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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preintes du beau rêve

무자비한 미녀 본문

etc.

무자비한 미녀

barde 2013. 2. 28. 18:21

우연히 '무자비한 미녀'라는 그림을 접하게 되고 또 그의 모티브가 된 시를 접하고 나서, 내가 읽고 있는 소설과도 연관되어 있는 '요정'의 특징적인 부분에 대해 서술해 보자는 마음이 들어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다. 우선 원 시를 읽어보기로 하자.


La Belle Dame Sans Merci   - J. Keats


Ah, what can ail thee, wretched wight, 
Alone and palely loitering; 
The sedge is wither'd from the lake, 
And no birds sing. 

오, 왜 그토록 번민하고 있나요, 갑옷입은 기사여
창백하게 홀로 떠돌고 있나요?
사초는 호숫가에서 시들고
새들도 노래하지 않는데.

Ah, what can ail thee, wretched wight, 
So haggard and so woe-begone? 
The squirrel's granary is full, 
And the harvest's done. 

오, 왜 그토록 번민하고 있나요, 갑옷입은 기사여
그토록 여위고 슬픔에 잠기어서.
다람쥐의 곡물창고는 가득차고
추수도 끝났는데.

I see a lily on thy brow, 

With anguish moist and fever dew; 
And on thy cheek a fading rose 
Fast withereth too. 

나는 봅니다. 그대의 이마 위에서
고뇌와 열병의 이슬로 젖은 백합꽃을
그리고 그대의 뺨에 희미하게 시드는
장미꽃도.

I met a lady in the meads 
Full beautiful, a faery's child; 
Her hair was long, her foot was light, 
And her eyes were wild. 

나는 초원에서 한 아가씨를 만났소.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요정의 딸이었소.
그녀의 머리칼은 길고 그녀의 발은 가벼웠으며
그녀의 눈은 야성적이었소.

I set her on my pacing steed, 
And nothing else saw all day long; 
For sideways would she lean, and sing 
A faery's song. 

나는 그녀를 천천히 걷는 내 말에 태웠소.
그리고 종일 다른 것은 보질 않았소.
비스듬히 그녀가 몸을 기대어
요정의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오.

I made a garland for her head, 
And bracelets too, and fragrant zone; 
She look'd at me as she did love, 
And made sweet moan. 

나는 그녀의 머리에 꽃다발을 만들어 주었소.

그리고 팔찌와 향기로운 허리띠도
그녀는 마치 나랑 사랑하는 듯 바라보며
달콤한 신음소리를 내었다오.

She found me roots of relish sweet, 
And honey wild, and manna dew; 
And sure in language strange she said, 
I love thee true. 

그녀는 나에게 달콤한 풀뿌리와
야생의 꿀과 감로를 찾아주며
묘한 언어로 분명하게 말했소.
'당신을 진정 사랑해요.'

She took me to her elfin grot, 

And there she gaz'd and sighed deep, 
And there I shut her wild sad eyes-- 
So kiss'd to sleep. 

그녀는 나를 요정 동굴로 데려가

거기서 눈물 흘리며 비탄에 가득찬 한숨을 쉬었소.
거기서 나는 그녀의 야성적인 눈을 감겨주었소.
네 번의 입맞춤으로.

And there we slumber'd on the moss, 
And there I dream'd, ah woe betide, 
The latest dream I ever dream'd 
On the cold hill side. 

거기서 그녀는 나를 어르듯 잠재웠고
거기서 나는 꿈을 꾸었소
아, 슬프게도!
내가 마지막으로 꾼 꿈. 이 싸늘한 산 허리에서

I saw pale kings, and princes too, 

Pale warriors, death-pale were they all; 
Who cry'd--"La belle Dame sans merci 
Hath thee in thrall!" 

나는 보았소. 창백한 왕들과 왕자들을

창백한 용사들도. 그들은 모두 죽은듯 창백했소.
그들은 부르짖었소
'무자비한 미녀가 그대를 노예로 삼았도다!'

I saw their starv'd lips in the gloam 
With horrid warning gaped wide, 
And I awoke, and found me here 
On the cold hill side. 

