨 있지 않다. 그저 신경쓰여져 집중이 안 된다는 것일 뿐이다, 이해해 주기 바란다. 거실에 나와 보니 그녀는 소파 위에서 잘도 자고 있었다. 여자 치고는 약간 짧은 머리칼에, 긴 속눈썹을 가진 눈, 작은 코에 둥글고 좁은 어깨까지, 모든 게 인간의 육체보다는 잘 만들어진 인형 같았다. 나는 자신을 고양이라고 생각하는 그녀를 앞에 두고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안으면 깨지 않을까, 그럼 어떻게 해야 되지... 하는 걱정을 하느라 결국 안지는 못했지만, 담요를 다시 고쳐준 다음에 등허리를 살짝 쓰다듬어 주었다. 나와는 다른 부드러운 살결이 손 끝에서부터 느껴진다. 냄새는 뭐라고 할까, 복슬복슬한 냄새가 났지만. 그것도 포근한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그녀는 내가 등허리를 쓰다듬자 살짝 고개를 치켜들더니, 음냐... 하고는 다시 쌔근쌔근 잠에 빠졌다. 지금 꿈에서 무엇을 보고 있을까. 잘 구워진 생선이라도 보고 있을까. 시간은 오후 8시를 넘어 밤을 향해 있었다. 내버려 둬도 계속 잘 잘 것 같아서, 나는 소설이라도 보기 위해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


다음 날도 어김없이 아침 6시에 일어나서 기지개를 켜자 어제 일이 마치 한편의 덧없는 꿈처럼 여겨졌다. 그렇다고 해도 설마 꿈은 아니겠지, 분명히 지갑에 돈은 줄어들어 있는데 하고 바보같은 짓을 한 다음에,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거실로 나왔다. 새벽 푸른 공기가 주위를 감싸고 있는 거실은 원래대로라면 찬 공기로 스산해야 했으나, 오늘은 그녀가 내뿜은 온기로 인해 약간 따뜻했다. 고양이란 게 원래 열이 많은 동물이었나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딱히 다른 동물에 비해 열이 많거나 하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녀는 아직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고양이의 온기보다도 인간의 온기가 크게 작용한 결과이리라. 그렇게 믿고 나는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부엌으로 들어갔다. 물론 나의 아침이 아니라 고양이의 아침이다. 소파 위에서 새근새근 잘도 자고 있는 그녀가 일어나려면 해가 고개를 드는 시간은 되어야 할 것 같아서, 고양이 밥그릇에 사료를 부은 뒤에 개수대에서 물을 받아서 같이 소파 옆에 놓아 두었다. 저대로 두면 나중에 폴짝 내려앉아서 잘 먹겠지. 처음으로 시작하는 고양이와 함께하는 생활이었지만, 어쩐지 오래 전부터 함께 지내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분 탓일까, 12년 전, 내가 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지 않았을 때의 추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추억은 이내 아지랑이가 사라지듯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


오늘은 일요일이었지만 친구와 서점에서 만나기로 예정이 잡혀 있었기 때문에, 나는 가볍게 세수하고 옷을 간단하게 챙겨 입은 뒤에 모자를 쓰고 집을 나섰다. 세수를 하고 있을 때 ‘고양이’는 깨어서, “므으으-” 하는 소리를 낸 뒤에 예상대로 폴짝 뛰어내려서 사료를 갉아먹었다. 왜 동물은 깨어나서 우선 밥부터 찾는 것일까. 내가 동물이 되어보지 않는 이상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세수를 마친 나는 옷을 입고 고양이의 머리를 한번 가볍게 쓰다듬어 준 다음에, 현관문 앞에서 손을 흔들어 준 다음에 집을 나섰다. 점심밥은 부엌에 놔 두었기 때문에, 고양이가 밥 때문에 헤멜 일은 없을 것이다. 집에 혼자 있을 고양이가 걱정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친구와의 약속을 어길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시간은 여유로웠는데도 말이다.


“여, 안녕. 오늘은 안 쓰던 모자를 쓰고 나왔네?”

“왜, 이상해 보이나? 마침 있길래 써 본 거였는데.”

“아니, 무엇보다 네게 잘 어울려. 그야말로 천생연분이라고 할까. 표정도 밝아 보이는군.”

“혹시 눈치 챈 건가? 사실 나, 어제 고양이를 주웠거든.”

“호오. 흥미로운 사실인데. 어디서?”

“방 바로 앞에 있는 마당에 떨어져 있던 걸 주워서 밥을 먹였어. 동물병원에도 다녀와 봤는데, 몸에 큰 이상은 없다더라. 막 아침을 주고 왔어.”

“뭐야, 그럼 내가 즐거운 고양이와의 휴일을 방해한 셈이 되는 건가? 이거 유감스러운데.”

나는 츳 하고 혀를 찼다. 대화 중간에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건 친구의 특기라, 여기에 넘어가지 않는 게 중요하다. 나는 화제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그나저나 말인데, 너는 원래 서점을 좋아했나?”

“뭐야, 그 질문은. 내가 책과 거리가 멀어 보이기라도 한다는 말이냐? 하긴, 학교에서도 책을 잘 안 읽으니까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군. 흠, 충분히 오해를 살 만해. 하지만 말이지, 나란 인간은 애초부터 책을 물 마시듯 흡입한 인간이야. 동화, 소설, 희비극 등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어서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글을 다 뗀게 나라고. 뭐, 그 뒤론 약간 시시해졌지만, 그래도 사흘에 한 권은 읽고 있어. 한 달이면 열 권, 일 년이면 120권이지.”

“네 말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대단하긴 하네. 나는 그 정도로 책을 열심히 읽지는 않거든. 그럼 잘 된 거 아닌가. 빨리 서점으로 가자.”

“잠깐 기다려. 그 전에 네가 주운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은데. 대체 어떻게 생긴 고양이야? 귀여워? 사랑스러워? 막 쓰다듬어 주고 싶은가?”

“갑자기 그런 질문을 걸어오면 곤란해... 고양이 얘기는 나중에 점심이라도 먹으면서 하자. 자, 시간은 넉넉하니까.”

