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mpreintes du beau rêve
타인의 삶, 선한 사람을 위한 소나타 본문
‘타인의 삶’은 2006년에 개봉한 영화다. 영화가 다루는 시대가 동독이 몰락의 징후를 드러내던 시기, 즉 1980년대 중반임을 생각해 보면, 20년이라는 ‘숙성’의 시간을 거쳐 감정을 절제한 ‘모범적인’ 영화가 독일에서 나온 것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관찰자’의 시선을 견지한다. 비슬러가 죄인을 취조하는 장면부터 시작해서 “인간적이지 않다는” 표현을 한 학생을 슬그머니 체크하는 장면, 쌍안경을 들고 연극을 ‘감시하듯’ 감상하는 장면 그리고 불온한 시인을 도청하라는 명을 받고 집에 잠입하는 장면까지 정적이면서도 긴장감 있게 흘러간다.
하지만 그가 드라이만과 알버트와의 대화를 듣고 크리스타와 드라이만의 내밀한 관계를 엿듣게 되면서 상황은 약간 누그러진다. 드라이만의 생일파티로 돌아가서, 혼자 와인을 마시고 있던 알버트에게 드라이만이 다가가 말을 건다. 알버트는 다만 브레히트를 읽고 있다고 대답하며, 여기 앉아 있으면 ‘사기꾼’이 된 듯한 느낌이 든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에게 선물을 건네는데, 책이라고 생각했던 예상을 깨고 포장을 벗기니 ‘선한 사람을 위한 소나타’ 곡집이 나온다.
나중에도 밝혀지지만, 이 작은 곡집은 시인과 슈타지 형사의 ‘매개물’이 되는데, 레닌의 잠언과 더불어 굳건히 ‘감시’의 위치를 고수할 줄 알았던 형사의 마음을 움직인다. 또한 브레히트를 읽는 장면에서 시 낭송이 이어지며 몰입한 채로 책을 읽는 형사의 모습에서, 그의 마음 속에 새로운 ‘마음’이 자라나고 있음을, 어찌 보면 ‘윤리’라고 해도 좋을 것이 자라남을 관객은 알아챌 수 있다. 허나 고독함과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한 알버트의 자살-‘스스로 자신을 죽이는 행위’-이후 상황은 극적으로 흘러간다.
알버트의 자살에 망연해 하는 드라이만은 글을 쓸 의욕도 없어져 잠시 침체기를 갖는다. 이 와중에 크리스타는 장관의 관계 요청에 응하기 위해 그에게 거짓말하고 밖으로 나가는데, 우연히도 그녀는 비슬러와 술집에서 마주치게 된다. 보드카를 몇 잔이나 마셔 술기운이 오른 비슬러는 그래도 차분하게 그녀에게 다가가 용기를 내어 “관객으로써, 당신이 예술을 위해 남을 속이는 일은 두고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 드라이만과 극적인 화해를 이루게 된다.
이 와중에 드라이만이 아까 언급한 ‘선한 사람을 위한 소나타’를 연주하는데, 그 선율이 비슬러의 마음을 움직여 기어코 눈물 한 가닥이 그의 눈에서 떨어지게 한다. 크리스타는 뒤에서 드라이만의 등을 어루만지고 있는데, 화해는 했지만 긴장은 감돌고 있음을 드러낸다. 드라이만은 하우저의 도움을 받아 ‘슈피겔’지에 동독의 실상을 고발하는 글을 쓰기로 마음먹는다. 물론 그의 집을 샅샅이 도청하고 있는 비슬러는 이 사실을 깨닫고 검문소에 전화를 걸어 계획을 좌절시킬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이미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다른 길’로 가 버린 탓일까, 그는 “한 번만 봐 주겠다”는 말을 남기며 국경 통과를 용인해준다. 그러자 자신의 집이 도청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버린 드라이만과 그의 일행은 신나서 샴페인을 터뜨리기도 하며 계획을 ‘거리낌 없이’ 발설하기도 한다. 비슬러는 이를 “독일민주공화국 40주년을 위한 연극을 준비함”이라고 보고서에 적어 넣는다. 조수가 그들의 심상치 않은 대화에 대해 딴지를 걸어도 “자네는 영리한 사람이 아니었나? 질문하지 말게.” 하며 가로막는다.
