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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preintes du beau rêve

봄의 전령 본문

novel

봄의 전령

barde 2014. 5. 17. 05:36

이로리 주변을 뱅그르르 돌며 뛰어노는 아이들이 셋 있었다. 녀석들은 서로의 꽁무니를 잡으려고 열심히 마룻바닥을 소리 없이 뛰어다녔다. 나는 편의상 이들을 “봄의 전령”이라 이름붙였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봄의 전령이 나의 집에 가져다 준 작은 기적에 관한 이야기다. 재미없더라도 부디.


나는 심하진 않지만 만성적으로 앓아야 하는 폐병에 걸려 다니던 학교를 휴학하고 집에서 쉬는 생활을 계속해 오고 있었다. 집에서 쉬는 것은 어머니의 잔소리와 눈치를 항시 받아야 하기에 그다지 건강에 좋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일단 내가 병에 걸린 이상 잔소리와 눈치를 큰 걱정으로 마주할 필요는 없었다. 여자—물론 모든 여자가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란 병에 걸린 사람을 보면 갑자기 모성애가 솟아나 곁에서 돌봐주거나 평소라면 절대 도와주지 않았을 각종 귀찮은 일들을 도맡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왜 여자가 특정한 패턴대로 움직이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이 나에게 적잖은 도움이 된다면, 그것을 이용할 마음은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나는 기묘한 공생관계를 적어도 폐병이 잠잠해질 때까지만이라도 이어 나가기로 결심했다.


처음엔 그다지 힘겹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침대맡에 가볍게 차린 정갈한 밥상이 놓여 있다. 나는 몸을 일으킬 것도 없이 잠자리에 편하게 앉아 밥을 먹기만 하면 된다. 물을 마시기 위해 안채를 향해 물 좀 가져다 달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 물 또한 밥상 곁에 컵과 함께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쁘지 않다, 하고 나는 생각했고, 어쩔 때는 집에서 강장동물이라도 된 것처럼 먹고 자고 책을 읽는 생활이 지속되기를 바라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그러니까 폐병이 잠잠해지면 곧 떠나야 하는 특수한 상황이었다. 내가 아무리 집안에서 환영을 받는 존재라 하더라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먹고 쉬기만을 반복하는 사람이 특별한 이유도 없이 집에 계속 박혀 있는 것은, 대단한 인내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나는 그러한 인내를 감수할 용기도 의도도 없었고, 따라서 부러 “이제 학교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니” 하고 말하지 않아도 허름한 자취방으로 돌아갈 의사로 충만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서재에 걸터앉아 제법 두께가 되는 소설책을 열중해서 읽고 있는데, 안채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어머니가 빨래한 옷을 정리하는 소리로 여기고는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한 차례 더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 나는 어머니가 장을 보러 집에서부터 두 정거장 떨어져 있는 시장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읽던 소설책을 내려놓고 이른 봄이라 나른한 몸을 일으켰다. 안채를 살펴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허나,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이로리 옆에서 열심히 몸을 꿈지럭대며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발버둥치는 둥그렇고 커다란 귀가 온 몸을 가리는 존재를, 나는 뭐라 이름붙여야 할지 고민하며 지그시 바라보았다. 크기는 아마 손가락 세 개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신체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둥그렇고 커다란 귀—내 눈에는 귀로 보였다—는... 어딘가의 마스코트 캐릭터를 떠올리게 했다.


일단 작은 생물을 발견하자마자 나는 쭈그려 앉은 뒤에 조심스레 손을 뻗어 생물의 귀를 만져 보려고 했다. 하지만 분명히 귀로 보이는 곳까지 손가락을 뻗었음에도 불구하고, 손 끝에 만져지는 감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환상? 아직 이른 봄이지만 벌써 아지랑이가 이로리 옆까지 피어온 것인가? 어처구니없음에서 비롯되는 온갖 물음들이 나를 사로잡았고, 내가 물음들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에 작은 생물, 아니 존재는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안방을 향해 맹렬히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빠르게 몸을 움직이는 모습에 정신이 든 나는 작은 존재가 거실을 가로질러 안방의 문지방을 ‘아무런 저항 없이’ 통과하는 광경을 똑똑히 바라보았고, 여전히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로 큰 귀를 펄럭이며 서랍장 밑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약간은 멍한 정신으로 지켜보았다. 갑자기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갑자기 사라져 버리다니. 참 웃긴 요정—저걸 요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도 다 있었다.