적당히 얼버무린 게 다행히 친구에게 통한 모양이었다. 친구는 예리한 눈길로 나의 얼굴을 살짝 엿보았지만, 그 뒤로는 순순히 내 뒤를 따라서 서점으로 걸어갔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서점에는 다양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누구는 가만히 서서 한 손에 책을 들고 그저 읽기만 하고, 누구는 책등을 죽 훑어보기는 하지만 꺼내서 읽어보는 책은 거의 없다. 아마 서점에 와서 여흥을 즐기고 있는 것일 테다. 그리고 드물지만 진지하게 책에 몰두하는 사람도 있다. 첫 번째와는 약간 다르게, 이들은 옆구리에 살 책을 몇 권 끼워두고 있다. 매주 저 정도로 책을 구매한다고 한다면, 집에 책버섯이 쌓이는 것도 시간 문제겠지. 친구는 영문학 코너에 가서 책등을 훑어보고 있다. 코너에는 친구 말고도 두세 명 정도 있어 보이지만, 다들 앉아서 책 읽기에 집중하느라 머리가 보이는 것은 친구 뿐이다. 나는 만화책 코너에서 새로 나온 신간을 찾아보고 있다. 이번 달은 저예산이라 한 세 권 정도 구매하기로 다짐했지만, 딱히 재밌는 것도 없어 보여서 두 권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서점의 한쪽 벽면에는 여러 종류의 ‘금지 마크’가 붙어 있었는데, 그 중에는 고양이를 그려놓은 “애완동물 출입 금지” 마크도 있었다. 도대체 누굴까, 고양이를 서점에 데려오는 것은. 분명 고양이가 책 애호가거나 주인이 손에 고양이를 쥐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을 경우일 테다. 아니라면 고양이 따위를 서점에 데려올 리가 없다. 그러자 갑자기 집에 내버려 둔 고양이 생각이 났다. 지금쯤 고양이는 하릴없이 거실을 뒹굴고 있겠지. 고양이가 안전하게 집에 있는데도 자꾸 고양이 생각이 났다. 혼자 있으면 심심하지 않을까, 혼자서 놀 수 있게 고양이용 장난감이라도 사 두는 편이 좋았나. 이미 신작 생각은 머리에서 사라진 뒤였다. 영문학 코너 쪽을 바라보자 친구는 벌써 다른 데로 가 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우선 책을 계산한 다음 친구를 찾았다.


친구는 일본문학 코너를 지나 사회과학 코너에서 책등을 훑어보고 있었다. 나는 책이 담긴 봉투를 들고 빨리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고 재촉했다. 친구는 내 말을 멈춘 뒤에 말했다.

“뭐야? 아직 12시도 안 됐잖아. 그것보다 지금 재밌어 보이는 책을 찾는 중이라서, 조금 있다 다시 와 줄래. 아니면 나하고 같이 찾아 보든지.”

말을 마치고 친구는 비웃음인지 웃음인지 모르게 웃었지만, 나는 거기에 신경쓸 정도로 정신이 예민해 있지 않았다. 그것보다 고양이를 위해 장난감이라도 사 가지고 돌아가고 싶어서, 친구가 책을 고르는 동안 고양이에게 어울리는 장난감이 뭐가 있을지를 생각해 보았다. 실에 매달린 공, 개박하풀, 골판지 박스 같은 것들... 내가 생각에 집중하느라 멍하게 있자, 친구는 내 어깨를 툭 하고 치더니 지나가듯 한 마디 했다.

“이상하네, 마치 사랑에 빠진 남자 같잖아.”

그렇다, 나는 고양이와 사랑에 빠지고 만 것이다. 라고 하면 이야기는 간단하겠지만. 해서 서점을 나온 우리는 미리 봐 둔 스파게티 전문점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


“음. 종은 흔한 길고양이고, 아직 어린 데다 사람의 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 이전에 누군가에게 길들여진 고양이가 아닐까? 주인이 고양이를 키울 사정이 못 돼서, 박스에 넣어서 문 앞에 내다 놓았는데 고양이가 제 발로 박스를 뛰쳐나와서 네 마당에 들어온 건 아닌지. 거기까지 이르는 데는 많은 우연이 필요하겠지만서도.”

“하지만 원래 주인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단순한 추측일 뿐이지만.”

나는 친구 앞에서 결코 고양이가 밤에 인간으로 변한다고는 얘기할 수 없었다. 그 말을 꺼낸 순간, 나는 차가운 눈으로 매도당하는 것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거야... 원래 주인이 있다면 아무래도 체취 같은 거에 민감할 테니까. 고양이는 내 품에 안겨서도 잘 잤거든. 보통 주인이 있는 고양이는 그러지 않잖아?”

“아니, 일부 고양이는 아무 사람이나 품 속에 비집고 들어가서 잘 자니까. 네 고양이가 그 ‘일부’일 수도 있는 거지. 가능성이란 건 다양하니까.”

친구의 말에 나는 새로운 가능성 하나를 떠올렸다. 혹시 이 ‘고양이’에게 원래 주인이 있고, 그 주인은 나와 마찬가지로 고양이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라는 가능성. 확률은 굉장히 낮았지만, 이미 ‘그녀’라는 존재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상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었다. 내가 스파게티를 둘둘 말면서 생각에 잠겨 있자, 친구는 이번에는 놀리려는 듯 웃음기를 담아 말했다.

“봐, 역시 사랑에 빠졌잖아? 현실에서 여자친구를 못 사귀니까 고양이한테 애정을 느끼는 거지. 고양이는 네 욕망의 보충물이 되는 거고.”

그렇지 않아! 라고 응수하고 싶었지만, 친구의 도발에 넘어가는 것도 어른답지 못해서 나는 그냥 면이 둘둘 말린 포크를 입에 집어넣었다. 미트 스파게티를 우물우물 씹으면서, 나는 언젠가 친구에게 이 비밀을 공개할 날이 올까 가늠해 보았다. 혹시 고양이가 내 곁을 떠난다면, 친구에게 그 사실을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친구도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흘러넘겨 줄 것이다. 고양이에 관한 대화만 제외하고, 우리는 즐겁게 떠들면서 스파게티를 먹었다. 주로 친구가 얘기하고 내가 거기에 맞장구치며 웃는 식이었지만,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줄어들지 않는 친구의 이야기보따리는 나 역시 감탄하는 재능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애완샵에 들러 서로 의논을 주고받으면서 장난감을 샀다. 친구는 앙증맞게 생긴 장난감 쥐를 골랐고, 나는 평범하게 실제와 흡사한 개박하풀을 골랐다. 하나를 정하기도 귀찮아서 그냥 둘 다 사기로 했다. 얼마나 쓸모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고양이를 생각하면 이 정도 지출은 가벼웠다.


집에 돌아와 보니 시간은 오후 네 시를 살짝 넘어 있었다. 아직 햇빛은 비스듬히 거실로 비추어 들어오고, 고양이도 아직은 고양이인 채로 양지바른 곳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저녁에 그렇게나 잠을 잤으면서 또 잠을 잔다는 게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고양이는 적어도 하루에 12시간은 잔다고 하니까, 이해해 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시험 삼아 개박하풀을 눈 앞에 들이대 봤더니, 팔을 몇 번 휘젓는 식의 반응이 있었다. 하지만 진짜가 아니라 그런지 열렬하게 반응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장난감 쥐를 바로 앞에 던져 보았지만, 한번 휙 하고 팔로 낚아챌 뿐 그 다음에는 다시 자리를 잡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고양아, 이건 너무한 거 아니니? 기껏 사 왔는데.”

