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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preintes du beau rêve

<인터스텔라> 감상: 스피노자의 신과 타자 본문

etc.

<인터스텔라> 감상: 스피노자의 신과 타자

barde 2014. 12. 5. 23:57



        <인터스텔라>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단순하고 명백하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인터스텔라>는 가까운 미래의 인류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그렇다는 말은 곧, 영화관에 앉아서 편하게 팝콘을 먹고 있는 우리들 또한 그러한 미래를 겪으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물론 병충해로 식량을 구할 수 없는 사정은 하나의 가능한 미래에 지나지 않는다. 인류는 언젠가는 자신들이 터전을 일구고 살아왔던 요람, 어머니 대지를 떠나야 하며, 그를 위해서는 (영화의 시나리오대로라면) 중력 방정식을 풀어야 한다. 그리고 중력 방정식을 풀기 위해서, 누군가는 블랙홀에 들어가야 한다. 또한 이 모든 일들이 시작하기 이전에, 한 가족의 이야기가 있다.


        영화를 본 우리는, '머피의 법칙' 머피가 본 유령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 머피는 그곳에서 최초로 '타자와의 대면'을 하며, 경험에서 경향성을 발견해 낸다. Stay, 가만히 있으라는 말과 나사가 있는 곳으로 가는 좌표가 그것이다. 이 둘은 일견 모순되는 듯 보이지만, 그러나 영화의 끝에 가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물론 그러한 결론에 이르기까지 쿠퍼 일행이 겪는 과정은 매우 험난하고 또한 위험천만하다. (만은 너무 악당다운 악당같이 나온다.) 결말에 가까워올 즈음 해서 우리는, 영화가 가정하는 세계관이 시간적으로 나선형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또한 모든 인과는 시계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한 유대인 철학자, 스피노자를 떠올리게 만든다.


         스피노자는 세계가 곧 하나의 '신'이라고 말하며, 존재의 일의성과 절대적인 합리에 따라 움직이는 기하학적인 세계를 가정했다. 그에게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설령 우연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착각한 것에 불과하다. 스피노자에게 있어 필연이란 절대적인 우주의 법칙이다. 인터스텔라에서도 마찬가지의 일이 벌어진다. 쿠퍼는 반드시 우주로 나가야 했고, 우주로 나가서도 잘못된 행성을 찾아 긴 시간을 허비해야 했으며, 결국에는 블랙홀 안으로 떨어져 중력 방정식을 풀 중요한 힌트를 찾아 돌아와야 했다. 여기에는 늘 쿠퍼의 절친, 타스가 함께하는데, 이 또한 스피노자에 따르면 필연에 따라 움직한 결과에 불과하다. 영화가 우연을 가정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 우리는 인터스텔라의 우주가 스피노자의 말에 따라 움직이는 하나의 거대한 체스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머피가 경험한 '타자'는 대체 누구인가? 여기서 잠시 우리가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며, 따라서 이 질문에 어떠한 의문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잠시 잊어보기로 하자. 머피가 경험한 타자는 '타자'인가? 스피노자의 말에 따르면, 그렇다. 그러나 칸트의 말에 따르면, 머피가 경험한 '타자'가 타자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칸트의 타자는 현상계가 아닌 예지계에 존재한다. (만약 그것에 '존재한다'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면.) 그러나 머피의 타자는--어디까지나 5차원 큐브 안이지만--현상계에 존재하고 있으며, 현상계에서 현상계로, 시간을 건너뛰어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스피노자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왜냐면 칸트에게 있어 자유의지와 인과율은 이율배반으로 양립 가능하지만, 스피노자에게 있어 둘 중 하나는 사라질 수밖에 없으며, 만약 우리가 라플라스의 악마를 소유하고 있다고 했을 때, 자유의지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류가 소중히 여겨왔던 자유의지를 떠내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잠시 애도를 표하기로 하자.


        인터스텔라의 우주는 우리의 우주이기도 할까? 아니면, 그들의 우주는 우리의 우주와는 많이 다른 우주일까. 스피노자라면 전자의 손을 들어줬을 것이다. 내가 스피노자의 말과 철학을 사랑한다는 것을 제쳐놓고 보더라도, 전자의 손을 들어주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 같다. 우리의 타자는 칸트의 타자보다는 스피노자의 타자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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