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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preintes du beau rêve

<하나와 앨리스> 감상: 우리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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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와 앨리스> 감상: 우리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barde 2015. 3. 21. 06:22



  아름답다, 너무나 아름답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한편, 생각이 나서 구글에서 <하나와 앨리스>라고 검색해 보았다. 구글은 내게 다음 영화를 추천해 주었다. 나는 거기로 들어가, 사람들이 남긴 별점평을 하나하나 읽어보았다. 사람들의 별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이와이 슌지의 섬세함, 영상미"라는 높은 평가였고(숫자로 따지자면 8에서 10점), 다른 하나는 "지루하다. 순백의 변태. 스토리가 없다"는 짜디짠 평가였다. (숫자로 따지자면 2에서 0점. 0점과 2점이 비등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총점은 6.7점, '열심회원'의 평점은 7.5점이었다. 열심회원의 평점이 조금 높은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열심회원 중에서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팬이나, 일본영화의 문법에 익숙한 사람들이 많은 듯 보였다. 정말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간 나는 이 영화를 재밌게 보았고, 그래서 다음 영화에 10점을 남기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로그인을 하지 못해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이와이 감독이 다음 영화의 별점에 신경쓸 것 같지는 않다. 그야 당연한 일이지만.


  스토리, 스토리에 대해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하나와 앨리스는 삼각관계를 다룬다. 하지만 이 영화를 전형적인 연애물로 생각하면 곤란해진다. 우리는 연애물의 몇 가지 법칙에 대해 알고 있다. 하나. 남자와 여자가 등장할 것. 둘. 서로 사랑하며, 혹은 하나가 사랑하지 않더라도 나머지 하나가 둘 분의 사랑을 메울 것. 셋. 서사적이기보단 감성적일 것. 이 세 가지 법칙에서 벗어나는 연애물은 많지 않다. <하나와 앨리스>로 말할 것 같으면, 글쎄, 언뜻 보면 세 가지 조건을 전부 만족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이 영화에는 셋. 이 결여되어 있다. 뭐라고? 이와이 슌지 영화에 감성이 없다고? 묻고 따질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워워, 잠시 진정해 달라. 나는 이와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특유의 감성을 없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하나와 앨리스>의 경우, 그것은 굉장히 절제되어 있으며, 소녀들이 뛰고 달리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것을 '감성적'이라고 말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하다. 말하자면, 우리는 신파극을 보고 있지 않았다. 우리가 본 것은 하나의 완성된 예술작품이었다.


  잠시 '빛'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감독의 전작 <러브레터>와 함께 '화이트 이와이'로 분류되는 <하나와 앨리스>이지만, 거기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바로 빛의 밝기와 다채로움이다. 촬영 매체가 필름에서 디지털로 옮겨갔기 때문에 그런 차이가 발생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러브레터>가 홋카이도의 설경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하나와 앨리스>는 반대로 밝은 도쿄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두 소녀가 그들의 뒤로 벚나무가 피어 있는 다리를 건너가는 장면은, 아마 이 영화의 백미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그 밖에 아름다운 장면은 워낙 많지만, 그러한 '아름다움'을 가능하게 만든 건 역시, 화면 밖으로 쏟아질 듯한 햇살과, 자연광을 최대한 이용한 연출, 그리고 이 영화를 유작으로 사망한 시노다 노보루 촬영감독의 오랜 노하우 덕일 것이다. (이와이 감독은 시노다 노보루 촬감이 사망하고 나서 식음을 전폐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 뒤로 영화의 스타일이 달라지는 것을 생각해 봤을 때, 실제로 그는 <하나와 앨리스> 이후 <뱀파이어>로 복귀할 때까지, 장편을 찍지 않았다, 이 설은 나름의 설득력을 가진다. 그러나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와이의 주변 사람들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빛에 대해 어떤 사실을 알고 있을까? 빛이 밝다는 것? 혹은, 빛과 어둠으로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것? 글쎄, 물론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들은 틀리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영화에서 '빛'이 예술적인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단지 밝고 어두운 것으로는 성립할 수 없다. 이를테면 마지막에 아오이 유우(아리스가와 테츠코 역)가 발레를 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거기서 우리는 조명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단지 조명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지붕 위에 뚫린 창으로, 그리고 사방에서 들어오는 빛으로 공간은 충만해 있다. 여기서 우리는 공간 자체가 하나의 '무대'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비록 그녀는 발에 검테이프로 종이컵을 감아 발레슈즈를 대신하고, 반바지도 입지 않았지만, 그곳에서, 빛으로 충만한 공간에서 그녀는 밝게 빛나고 있었다. <하나와 앨리스>는 이 장면을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치 <러브레터>가, 마지막에 나카야마 미호가 아무도 없는 설원을 향해 「お元気ですかあ!」를 외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것이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철학이다. 흔히들 '영상미'로 일컬이지는, 바로 그러한 바대로.


  정리하자면, <하나와 앨리스>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담긴 작품이다. 그러한 노력을 우리는, 물론 배우들의 열연도 열연이지만, 밝게 빛나는 햇살과, 멋지게 그려지는 배경(가마쿠라의 그 신은 정말로 이와이가 아니면 그려낼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세일러 만년필을 보고, 아, 여기가 중요한 포인트구나 하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섬세한 편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마침 이와이 감독의 신작 '애니메이션' <하나와 앨리스 살인사건>이 5월에 국내에 개봉한다고 하니, 11년이 지난 지금, 이와이 감독의 영화철학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계승된 유산은 무엇인지 확인해 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이 "이와이는 내 후계자다"라고 극찬한 만큼, 지브리를 사랑하지만 애니메이션을 즐겨 보지 않는 관객이라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극장에서 보아야 한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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