하지만 고양이는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앉아서 느릿느릿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나는 여러 군데 돌아다녀 지쳤던 터라 그냥 장난감을 내팽개치고 소파에 앉아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일부러 소리를 크게 해서 게임을 했는데도 고양이는 처음을 제외하고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마치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나는 여기에 있을 테니”라는 식이었다. 스마트폰을 구석에 집어던지고 리모콘을 찾아서 TV를 켰다. 클래식 채널로 채널을 바꾼 다음에 한숨 자려고 눈을 안대로 가리고 누웠다. 스르르 잠이 몰려왔다.


*


“일어나. 저녁 밥 먹어야지.”

언젠가 들었던 목소리에 잠에서 깨고 말았다. 누구지? 하고 2초 정도 생각하다가 그녀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랬지. 내가 주워온 건 인간으로 변하는 고양이였지. 일어나서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TV 앞에 그대로 내팽개친 장난감들이 보였다. 말랑말랑한 장난감 쥐에 진짜를 빼닮은 고양이용 개박하. 장난감의 처지와 지금 멍한 상태로 눈을 깜빡이고 있는 나의 처지가 다르지 않다고, 일순 생각했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 없이 저녁을 먹어야 했기 때문에 피곤에 절은 몸을 이끌고 부엌으로 향했다. 뒤따라 오는 그녀는 내가 앞으로 뭘 할지 궁금해 하는 모습이었지만 잠자코 부엌 앞에서 기다렸다. 좋았어, 오랜만에 실력발휘나 해 볼까. 나는 가장 만만한 야채 카레를 택했다.


“밥을 먹기 전엔 우선 “잘 먹겠습니다” 하고 인사하는 거야. 자, 따라해봐.”

“잘 먹겠습니다...? 무슨 뜻이야?”

“음, 그러니까 쌀을 만들어 준 사람과 야채를 길러 준 사람과 그 밖에 기타 재료를 여기 식탁 위까지 오게 해 준 사람과 마지막으로 음식을 만들어 준 사람에게 감사하는 거지. 네가 생선을 준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것처럼.”

“생선 준 사람 없어. 참치나 구운 고기나 밥 먹었어.”

“그러냐. 뭐 그런 대로 좋다고 치자. 어쨌든 밥을 먹여준 사람한테는 감사해야 하는 법이야. 안 그러면 밥을 해 준 사람이 다시 밥을 안 해 줄지도 모르거든.”

“왜?”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당연하지. 받는 것도 없는데 굳이 수고를 들여가며 밥 따위를 해 줄 이유가 없다고. 안 그래? 네가 쥐를 잡아서 어떤 고양이한테 준다고 치자. 그런데 그 고양이는 날름 먹고 튀었어. 그러면 넌 어떻게 할 건데?”

“고양이는 쥐 안 먹어. 요즘 거리에 쥐 없어.”

“아니, 예를 든 것뿐이라니까. 예라고, 예. 좋아, 그럼 쥐가 아니라 생선이라고 하지. 아까랑 똑같은 상황이라고 치고, 넌 어떻게 할래?”

“생선 먹고 도망가면, 어... 다시 안 오겠지.”

“...대충 그런 셈이지. 부끄러움을 알아서라도 다시는 너를 안 찾아온단 말야. 이것 봐, 인간 사회는 사랑으로 굴러가는 사회가 아니라고.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게 있는 법이거든.”

“그러면 너는 나한테 밥을 줘서 얻는 게 있어?”

그녀의 이 질문은 한순간 나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내가? 네게? 아니, 전혀 얻는 게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나는 아까 쓸데없는 소리를 했던 걸까. 한번 말하면 주워담을 수도 없는 말들을. 그녀는 진지하게 묻는 눈빛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뭐라도 대답해 주어야 했다. 그녀를 납득시키기 위해서라도.

“어, 있어.”

“뭔데?”

“잠깐. 아직 입에 밥이 남아 있어서.”

밥을 평소보다 열 배는 천천히 씹으면서 궁리했다. 내가 그녀를 만나서 얻은 것. 도대체 뭘까? 이 이상야릇한 감정은.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낯간지러웠다. 동정이라고 하기에는 오히려 동정받는 쪽은 내 편인 것 같다. 애정이라고 하기에는...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에게 애정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입을 열었다.

“그건 말이지... 나는 너를 좋아하거든.”

“좋아한다? 무슨 말이야?”

“좋아한다는 건 그러니까... 자꾸 나를 난처하게 만들지 마. 좋아한다는 건 좋아한다는 거야. 거기엔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직관이 있다고. 아니 그러니까... 젠장.”

“?”

“됐어. 밥이나 먹자.”

그녀의 밥풀이 묻은 작은 입을 겨우 닫게 만들고서야 나는 음식을 입에 넣을 수 있었다. 그 날 먹은 카레가 무슨 맛이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다 갑자기 이상한 생각을 했다. 고양이는 씻기를 싫어한다고 하지만, 인간이라면 어떨까? 혼자 씻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나를 때려 죽이고 싶어졌다. 네가 그녀의 아버지라도 된 것마냥 착각하는 거냐. 오만한 녀석. 우선 말해 두건대, 나는 그녀에게 어떠한 욕망이라도 느끼고 있지 않다. 그래, 애정인 거다. 애정이란 건 때로 수치심을 결여할 수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생각만이라면 나쁠 것 없지. 생각하는 건 자유니까.


*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부엌에 쌓인 카레 냄새를 빼기 위해 창문을 활짝 열고, 그릇을 선반에 정리하고 나니 시간은 벌써 9시가 되었다. TV를 틀면 9시에 하는 뉴스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오늘 같은 날은 뉴스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단지 그녀와 일 분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서, 잠들어버리기 전에 어떻게든 대화의 물꼬를 이어 나가려고 노력했다. 처음에는 말을 가르치기로 했다.

“자, 봐. 이게 か고, 이게 き고, 이게 く... 그리고 이게 ん.”

“뭐야 이거? 그림?”

“그림이 아니라 문자라고 해. 네가 하는 말을 그대로 글로 적으면 문자가 되지. 문자는 말이지, 말로 부족한 걸 글로 대신하기 위해서 고안된...”

“몰라. 모르겠어. 말 하는 데 그런 게 필요해?”

그래서 각하. 사실 대화에는 문자 같은 게 필요하지는 않다. 그래서 다음에는 인형을 가지고 놀기로 했다. 방에 가서 안 쓰는 인형을 찾아 보니까 두 개 정도 나오기는 했다. 비록 세월을 타서 많이 낡기는 했지만, 아예 솜이 뜯어지지만 않으면 괜찮으니까.

“인형을 가져왔어. (오른손을 흔들며) 이쪽이 테디, (왼손을 흔들며) 이쪽이 페터. 테디는 곰이고, 페터는 토끼야. 곰하고 토끼가 누군진 알지?”