나와 요정과의 만남은 그 이후에도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시작으로 이어졌고, 일주일이 지난 뒤—이 때부터 바람이 따뜻해지고 기분 좋은 흙냄새가 바람에 전해져 왔다—에는 급기야 요정의 수가 하나 더 늘어 두 배로 정신이 없어졌다. 하필이면 왜 이 집을 택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요정과 조우한 이상 나는 요정의 상대가 되어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나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씨앗의 형태로 잠들어 있던 신비주의와 환상적인 요소가 요정과의 조우로 인해 발아한 것은 아닌지. 여하튼 집 구석구석을 뛰어다니며 넘어졌다 굴렀다 하지만 정작 집에는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는 요정을 바라보는 일이 나의 소소한 일과가 되었다. 나는 어머니가 있을 때도 개의치 않고 요정이 화장실로 달려가거나 꽂혀 있는 책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는 모습을 주의깊게 바라보았고, 그것이 가끔 주의를 받을 때도 있었지만 “집 안을 걸으면 운동도 되고 좋다”는 핑계를 대며 요정을 보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기묘한 공생관계라고나 할까, 나는 아무 자격도 없이 공생관계의 대물림을 나와 어머니 사이에서 나와 작은 생물 사이로 이관했고, 이제 나는 돌보아지는 처지에서 돌보아야 하는 처지로 완전히 상황이 역전되었다. 하지만 작은 생물들은 아무래도 현실의 물리 환경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 같았으므로, 내가 특별히 신경써야 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세 마리로 늘어난 요정을 보는 나를 어떤 자세로 대해야 할지는 고민해 볼 필요가 있었다. 진지하게 말해서, 남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환상을 본다는 것은 너무나 현실감이 강해 차마 현실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현실에서 ‘비정상’이었기 때문이다. 시치미 뚝 떼고 요정 따위 보이지 않는다고 태연한 얼굴로 있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집 안에만 있는 생활이 지겨워졌다는 이유로 산자락에 위치한 온천으로 거취를 옮길 수도 있었다. 나는 여전히 내 눈 앞을 데굴데굴 굴러가고 있는 요정을 앞에 두고 곰곰이 ‘자세’에 대해 생각했다.


계절은 봄의 한가운데, 집 앞에 벚꽃이 만개해 산들바람에 꽃잎을 흩날리는 시절이었다. 나는 끝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계속 집에서 체류하며 책을 읽거나 요정을 관찰하거나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행히 나의 변명이 통했는지 어머니는 더 이상 내가 집안을 서성거리는 이유에 대해 묻지 않았고, 한결 여유로운 마음으로 나는 요정을 관찰할 수 있었다. 관찰한다고 해봤자 스케치북과 4B 연필을 들고 요정의 겉모습을 자세히 스케치하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과학자’의 자세로 철저히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요정의 행태나 습성을 분석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단순히 무료했던 마음을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요정을 관찰한다’는 수단을 택했고, 거기에 만족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제 요정은 집안 탐사가 다 끝났는지 자신들이 제일 재밌다고 생각한 곳—안방, 서재, 부엌, 창고—에서 서로 무리를 지어 뒤치락엎치락 하며 딴에는 즐겁게 놀았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누그러지는 기분이었다.

언젠가는 요정이 뭘 먹는지 궁금해져서 부엌에 들어간 요정을 자세히 관찰한 적도 있다. 부엌에 들어간 요정들은 비스듬히 놓여진 도마를 미끄럼틀 삼아 주르르 미끄러져 내려오며 놀기도 하고, 냉장고나 밥솥을 주의깊게 바라보다 예의 ‘통과’로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며 추운 듯 양 팔로 몸을 부여잡고 가볍게 떨었다. 하지만 아무리 지켜보아도 요정이 뭘 ‘먹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분명히 살아 있는 존재라면 뭔가를 섭취해야 영양분을 태워 생기를 낼 텐데, 요정은 그와 같은 과정이 아예 결여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어쩌면 요정들은 숲 속 깊은 곳에 있다고 알려진 영험한 기운을 담은 호수의 물을 마시며 ‘기’를 충전할지도 모른다. 그 모습을 상상하자 호수의 넓음—어림잡아 폭이 50m는 될 것이다—과 요정의 작음이 대비되어 이 물은 요정이 평생 마셔도 다 못 마시겠구나, 살짝 웃음이 나왔다. 요정의 수명이 얼마나 될지는 한철 살다 가는 인간인 나로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마을 하나가 번성했다 점차 쇠락하는 시간보다는 길 거라고, 막연히 생각해 보았다.


툇마루에서 밥을 먹고 있자면 벚꽃잎이 국이나 밥에 떨어져 내리는 시기에 나는, 도저히 나을 것 같지 않던 폐병이 점차 호전되고 있음을 몸으로 느끼고는 전율했다. 역시 집에서 가만히 쉬는 게 답이었나. 새삼 이렇게 될 때까지 자취방에서 근근히 버티며 병을 끊임없이 악화시키던 나를 생각하며, 미래의 나는 후회하는 마음에 한숨쉬었다. 그래도 폐병이 낫고 있다는 건 청신호 중에서도 아주 좋은 신호였다. 의사에게 약을 받아 매일매일 먹으면서도 과연 이게 나을 수 있을까 거듭 의심하던 나였지만, 실제로 약이 효과가 있었음을 확인하자 의사와 현대 의학에 대한 신뢰가 무한히 상승하는 것을 조금 웃음을 흘리며 느꼈다. 구원이란 없다고 굳게 믿어왔던 나였지만, 이런 나에게도 다시금 기회가 주어지는구나 하는 감격과 함께 병이 나을 때까지 나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던 부모님에 대한 감사가 울컥 솟아올랐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게 된 나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서재에 들어앉아 벚잎이 흩날리는 모습을 순수히 퍼지는 기쁨으로 바라보았다.