비슬러는 이미 심정적으로 드라이만 일행에 동조하게 된 것이다. ‘슈피겔’지에 실을 글은 순조로이 작업이 이루어진다. 슈타지도 비슬러의 거짓 보고서 덕분에 그를 수상하게 여기지 않고(정확히 말하면 ‘물증이 없고’), 크리스타와의 결혼 생활도 순조로이 이뤄지는 듯 보인다. 여기서 ‘보인다’라고 쓴 것은, 그녀가 실은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고 있고, 장관 대신 드라이만을 선택함으로써 장관이 그녀의 빌미를 잡을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장관은 그녀를 이용하기 위해 불법 약물 조제로 고발한다.
상황은 이제 끝으로 치닫는다. 그녀는 슈타지에 끌려가 심문도 받고 남편의 비밀을 폭로하라는 강한 압박에 시달리는데, 결국 그녀는 마음의 무너짐을 이기지 못하고 비밀정보원이 되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만다. 하지만 차마 문지방 밑에 ‘그 작은 타자기’가 있다고 말하진 못한다. 그래서 첫 번째 수색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드라이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나, 그루비츠의 의심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왜냐면 그는 글의 저자가 드라이만임을 육감으로 알아챘기 때문이다.
계속 성과를 내지 못해 경고를 받는 비슬러는 그루비츠의 명에 따라 그녀를 심문하러 가는데, 거기서 그녀는 비슬러의 회유에 굴복해 타자기가 문지방 밑에 있다고, 서재와 거실 사이에 있다고 실토한다. 그리고 두 번째 수색이 이어진다. 하지만 비슬러는 수색이 이뤄질 것임을 알고 타자기를 다른 곳에 숨겨두는 일을 빼먹지 않았다. 영화의 결정적 순간, 크리스타는 도로로 달려 나가고 그루비츠는 문지방 밑에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음을 발견한다. 그녀는 차에 치여 죽는다/자살한다.
수사는 종결되고, 비슬러는 한직으로 강등된다. 영화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기 시작한다. 4년 7개월 후, 비슬러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음을 라디오로 듣게 되고, 더 이상 이곳(편지를 개봉하는 부서)에 있을 필요가 없음을 깨닫고 훌쩍 떠나버린다. 다시 2년이 지나고, 같은 극장에서 다른 배우, 다른 연출-원래는 노동자들이 대화를 나누는 식이었다-로 연극이 상연되고, 드라이만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차마 억누르지 못해 밖으로 나오고 만다. 거기서 장관과의 실랑이가 생기고, 드라이만은 “당신같은 사람들이 나라를 다스렸다니” 하며 자리를 뜬다.
그리고 드라이만은 장관의 말을 통해 자신의 집이 도청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슈타지-문서보관소로 가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다. 거기서 HGW XX/7라는 사람을 발견하고, 그가 자신의 계획을 묵인해 주었음을 알고 그를 찾아 나선다. 비슬러는 일자리를 잃은 뒤에 신문 배달부로 생애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드라이만은 택시 안에 앉아 그를 멀리서 바라보나, 차마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흘러가는 시야에서 그가 카트를 끌고 가는 모습을 본다.
2년 후, 비슬러는 우연히 ‘칼 맑스 서점’에서 드라이만이 ‘선한 사람을 위한 소나타’라는 책을 썼음을, 많은 호평을 받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는 서점에 들어가 책을 펼쳐 보는데, 거기엔 “HGW XX/7에게 고마움을 전하며”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그는 점원에게 가 계산을 하며 포장해 드릴까라는 물음에 “아니요, 이건 저를 위한 겁니다.”라고 대답한다.
레비나스의 윤리는 흔히 타자의 윤리라고 일컬어진다. ‘타자라는 얼굴’이 내게 말을 건네는데, 그는 결코 주체가 소유할 수 없는 자이며 주체는 그의 ‘명령’에 저항할 수 없다. 어쩌면 타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인간이 타자의 윤리를 저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 비슬러는 비록 도청이라는 그릇된 수단을 사용했지만 타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인간은 바뀌지 않는다”는 비관과 체념 속에서도 그는 말을 들을 줄, 음악을 들을 줄 알았고 그랬기에 타자와 ‘진정으로’ 만날 수 있었다. 요컨대 ‘선한 사람을 위한 소나타’는 타인에 대한 윤리가 마음 속에 씨앗처럼 잠들어 있는-그리하여 언젠가 피워낼 수 있는-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마법의 선율’이 아닐까. 영화는 인본주의적인 관점으로 그에 대한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