“나 알어. 곰은 쿠앙 하는 큰 동물이고 토끼는 작고 하얗고 폴짝폴짝 뛰는 동물이야.”

“그래, 잘 알고 있구나. 그럼 내가 테디를 맡고, 너는 페터를 맡아. 역할극을 해 보자. 역할극이란 건 음... 내가 인형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그 인형이 되는 거야. 이를테면 내가 테디를 가지고 있잖아? 그럼 그 동안 내가 테디가 되는 거고, 너는 페터를 가지고 있으니까 페터가 되는 거지. 어렵지 않지?”

“알겠어. 그럼 너가 테디고, 내가 페터고... 그럼 내가 토끼가 되는 거야?”

“어, 토끼. 폴짝폴짝 뛰는 토끼. 좋았어. 시작해 보자.

안녕 페터? 나는 저 숲 속에 사는 테디라고 해. 요즘 꿀을 집어먹고 있는데 벌들이 다들 동면에 들어가서 꿀이 얼마 없어. 그래서 대신 설탕을 먹고 있어. 이제 네가 해 봐.”

“안녕? 나는 페터야. 페터는 음... 폴짝폴짝 뛰는 걸 좋아해. 이렇게 폴짝폴짝, 잡초 사이를 뛰어서 폴짝폴짝. 그리고 페터는 하얘. 사냥꾼의 눈에 잘 띠기 때문에, 페터는 골목이나 나무 뒤에 숨는 일이 많아. 페터는 이걸 고양이한테 배웠거든.”

인형극에서도 고양이였던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어딘가 안쓰러운 기분이 들었다. 몸은 인간이라도 아직 고양이의 기억에 얽매여 있는 걸까 하고. 하지만, 그녀는 원래 고양이가 아니었던가? 고양이가 고양이의 기억을 갖는 게 뭐가 이상하지? 나는 졸지에 이해심 없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페터는 테디 옆에서 하염없이 폴짝폴짝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어디서 토끼가 뛰는 모습을 보았을까? 혹시 이전에 데리고 다니던 주인이 보여준 것은 아닐까? 친구의 말을 다시 떠올리고 나는 숙연해졌다. 내가 첫 번째 주인일 리가 없다.


“그런데 페터야, 너는 혹시 이전에 다른 집에서 살았니?”

“아니, 테디. 페터는 처음부터 가족하고 같이 살았어요. 페터가 살던 집에는 자상한 엄마 토끼가 있고, 그리고 오빠 토끼가 있고, 그리고 집에 잘 안 돌아오는 아빠 토끼가 있고... 그리고 언제나 조용한 여동생 토끼가 있었어. 여동생 토끼는 고기보다는 풀을 좋아했는데, 그래서 아빠 토끼가 항상 혼잣말로 “저 녀석은 내 자식이 아니야. 저런 걸 내가 낳았을 리가 없어” 하고 말했답니다. 그런데 페터는 그 말을 믿지 않아요. 왜냐면 여동생 토끼는 엄마 토끼를 꼭 닮았거든. 오물오물 풀을 먹는 입 하며, 보드라운 살결에, 쫑긋거리는 귀까지. 전부 엄마 토끼와 붕어빵이었거든.”

“그럼 페터야. 너는 왜 지금 여기 혼자 있는 거니?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런데 말이지, 페터 너무 무서웠거든. 혼자 있는 게. 어느 날 말이지, 페터는 산딸기가 너무 먹고 싶어졌어. 그래서 산딸기를 찾으러 저기 산 위에까지 올라갔는데, 그만 길을 잃어버리고 만 거야.”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페터는 고개를 치켜든 채로 살짝 떨고 있었다. 그 당시 페터가 느꼈던 감정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했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페터는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면서 생각했어. 분명히 이 길을 쭉 내려가면 집으로 갈 수 있을 텐데, 왜 집은 보이지 않는 걸까. 한참을 헤매다가 페터는 문득 떠올렸어요. 페터의 집은 여기 더 이상 없다는 걸.”

“왜? 페터의 집이 왜 더 이상 없는데?”

“페터가 산에 올라갔다 내려오는 동안 가족이 이사를 가 버렸거든. 페터는 집이 있던 언덕에 주저앉아서 그만 펑펑 울기 시작했어. 왜 나만 두고 가 버렸어, 가 버렸어 하면서...”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에, 나는 침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페터는 이제 테디의 배에 머리를 박고 간헐적으로 몸을 떨고 있었다. 그녀도 마찬가지로 동요하는 모습이었다.

“너... 혹시 울고 있는 거니?”

“울지 않아. 우는 건 꼬마 고양이나 그러는 거야.”

“울어도 돼. 일부러 울지 않을 필요는 없어. 자, 품에 안겨 울렴.”

마지막 말은 괜히 했나 싶었다.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쓰러지듯 내 품에 안겼기 때문이다. 내 팔 안에서 우는 그녀의 어깨는 평소보다 더욱 작아 보였다. 나는 그녀의 등허리를 천천히,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그녀는 지난 세월을 어찌 견뎌 온 것일까. 그 이야기를 내가 들어주고, 공감해 주고, 위로해 줄 수 있을까. 지금부터 시작이다, 고 마음을 다잡았다. 고양아, 앞으론 내가 지켜줄게. 내 한 몸 지키기에도 급급한 인생이지만, 그래도 너 하나쯤은 들어갈 자리가 있을 테니까. 그렇게 그날 밤은 조용히 저물었다.


*


1월 초에 방학을 맞을 때까지, 나는 평일에 학교를 가고 그녀는 내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 집을 지키는 것으로 되었다. 따라서 내가 그녀의 고양이인 모습을 보는 것은 아침이나 집에 돌아와서 잠깐에 지나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녀의 인간인 모습보다는 고양이인 모습이 더 기억에 남았다. 왜냐면 인간인 그녀는 내게 너무나 익숙했기 때문이다. 몇 년 전부터 같이 살아온 것처럼, 그녀는 내 곁에서 같이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잠을 잤다. 잠든 그녀의 얼굴을 보는 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내 습관 중 하나가 되었다. 표현은 이상하지만 ‘쥐 죽은 듯이’ 잠에 든 그녀의 얼굴은 티 하나 없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아니, 실제로는 반짝이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반짝였다. 나는 그녀의 속눈썹에 진 그림자조차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속눈썹은 눈꺼풀에 초승달 모양을 그려내어, 그녀의 감은 눈을 부드럽게 덮어주었다. 이전에 나를 괴롭히던 불면증도 그녀와 같이 잔 이후로 싹 없어졌다. 정말로 천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나에게 와서 잠자리를 지키는 고양님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그 때는 전혀 몰랐다, 그녀와 헤어질 날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


