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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preintes du beau rêve
오늘 지하식당에서 밥을 먹다 있었던 일이다. 밥이라고 해도 흰 쌀밥에 반찬과 국을 더한 것으로, 네 칸으로 나눠진 낮게 파인 홈에 콩자반이나 어묵볶음 같은 반찬을 담아 거기에 미지근한 국을 더한 상차림이다. 여하간 수수한 차림이라고 해도 개의치 않고 맛있게 먹고 있는데, 손님들의 편의를 위해 허공에 걸어둔 TV에서 아프리카 난민 후원 광고가 나왔다. 이것만이라면 흔하디 흔한 후원광고 중 하나에 지나지 않겠으나, 거기에 등장한 인물의 발언이 퍽 인상깊었다. 빨래를 하던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보건소에 가서 피검사를 받으니 에이즈라고 했어요...” 에이즈, 에이즈라는 말에 나의 심장은 얼어붙는 듯했다. 본인은 주변의 누군가가 에이즈에 걸렸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거니와, 직접 환자를 마주한 일도 없..
이란 라이트노벨이 있다. 이 '가벼운 소설'은 일본의 독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어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되었는데, 따라서 라이트노벨을 보지 않는 나도 작품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독후감을 쓰는 것처럼 줄거리를 질질 읊고자 내가 키보드에 손을 얹은 것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중요한 이야기가 있고 또 지금 내가 거기에 대해 쓰고자 하기 때문에, 우연에 우연을 겹쳐—역사의 끝에서 보면 이것 또한 필연의 톱니다—하나의 글이 엮이기 시작했다. 제목이 말하는 바와 같이, 나는 여기서 '망설임'과 '시험'에 대해 쓸 작정이다. 망설임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의미 그대로의 '망설임'이지만, 시험은 그것과는 많이 다른, 성경에서나 종종 볼 수 있는 '시험'이다. 그렇다면 이 둘이 어떻게 엮일 수 있을까? ..
그건 모두 거짓말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내 힘으로 자립할 수 있다는 말도, 또 그 정도는 충분히 마련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 것도 새까만 거짓말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소중하게 여기는 두 친구 중 하나와 만나고 밤늦게 헤어진 뒤에, 나는 외따로 떨어진 캄캄한 공간을 걸어 지하철을 타고, 이어서 버스를 탔다. 하고자 했으나 하지 못한 말을 마음속에 품은 채 나는 최대한 비틀거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버스에서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시선은 자동차와 낮은 건물들로 가득한 밖이었는데, 그 밑으로 뭔가 하얀 지렁이 같은 선이 지나갔다. 자세히 살펴보니 구불구불하게 그어진 차선이었다. 문득 나는 저 차선이 철사처럼 구불구불해진 이유는 버스와 승용차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덜컹거리며 지나가거나 멈춰섰기 때문이라고 ..
지난 7월 21일 개봉해 일본에서 큰 흥행을 거둬들인 는 건담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토미노 요시유키의 호평까지 들으며 바야흐로 ‘포스트 미야자키’를 이끌어 나가는 거두가 되었다. 우리에게 나 로 익숙한 호소다 마모루 감독은 디지몬 어드벤처 극장판(이것도 아마 디지몬 팬들이라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때부터 독특한 연출을 선보이며 데뷔해 로 대박을 터뜨리기 전까지 이나 원피스 극장판 등에 감독으로 참여했다. 이렇듯 다양한 색을 가진 작품을 전두지휘한 호소다 감독을 한 마디로 평가내리긴 쉽지 않은데, 그래도 한 가지 공통된 점이 있다면 코어층을 겨냥한 영화조차도 어느 정도 흥행에 성공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감독의 역량이 뒷받침되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어떤 점이 호소다를 ‘잘 팔리는 감독’으로 ..
‘타인의 삶’은 2006년에 개봉한 영화다. 영화가 다루는 시대가 동독이 몰락의 징후를 드러내던 시기, 즉 1980년대 중반임을 생각해 보면, 20년이라는 ‘숙성’의 시간을 거쳐 감정을 절제한 ‘모범적인’ 영화가 독일에서 나온 것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관찰자’의 시선을 견지한다. 비슬러가 죄인을 취조하는 장면부터 시작해서 “인간적이지 않다는” 표현을 한 학생을 슬그머니 체크하는 장면, 쌍안경을 들고 연극을 ‘감시하듯’ 감상하는 장면 그리고 불온한 시인을 도청하라는 명을 받고 집에 잠입하는 장면까지 정적이면서도 긴장감 있게 흘러간다. 하지만 그가 드라이만과 알버트와의 대화를 듣고 크리스타와 드라이만의 내밀한 관계를 엿듣게 되면서 상황은 약간 누그러진다. 드라이만의 생일파티로 돌아가서, 혼자 와인을 마시고..
글을 쓴다는 행위는 외연과 내인의 갈등의 현장 사이로 '던져진다'는 것을 뜻하기에 글을 쓰는 주체-사고의 객체-는 그가 서술하는 글에 종속되어 글을 완성할 때까지 사고만을 해방한다. 글의 길이는 그가 어떤 자유를 염원하는지 은유적으로 암시할 뿐이다. "판에 박힌 것에 대항해서 싸울 때는 엄청난 속임수와 반복 그리고 신중함이 없이는 안 된다. 각각의 그림, 그 그림의 매 순간마다 영구히 다시 시작해야 하는 작업이다. 이것은 형상의 길이다." "인식이란 '무엇을 아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너의 일부가 되었을 때, 또는 너의 삶이 그것의 일부가 되었을 때, 비로소 너는 그것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프랑스 68의 구호 "행동은 충분하다. 이젠 말이다."(Assez d'acte..
우연히 '무자비한 미녀'라는 그림을 접하게 되고 또 그의 모티브가 된 시를 접하고 나서, 내가 읽고 있는 소설과도 연관되어 있는 '요정'의 특징적인 부분에 대해 서술해 보자는 마음이 들어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다. 우선 원 시를 읽어보기로 하자. La Belle Dame Sans Merci - J. Keats Ah, what can ail thee, wretched wight, Alone and palely loitering; The sedge is wither'd from the lake, And no birds sing. 오, 왜 그토록 번민하고 있나요, 갑옷입은 기사여 창백하게 홀로 떠돌고 있나요? 사초는 호숫가에서 시들고 새들도 노래하지 않는데. Ah, what can ail thee, wret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