그로부터 며칠 지나서였을까, 언제나 보이던 요정이 보이지 않음을 눈치챈 나는 요정들이 즐겨 찾던 장소인 안방이나 서재 등을 주의깊게 살피며 혹여 요정이 집을 떠나버리지는 않았나 노심초사했다. 다행히도 요정들은 마당에서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봄의 마지막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툇마루에 앉아 요정들이 서로의 꽁무니를 잡기 위해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달음박질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여름이 오면 이것들도 떠나버릴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소리소문 없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사라질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내게 무슨 힘이 있는 건 아니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봄을 조금이라도 연장하고 싶었다. 하늘에 뿌리면 봄이 길어지는 마법의 가루라도 없나. 벚나무 가지를 마당에 묻어두면 봄이 조금이라도 길어질까. 온 몸으로 생기와 즐거움을 발산하고 있는 요정들을 보며, 나는 처음으로 혹시 요정이 병을 호전시킨 게 아닌가 하는,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착상을 떠올리고는 혼자서 미소지었다.


나는 생각만 해 두었던 벚나무 가지를 마당에 묻어둔다는 아이디어를 끝내 실행하지 않았고, 입하가 다가오자 변함없이 여름은 자신의 얼굴을 대지에 들이밀었다. 이제 긴팔옷을 입고 낮에 돌아다니면 더워지는 시기였다. 어머니는 나의 폐병이 눈에 띄게 호전되었음에 진심을 담아 기뻐했고, 아버지 역시 “아무렴, 내 아들이니 당연하지.” 하고 말하며 무뚝뚝한 표정을 하면서도 병색이 점차 나의 얼굴에서 사라져감을 기뻐하셨다. 나는 이제 슬슬 자취방으로 돌아갈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 두 달 동안은 계속해서 약을 먹어야 했지만, 일상생활을 하기에는 전혀 무리가 없었기 때문에 바로 자취방으로 돌아가더라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나의 생각을 듣더니, 그러지 말고 한 달 정도 더 집에 있다가 차라리 여행을 떠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 오셨다. 나는 딱히 생각해 둔 여행지가 없었으므로 “여행을 떠난다면 어디가 좋을까요.” 하고 물어보았고, 부모님은 잠시 생각하더니 너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답해주었다. 제안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며 나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공부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부모님이 어떤 계기로 갑자기 변하게 됐는지 궁금함을 느꼈다. 내가 폐병에 걸리고 나자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일까, 어쩌면 부모님은 나에게 여행을 말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여행을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부모님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 했다.


골든 위크의 마지막 날이기도 한 어린이날이었다. 무료한 기분으로 창 밖을 죽 응시하고 있던 나는 바깥이라도 나가 걷자는 생각을 하고 한결 가벼워진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서재에 가만히 서서 책장을 응시하고 있으니 책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려는 요정의 잔상이 남았다. 고개를 아래로 숙여보자 열심히 큰 귀를 펄럭이며 뛰어다니던 요정들의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나는 잠시 그대로 서서, 요정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과거에 내가 느꼈던 감정을 복원하려고 애써보았다. 5분 정도 과거의 기억을 헤집고 있자니 결실이 있었다. 요정들을 바라보며 내가 느꼈던 순수한 기쁨—그것은 요정들이 병에 걸려 무기력해진 나에게 주었던 하나의 작은 축복이었다. 요정들은 서재에 잠겨 간헐적으로 기침을 내뱉던 나를 끌어내어 집안 이곳저곳을 걸어다니게 만들었다. 그리고 무기력함에 머리끝까지 잠겨 있던 나에게 새로운 감정—즐거움과 기쁨—을 일깨워주었다. 나는 마당에서 마지막으로 요정들을 바라보던 때 그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못했음을 자못 아쉬워하며, “고맙다, 고마워” 하는 말을 되풀이했다.


지금 나는 홋카이도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내가 묵고 있는 호텔 바로 앞에는 삿포로의 명물인 TV타워가 보인다. 빨간색의 철골과 끄트머리의 하얀 첨탑을 햇살 아래 빛내며 시민들에게 현재 시간을 알려주고 있다. 나는 호텔의 안락한 의자에 앉아 이따금 펜을 굴리며, 가급적 여유롭게 봄 요정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글을 적어 나간다. 이야기의 서두에 붙인 “봄의 전령”이라는 이름은, 삿포로에 와서 떠올린 것이다. 사전을 보면, 전령이란 말에는 자못 심각한 의미가 붙어 있다. 하지만 나는 요정에게 그런 심각한 의미를 붙이고 싶지는 않다. 봄 요정은 무기력함에 잠겨 있던 나에게 다가와 기쁨과 즐거움을 주었지, 슬픔과 두려움을 주진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행복과 기쁨만큼이나 슬픔과 두려움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비장함으로 자신을 감싸면 결국 절망—죽음에 이르는 병에 빠지게 되기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다른 이들도 “봄의 전령”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만약 당신이 충분히 가슴 속에 신비로움을 가지고 있고 또 우연한 조우를 바라고 있다면, 언젠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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