한 1월 정도였을까, 신년을 지루하게 맞고 나서 코타츠에 발을 집어넣고 그저 멍하게 TV를 보고 있었다. TV를 본다고 해도 재밌는 건 하나도 하지 않고, 솔솔 잠이 오게 만드는 클래식 채널을 제외하면 나의 흥미를 끄는 것은 전혀 없었다. 재밌는 애니메이션은 심야에나 하기 때문에, 낮에는 그런 식으로 무기력하고 코타츠에 박혀 있는 수밖에 답이 없었다. 그녀는 고양이인 자신을 최대한으로 즐기며 창문 앞에서 뒹굴거나 골판지를 긁느라 분주했다. 가끔은 그런 그녀가 부럽기도 했다. 나도 고양이로 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부모도 나를 조금은 더 귀여워 해 주었을 텐데. 아니, 오히려 이상한 동물이라고 하면서 바로 집에서 내쫓았을까. 차라리 완전히 고양이로 태어났다면 인생은 좀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아침에 일어나면 경쾌하게 기지개를 켜고 아침의 햇살을 맞는다. 밥은 느긋하게 브런치를 먹고, 점심 즈음에는 해가 잘 드는 곳으로 비집고 들어가서 낮잠을 취한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밥 주는 사람이 주는 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동물의 본능을 유지하기 위해 사냥 연습을 좀 한 다음에 잠자리에 든다. 얼마나 평안하고 즐거운 삶인가! 나는 코타츠에 엎드려서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언젠가 움직이지 않는 시간을 가게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되는지 친구와 의논한 적이 있다. 친구는 자신부터 움직이지 않으면 시간은 결코 가지 않는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나는 거기에 맞서-어차피 적당히 역할을 맡는 것에 불과했지만-남이 시간을 가져다 주는 경우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럼 누가 시간을 가져다 주는데?”

“글쎄... 프루스트?”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프루스트는 100년 전에 죽었잖아. 죽은 사람이 시간을 가져다 준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하지만 가끔은 그런 경우도 있거든. 설령 죽은 사람이라고 해도.”

그리고 나는 지금 실례를 찾아낸 기분이 들었다. 저기서 뒹굴고 있는 고양이. 그녀가 얼어버린 채로 멈춰 있던 내 시간을 가게 해 주었다. 그녀를 만나고서부터 삐걱삐걱 하는 소리가 나의 내면에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명쾌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소리’는 분명하게 들려왔다고 말할 수 있다. 겨울에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밟으면 나지막히 “뿌드득”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처럼, 소리는 작지만 확실하게 내면으로부터 귀로 전해져 왔다. 지금 이 글을 쓰는 것도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긴 여정일지도 모른다. 오직 나밖에 겪지 못한 경험을, 확실히 전해질지도 모르는 채로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 위해.


*


이제 슬슬 글도 끝을 향하는 것만 같다. 아직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너무 길게 쓰는 것도 변명 같아 보여서 몇 가지만 더 쓰고 접기로 한다. 그러기 위해 시간을 1월에서 조금 앞으로 돌려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로 맞추었다. 발렌타인 데이는 커플의 명절이라고 불릴 정도로 거의 모든 커플들이 기념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공휴일이 아니라서 일반인들에게는 그다지 의미가 없는 날이기도 하다. 하지만 잔뜩 이성에 들뜬 고등학생들에게는 그 의미가 다른 누구보다 클 테다. 남자들에게도 그렇고, 여성들에게도 그렇다. 그 날도 아침부터 친구에게 전화가 와서 기억에 남았다.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발렌타인 데인데, 학교에 가 보지 않을래? 혹시 초콜릿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토요일인데. 다들 커플이 되어서 어디 놀이공원에라도 놀러가지 않았을까?”

“아니, 이럴 때일수록 고등학생은 학교를 찾는 법이라고. 가장 돈이 덜 드는 곳이니까.”

“여전히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너는.”

“그럼 학교에서 보자구. 1시간 뒤에!”

친구가 그렇게 말한 이상 학교에 가 보아야 했다. 분명 학교에 간다고 해도 친구 말고는 아무도 만나지 못할 확률이 높았지만, 어쩌면 친구가 초콜릿을 준비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참고로 친구는 생물학적으로 100% 남자다. 혹시라도 오해할지 몰라서 적어 둔다.) 대충 옷을 차려 입고 꼬리를 흔들고 있는 그녀에게 밥을 준 다음에, 현관에서 손을 흔들고 밖으로 나왔다. 2월이라 그런지 춥지 않은 지방인 여기도 목도리를 하지 않으면 바람이 속에 파고들 정도로 추웠다. 나는 목이 간지러워서 목도리는 잘 하지 않았지만, 잘 찾아보니 목이 간지럽지 않은 매끈한 목도리도 있어서 그걸 하고 다녔다. 지하철로 두 정거장 떨어져 있는 학교로 가 보니 친구는 정문 앞에서 약간은 추워 보이는 차림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코가 빨간 것이 꽤나 오랫동안 기다린 듯했다. 약간 미안함을 느꼈다.

“얼마나 기다린 거야? 코가 빨개서는.”

“별로. 한 20분 정도? 발렌타인 데이 초콜릿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가볍지. 너도 초콜릿을 기대하고 온 거 아냐?”

“난 너완 달라서(천천히 끊어서 발음했다.) 초콜릿 같은 거엔 관심 없어. 특히나 여자가 주는 초콜릿 따위는.”

“어이, 평소 너와는 전혀 다른데? 작년 발렌타인 데이에는 초콜릿을 세 개나 받았다며 기뻐하지 않았나? 아니면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건가?”

“분명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걸거야, 그거. 그리고 내가 받은 초콜릿은 네 개였어. 엄마가 준 것까지 합해서.”

하하하! 하고 친구는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웃지 말라고 어깨를 한 대 쳤지만, 그대로 뒤로 넘어가서는 더 크게 웃었다. 친구가 웃는 모습이 어지간히 얄미웠지만 화가 나지는 않았다. 어차피 친구는 그런 녀석이기 때문이다. 남의 어설픈 모습에 웃고 마는.

“일단 학교로 오긴 했는데, 도대체 어디에 초콜릿이 있다는 건데?”

“잠깐 기다려봐. 곧 있으면 1학년 여자애들이 올 거야.”

“응? 그게 무슨 소리?”

“쉿! 뒤로 숨어!”

친구는 그렇게 속삭이고는 먼저 문 뒤로 들어갔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서 친구를 따라 뒤로 들어갔다. 몰래 살펴보니 100m 앞에서 여고생 세 명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친구가 말한 1학년 애들인가 보다. 각자 손에 포장한 초콜릿을 들고 있었다. 하트 모양에 사각형 모양, 그리고 정육면체. 정육면체 모양 초콜릿을 들고 있는 여자애는 어딘지 모르게 깐깐해 보였다. 한치라도 오차가 나면 베어버릴 것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단지 그렇게 보인 것일지도 모르지만, 머리 스타일을 보면 스트레이트로 펌을 한 게 내 추측에 걸맞았다. 하트 모양을 들고 있는 애는 약간 둥글게 생겼고, 사각형 모양을 들고 있는 애는 별로 특징이랄 게 없었다. 각자 개성이 다양한 세 친구가 들뜬 듯이 이야기를 하면서 걸어가는 모습이 퍽 인상깊었다. 옆을 보니 친구는 주의깊게 세 명을 훔쳐보고 있었다. 그런데 저런 애들을 노려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도대체 여기 숨어 있는 이유가 뭐야? 우리가 뭐가 부끄럽다고?”