나는 보았소. 어스름 속에서 섬뜩한 경고를 하는

그들의 굶주린 입이 크게 벌어진 것을.
그리고 나는 잠에서 깨어 내가 여기
이 싸늘한 산허리에 있음을 알았소.

And this is why I sojourn here 
Alone and palely loitering, 
Though the sedge is wither'd from the lake, 
And no birds sing. 

이것이 내가 홀로 창백한 모습으로 떠돌며
여기 머무는 이유라오.
비록 사초는 호숫가에서 시들고
새들도 노래하지 않지만.


이 시를 읽고 나면 혹자는 팜므 파탈의, 너무나 매혹적이라 빠져들 수밖에 없는-비록 그 길이 파멸로 통하는 길일지라도-여인의 모습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접근해 보기로 한다. 바로 '요정'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으로.



우선 이 그림을 보면, 요정의 노래에 빠져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기사의 모습과 말 위에서 감미로운 언어로 기사를 홀리는 요정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처음에 요정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을까? 가능성 있는 추측으론 요정이 기사를 파멸시킬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다는 것과, 누구에게나 사랑을 느끼는 사랑스러운-동시에 끝없는 갈구를 통해 주이상스를 취하는-요정이 기사를 만나 자신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접근했다는 추측이 있을 수 있다. 나는 두 번째 추측을 기본 소재로 삼아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겠다.


요정(fairy)과 관련된 소설이나 시를 자주 접해본 사람이라면 요정이 얼마나 짓궂고 장난기 넘치는 존재들인지 쉽게 알 수 있으리라 본다. 그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히 알지조차 못한 채 사람들을 골탕먹이고 또 곤경에 빠뜨린다. 예를 들면, 아이를 유괴해 숲 속에 버려두거나 남의 집 식기를 사탕으로 바꾸거나 등등. 이러한 요정의 행위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악 기준으로 분별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곤경에 처할 따름이다. 우선 요정들이 인간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도 없거니와, 과연 요정들이 인간의 잣대를 받아들일 것이냐도 문제다. 물론 요정들은 인간이 뭐라고 하든 신경쓰지 않는다. 그들에겐 그들의 가치관과 잣대가 존재하고, 인간이 인간을 보는 것만큼 인간에게 관대하지도 않다.


이러한 요정과 인간의 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날 때가 바로 요정 군단이 인간의 영토로 침범해 들어올 때다. <조나단 스트레인지와 마법사 노렐>을 보면, 원래 인간이었지만 요정에게 납치돼 지상 제일의 마법사가 된 레이븐 킹이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귀족의 복수를 위해 북영국을 점령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그의 명분을 가지고 군대를 일으켜 농가를 침범하고, 그들 중 한 요정은 불행한 운명에 빠진 여인을 아주 잔인하게-온 몸의 피를 몸 밖으로 뽑아내-살해한다. 그렇다고 요정들이 살육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단지 그들의 '유희'를 위해, 그들만의 방식으로 사람들을 부릴 뿐이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 요정들은 인간이라는 맥락으로 파악될 수 없고, 추측컨대 장난기 많고 때론 짓궂은-그리고 잔인한-존재로밖에 설명할 도리가 없다.



'무자비한 미녀'에 등장하는 여인도 마찬가지로 요정이다. 그녀가 기사의 말에 타고 요정의 노래를 부르거나 그를 사랑하는 듯 바라보며 달콤한 신음소리를 낸 것이나 묘한 언어로 분명하게 "당신을 진정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녀의 마음을 단순한 거짓으로 보긴 힘들다. 물론 나중에 '창백한 왕과 왕자들 그리고 용사들'이 그에게 "무자비한 미녀가 그대를 노예로 삼았도다!"라고 부르짖는 것을 보면 그녀의 사랑이 그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거쳐 다른 이에게도 향했고, 또 그 결과가 참혹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그녀의 '무자비함'이 드러난다. 그녀는 치명적일 정도로 아름다우며 그 미모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낚았지만 아직도 '뭔가'를 갈구하고 있다.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여기서 우리는 주이상스(joissance)라는 개념을 가져올 수 있다.