“부끄럽기 때문에 숨어 있는 건 아니야. 잘 봐. 저 애들이 어디로 가는지.”

무슨 소리일까? 친구는 그 뒤로 말을 더 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대로 가만히 서서 세 명의 동지가 학교로 향하는 뒷모습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문 안으로 들어가고 나자, 친구는 손짓으로 따라오라고 하더니 살금살금 걸어서 문으로 들어갔다. 나는 친구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밖은 너무나 추웠기 때문이다.


친구를 따라 들어간 학교 1층에서, 멀어져 가는 여고생들의 목소리와 타닥타닥 하고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1학년들의 교실은 1층에 전부 있기 때문에, 그녀들도 계단을 올라가지 않고 그대로 복도를 건너 아마도 마음에 담고 있을 남학생이 있는 교실로 걸어갔다. 나보다 먼저 들어간 친구는 올라가는 계단과 내려가는 계단 사이에 숨어서 그녀들이 어느 교실로 들어가는지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나는 친구의 어깨를 건드렸다.

“가만히 있어 봐. 어디로 들어가는지를 기억해 둬야 하니까.”

“너, 설마 이상한 짓이라도 꾸미고 있는 거냐...”

“걱정이라면 붙들어 매시길. 여자의 사랑을 방해할 정도로 최저는 아니니까.”

나는 친구의 말을 신뢰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앞으로 친구가 무슨 짓을 할지 감시하는 편이 좋았으므로 계속 친구 뒤에 서 있었다. 세 명의 여고생은 교실로 들어간 뒤에 5분 정도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설마 사랑의 라이벌이라고 하는, 그런 건 아니겠지. 이윽고 빈 손으로 그들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친구는 한쪽 무릎을 꿇고 가만히 앉아서 그들이 다시 복도를 건너와 교문을 나가는 모습을, 닌자라도 된 것마냥 음습하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나는 우선 친구의 한쪽 팔을 잡았다.

“잠깐! 더 이상 움직이면 네 팔을 꺾겠어.”

“왜, 왜 그러는 거야? 내가 초콜릿이라도 훔쳐 먹을 것 같았냐? 이거 실망인데.”

“실망이라면 마음껏 하라고. 적어도 네가 아무 짓도 안 하는 편이 나으니까. 그래서, 이제부터 뭘 할 계획인데?”

“잠깐, 팔부터 놓고 얘기하자. 네가 날 잡아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

친구답지 않게 쩔쩔매며 팔을 놓아달라고 부탁했지만, 가끔씩 보이는 친구의 약한 모습이 싫지는 않았다. 능청맞은 그의 이면에는 이런 면도 있구나 하고 즐거운 기분이 든다. 나는 가볍게 팔을 놓고 친구의 말을 들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건 말이지... 초콜릿을 찾아오는 거야.”

“누구로부터?”

“그야 당연히 여자로부터지. 실은 이전에 편지를 받았거든.”

그렇게 말하고서 친구는 품 속에서 하얀색 편지봉투를 꺼냈다. 먼저 열어 보았는지 스티커는 붙어 있지 않았다. 친구는 내용물을 꺼내지는 않고 그대로 들어서 설명했다.

“여기에 오늘 학교에 와서 초콜릿을 찾아 가라는 내용이 쓰여 있어. 왜 하필이면 나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신발장에 이런 편지를 넣은 이상 무언가 목적이 있다고는 추측할 수 있지. 그래서 학교에 온 거야.”

“그 정도는 나 없이도 할 수 있잖아? 나를 부른 이유는?”

“혹시나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서... 는 아니고, 혼자 가는 게 부끄러워서 그랬어. 아까 본 여고생들이 세 명이 모여서 학교에 오는 것처럼.”

“별걸 다 부끄러워하네, 너답지 않게.”

“아니, 사실은 의문스러운 점이 하나 있어서.”


*


그러면서 친구가 내게 말해준 것은 뜻밖의 사실이었다. 편지에는 보낸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고 단지 교실의 위치와 몇 번째 사물함이라는 말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거.”

친구가 보여준 것은 새끼손가락보다도 작은 열쇠였다. 아마 사물함을 열기 위한 물건인 것 같다. 나는 친구에게 물었다.

“그걸 가지고 열라고 했단 말이야? 열어서 초콜릿을 가져가라고?”

“요컨대 그렇지. 나도 잘 이해는 안 되지만, 보물찾기라고 생각하면 꽤나 재밌지 않아? 초콜릿은 그다지 가치 있는 보물은 아니지만.”

“너, 상대방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생각하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오늘 여기에 온 것 아냐. 자, 가자.”

친구가 앞장서고 내가 그 뒤를 따라가는 식으로 우리는 1학년 6반 교실로 향했다. 6반은 해가 잘 드는 곳에 있어서, 교실에 들어가도 그리 어둡지 않았다. 친구는 반쯤 가려져 있던 커튼을 걷은 다음에 사물함을 찾았다. 정가운데에 있는 사물함이었다.

“혹시 열쇠가 안 맞으면 어떡하지?”

“그럼 맞는 사물함을 찾을 수밖에 없고. 서른 개 정도라 시간은 얼마 안 걸릴 테니까.”

다행히도 열쇠는 한번에 맞아서, 우리는 1번부터 일일히 열쇠를 맞춰보지 않아도 되었다. 친구는 무릎을 꿇고 안을 살펴보고는, 그 안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아무래도 이거인 것 같다. 위에 뭔가 걸려 있어.”

친구에게서 상자를 받은 나는 리본을 푼 다음 리본에 걸려 있던 초록색 쪽지를 뒤집어 보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미리 생일 축하해요, XX 선배]

XX는 물론 친구의 이름이었다. 그걸 본 친구는 한번 멋쩍게 웃더니, 쪽지를 예의 편지봉투 안에 잘 넣었다.

“누군지 알 것 같아, 이런 장난을 친 게.”

“아는 녀석이야?”

“뭐, 그렇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고. (사물함을 가리키며) 이 녀석, 우리 동아리 부원이거든.”

“헤에. 그랬구나. 그럼 이건 의리초코?”

“일단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하자. 남녀 사이에 성립하는 의리란 초코밖에 없으니까.”