주이상스는 "고통스럽지만 멈출 수 없는 극치의 즐거움을 의미하는 프랑스어"로서 정신분석가 라캉의 용어이기도 하다. 일반적인 즐거움과는 다르게 주이상스는 육체적이고 성적인 것으로써 다수가 '즐거운 것'이라고 합의하는 차원과 다른 고통스럽고 외설적인 것이다. 그녀는 마치 꽃과도 같이 아름다운 요정의 딸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아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그렇게나 많은 사랑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사랑을 찾아 헤맨다. 그런 그녀의 눈 앞에 기사가 나타나면, 그녀는 몸과 마음을 다해 감미로운 언어를 속삭이며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는 고통스러운 것임을 자각한다. 그리하여 요정 동굴에서 그녀는 눈물을 보이며 비탄에 가득찬 한숨을 내쉰다. 물론 여기서 시간의 흐름이나 남자의 처지는 고려되지 않는다. 그녀를 나르시시즘적 존재로 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이기적이며 그렇기에 너무나 요정답다. 마침내 남자는 이미 겨울이 되었음을, 사초는 시들고 새들은 더이상 노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챈다. 그리하여 불행한 기사는 홀로 산허리를 떠돌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이상스라는 위험을 깨닫게 되지만, 막상 그것이 다가올 때는 그 위험을 피할 수 없음을 어렴풋이 자각하고 있다. 키츠는 요정을 통해 그것을 형상화했지만, 실존의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는 인간은 시가 바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뼈저리게 아픈 진실을 은유를 통해 드러냈음을 깨닫는다. 이것과 비슷한 소설로 안톤 체홉의 <귀여운 여인>을 들 수 있다. 올렌카는 "언제나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었으며,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아가씨"다. 그녀는 아버지를 사랑한 적도 있고 숙모를 사랑한 적도 있으며, 여학교에 다닐 때는 프랑스어를 가르쳤던 남자 선생님을 사랑하기도 했다. 그러다 쿠킨이라는 사내를 만나 그의 불행을 보며 그를 사랑하게 되고, 그가 죽고 나자 절망하지만 또 다시 새로운 남자를 만나 사랑을 나누게 된다. 이렇게 그녀의 사랑은 식을 줄 모르고, 마침내 그녀가 예전에 사랑했던 수의사의 아들 (그의 아내가 낳은) 을 사랑하게 된다.


앞에서 소개한 시와의 차이점은, 요정은 주이상스를 취하기 위해 초원을 떠돌지만 올렌카는 다른 이를 사랑-연민이나 동정심 같은 여러 형태를 띠고 나타나는-할 뿐이다. 이는 '고통스럽거나 외설적이지' 않으며 그녀의 삶의 굴곡만큼이나 다양한 형태를 띠고 그녀 앞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사랑이 없으면 그녀는 쉽게 좌절하고 시무룩해지지만, 언제든지 그녀는 다른 이에게서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그녀가 타나토스적인, 죽음 충동으로 나타나는 사랑이 아닌 생기로 가득찬 사랑을 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녀에게 있어 삶의 즐거움은 사랑을 통해 발산되는 생기 그 자체였고, 그 생기가 그녀를 싱그러운 한 떨기 꽃과도 같이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이는 남자와의 연인 관계에서 벗어나 수의사의 아들을 모성애를 다해 사랑하는 모습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그녀는 '사랑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과연 어떤 사랑을 '진정한' 또는 '추구해야 할' 사랑이라 볼 수 있을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주이상스는 강박적인 것, 치명적이며 주체를 억제할 수 없는 바로 그 지점에서 자라나고 '생기'는 다양한, 주로 동질감을 느끼는 계기를 통해 생성되는 사랑 속에서 자라난다는 점이다. 이는 곧 사랑이 '내가 어떻게 생각한다고' 그에 맞춰, 마치 계획서를 작성하고 거기에 맞춰 행동하듯이 이뤄질 수 없는 것임을 말해준다. 사랑이란 본디 욕망의 발현의 한 모습이고, 그 욕망을 어찌할 수 있는 자는 초인 (니체의 초인과는 다른) 뿐이다. 아무리 호르몬의 흐름을 연구하고 뇌파를 분석하고 단층촬영을 해도 이러한 사랑의 오묘한 신비는 밝혀낼 수 없을 것이다. 이는 곧 '안드로이드도 사랑할 수 있는가?'라는 흥미로운 주제를 불러오는데, 차후 분석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 분석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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