1학년 6반 교실을 나온 우리는 떨어지는 햇살을 받으면서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평소라면 떠드는 소리, 뛰는 소리,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로 시끄러웠을 교정은 오늘만큼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사랑이 싹트는 발렌타인 데이라고 하지만, 아까의 여고생 세 명을 제외하면 학교를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역시 다들 커플이 되어서 거리로 나간 거겠지. 친구는 상자를 열어서 초콜릿을 하나 집어 내게 건네주었다.

“줘도 돼?”

“상관없어. 먹어 봐.”

입에 넣은 초콜릿은 달콤하면서도 쌉싸래한 맛이 났다. 이게 바로 사랑의 맛이 아닐까. 아직 사랑이란 걸 잘 모르는 고등학생에 지나지 않지만. 친구도 초콜릿을 하나 입에 넣고서 음미하면서 말했다.

“이 초콜릿, 손수 만든 걸거야. 봐, 모양이 제각기 다르잖아. 손재주가 그다지 좋지 않은 녀석이라, 만들기를 하면 모두가 개성을 타고나게 되거든.”

“어차피 입에 들어가면 다 같은 거 아냐?”

“하하, 그건 그렇지.”

이제 차가운 공기는 더 이상 복도를 떠돌지 않았고, 대신 햇빛이 잘라붙인 종이와도 같이 복도를 그 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친구와 나는 문 앞에 잠시 그대로 서서 학교의 정적과 공기를 만끽하였다. 저 멀리 시계탑에서 오전 11시를 알리는 종이 울려왔다.

“11시네. 가 볼까.”

“조금만 더 있다가.”

말을 마치고 친구는 초콜릿을 하나 더 집어서 내게 건네주었다. 둥글면서 울퉁불퉁한, 누군가의 손길이 담긴 초콜릿. 초콜릿을 천천히 녹여 먹으면서, 나는 개울의 살얼음이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봄이 느릿하게, 그러나 확실히 다가옴을 느꼈다. 어디선가 피아노 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


3월의 어느 날, 봄방학을 맞이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고양이에게 점심밥을 주고, 나는 코타츠에 들어앉아 얇은 문고본을 읽고 있었다. 감정이 둔한 나에게도 그것은 꽤 슬픈 이야기였다. 그녀가 만약 책을 읽을 수 있었다면 펑펑 울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고양이인 채로, 그것도 여유롭게 그녀는 창문 앞에서 따뜻한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이럴 때면 그녀가 부러워지기도 했다. 예전에도 고양이를 막연히 부러워하는 마음은 가지고 있었지만, 손수 고양이를 기르게 되자 주인 품에 안겨 먹이와 추위 걱정 없이 느긋한 생활을 하는 고양이가 누구보다도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약간 쓸쓸한 기분도 들었다. 만약 내가 그날 새벽에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녀는 그대로 얼어 죽었을까.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장난감 쥐를 앞발로 건드리기도 하고, 물어뜯기도 하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겨울이 감에 따라 해가 점차 길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고양이인 그녀를 볼 수 있는 시간도 30분 정도 늘어났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인간으로 변하든 어쩌든 변함없이 자신을 고양이라고 의식하고 있었다. 그 뒤로 몇번 거울을 보여줘 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여전히

“왜 자꾸 이 아이를 보여주는 거야? 혹시 여자친구?”

라는, 전혀 내 속을 모르는 대답이었다. 이제 좀 알아줄 때도 됐는데, 그녀는 언제까지고 ‘고양이’로 머물고 싶어했다. ‘인간’이 아닌, 작고 귀엽고 인간의 사랑을 받는 고양이로.


멍하게 있는 사이에 벌써 저녁 시간이 되어서, 인간으로 변한 그녀에게 저녁밥을 주기 위해 나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돌이켜 보면 누군가를 위해 저녁을 만들기 시작한지 벌써 4개월이 되었다. 4개월이 지나는 동안 나는 나이를 한 살 더 먹었고, 그녀는 아주 약간 키가 자랐으며, 해는 짧아졌다가 다시 길어지기 시작했으며, 부모님이 다시 돌아오기까지 이제 6개월 정도 남아 있었다. 해외 대학에 객원연구원으로 출장 비슷한 것을 간 부모님은 당시 1학년이던 나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며 출국 바로 전에 말하고는 훌쩍 떠나버리고 말았다. “모든 것을 맡긴다”는 듣기에는 참 좋은 말이지만, 안에 담긴 책임을 생각하면 그다지 달갑지 않은, 오히려 부담스러운 말이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부모님이 나를 위해 2년간 쓸 수 있는 용돈이 담긴 계좌를 남겨 주었다는 것이다. 이 돈으로 고등학생 치고는 넉넉하게 생활하고 있지만, 옆에 두고 먹여야 하는 고양이가 생긴 뒤로는 추가 지출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런 것을 알지 못한 채로, 내가 해 주는 저녁밥을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지만.

“자, 밥 다 됐어. 먹으러 와.”

그녀를 부르는 말에 바로 일어나서는 한달음에 달려와서 식탁에 앉는 그녀였다. 이제는 이런 풍경이 퍽 익숙해졌기 때문에, 나도 어색함을 감추지 않고 밥그릇과 국그릇을 그녀 앞에 놓았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같이 인사를 하고 밥을 먹는다. 인사는 내가 이전에 가르친 것이다. 왜 밥을 먹기 전에 ‘인사 같은 것’을 해야 되는지 설명하는 데 시간이 열 배나 걸렸다는 점은 넘어가기로 하자. 이제 그녀는 한 손에 든 숟가락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척척 밥을 퍼서 입에 집어넣고 미소시루를 마신 다음에 우물우물 씹는다. 꽤나 귀여운 모습이라, 밥을 먹다 말고 넋을 잃고 바라보는 때도 가끔 있다. 그럴 때면 그녀는 묻는다.

“왜?”

“그냥. 귀여워서.”

“이상하네.”

“이상할 거 없어. 고양이는 귀엽잖아?”

“헤에.”

대화는 주로 이런 식으로 끝난다. 헤에, 하고 말하면 그녀는 내 대답에 납득한 게 된다. 그리고 다시 식사. 나중에 부모님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떻게 설명할까 생각하면 난처해지지만,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넘어가는 게 패턴이 되었다. 밥을 다 먹고 나면, 그녀는 다시 거실로 돌아가고 나는 조금 쉰 다음 설거지를 한다. 한 명에서 두 명으로 늘어난 것뿐이라, 설거지는 힘들지 않다. 나는 설거지를 할 때 라디오를 켜 둔다. 그러면 어쩐지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밤은 부드러워, 포근한 시간 아래.” 9시를 알리는 시보가 울렸다. 거실로 나와 보니 그녀는 바닥에 누워서 잠에 빠져 있었다. 그녀를 침대에서 재우기 위해 두 팔로 번쩍 들어 방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이런 경우가 이전에도 몇 번 있어서, 그 때마다 나는 그녀를 위해 공주님을 안는 왕자님이 되었다. 내가 왕자를 자칭하면 진짜 왕자에게 실례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그 순간만 왕자님인 것으로.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서 그녀를 침대에 눕히자, 으응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가 몸을 살짝 뒤척였다. 그러면서 그녀의 손이 내 손을 건드렸다. 나는 그 때 처음으로, 작아서 연약해 보이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단순히 손이 귀여워 보여서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녀의 손이 내 손을 스쳤기 때문에 잡고 싶었다는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순간에 손을 잡은 이유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내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간 덕에, 그녀는 눈을 살짝 떠서 자극의 근원을 찾았다. 나의 얼굴을 보고, 그녀는 안심했는지 다시 잠으로 흘러든다. 볼에 살짝 키스를 해 주고 나서, 잡은 손을 놓고 방을 나와서 문을 닫는다.


나는 도저히 그녀를 품을 수 없다. 그녀가 졸린 눈으로 나를 보았을 때 순간 욕망이 고개를 치켜들었지만, 나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녀를 임신시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다. 여자의 몸에 대해 가지는 두려움 때문도 아니었다. 그녀를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도 아니었다. 나는 차마 할 수 없었다. 한숨을 길게 쉬고 나는 소파에 누웠다. 불 꺼진 거실에는 보름달의 빛이 포근하게 흘러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그녀에게 축복이 있기를, 나는 그것만을 바랐다.


*


그 뒤로 개학을 하고 3학년의 바쁜 생활을 맞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녀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왔던 대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처음에 그녀를 몇 번 불러 보았지만, 어디서도 그녀가 응답하는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정적에 휩싸였다. 나뭇가지를 자르는 소리도, 골목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활기찬 소리도, 잔뜩 물을 머금은 꽃이 피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고, 나의 반경 5m를 감싸는 것은 정적 그 자체였다. 정적이 사라진 뒤에, 나는 그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마침내 납득했다. 시간은 벌써 반 년이나 지나 있었다. 반 년 동안 나는 사랑을 알았고, 애정을 알았고, 누군가를 기른다는 게 뭔지 어렴풋이 알았다. 그런 것들을 가르쳐준 뒤에 그녀는 나를 떠났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마음으로 배웅해 주었다. 한창 날이 따스해지기 시작하는 4월의 어느 날이었다.


“고양이가 사라져 버렸다고? 그거 안 됐네.”

친구는 비꼬는 투가 담기지 않은, 정말로 걱정해 주는 듯한 목소리로 나를 위로해 주었다. 거기에 나도 고마움을 느끼고는 말했다.

“고마워. 그런데 이건 어쩌면 정해져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내가 처음 그녀를 만난 순간부터, 헤어짐은 예비되어 있었던 거야. ...그래도 즐거운 시간이었어. 정말로.”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렇겠지. 나는 운명이니 필연이니 하는 건 믿지 않지만, 네가 그렇게 믿는다면 그것도 좋다고 생각해. 이제부터 어떻게 하려고?”

“글쎄... 예전처럼 혼자서 살아야겠지. 이제 5개월만 있으면 부모님도 일본으로 돌아오고, 나도 입시 준비를 해야 하니까. 그런데 특별히 달라진 느낌은 안 들어, 한 학년 올라갔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봐, 우리는 1개월 전에는 2학년이었잖아. 1개월 사이에 많은 게 변할 리가 없어. 시간은 연속이라고 하면, 우리는 아주 조금씩 나이를 먹어 가는 게 되는 거지. 갑자기 한 살을 더 먹거나 하는 건 아냐.”

“네 말이 맞다고 생각해. 우리는 아주 조금씩 나이를 먹어 가는 거야, 깨닫지 못할 정도로 느리게. 나도 지난 2월로 17세가 되었지만, 내가 정말로 ‘17세’인지는 잘 모르겠어.”

“아, 늦었지만 생일 축하한다. 발렌타인 데이에 데리고 나올 게 아니라 생일 선물을 준비해 뒀어야 하는데, 이것 참. 시간이란 정말로 빠르게 흐른단 말이지.”

“아까는 느리게 흐른다며.”

모순에 큭큭 하고 웃었다. 친구도 그게 우스웠는지 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덩달아 나도 으큭큭 하며 크게 웃고 말았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웃음이 그칠 때까지 꾹 참았다. 나중에는 웃겨서 웃는 건지 슬퍼서 웃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마 전자라고 추측한다. 친구는 다음 생일 선물은 반드시 준비해 두겠다며 호언장담했다. 나는 생일 선물 따위야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지만, 실은 약간 쓸쓸한 기분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대신 친구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밥을 사기로 했다. 날이 너무 좋아서 모든 걸 용서해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다시 가볍게 웃었다.


**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나는 19세가 되었고 변변치 않은 대학생이 되었으며 부모님은 집에 잘 계시며 계절은 다시 겨울로 돌아왔다. 점차 기세를 더해가던 눈은 하늘 아래 모든 지붕에 쌓이며 온 세상을 하얀 솜으로 만들고 있었다. 솜에 파묻히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고 피식 웃었다. 친구는 나와는 다른 대학으로 가서 들리기로는 열심히 살고 있다는 것 같다. 원래 자기 앞가림은 잘 하는 녀석이었으니까, 내가 없어도 분명히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다. 아, 한 가지 더 얘기할 게 있다. 지난 겨울에 길에서 새끼고양이 두 마리를 주워서, 집에 데려와서 키운 지 이제 1년이 되었다. 고양이들은 주는 먹이를 먹고 무럭무럭 자라서 이제 집안을 난봉꾼처럼 돌아다니고 있다. 소파를 북북 긁어서 흠집을 내는 것은 예사에, 우유가 담긴 그릇을 쏟아서 번거롭게 손이 가게 만들지만, 나보다는 오히려 부모가 고양이에게 더 너그럽다. “네가 고양이를 데려왔기 때문에 고양이를 돌보는 건 네가 해야 한다”며 부모는 그저 고양이를 귀여워해 주기만 한다. 역시 고양이로 태어나는 게 좋았다고 후회하지만, 이런 후회를 해 봤자 남는 건 허무함밖에 없으니. 그래도 고양이를 키우는 것이 안 키우는 것보단 백배 낫기 때문에 나 또한 애정을 느끼며 고양이를 키우고 있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의문을 적어두는 것으로 마치고자 한다.

의문이라고 해도 단순한 건데, 가끔 밤에 고양이들이 자는 모습을 보면 한 네다섯 살 정도 되는 애들로 보일 때가 있다. 잘못 봤나 하고 눈을 비비고 다시 보면 고양이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 한 두 번 정도 이런 경험이 있어서, 나는 부모에게 혹시 그런 경험이 없냐고 물어 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이상한 눈초리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보지 않은 것을 봤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본 것을 보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없기 때문에, 억울함을 담아 여기에 적어 둔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매년 정월이 되면 현관 앞에 큰 참치캔이 놓여져 있는데, 이건 대체 누가 가져다 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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