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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preintes du beau rêve
5월 22일부터 25일까지,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서울인권영화제라는 영화제가 열렸다. 서울인권영화제는 올해로 19회를 맞이하는데, 그동안 많은 우여곡절을 거치며 어엿한 하나의 영화제로 성장할 수 있었다. 올해는 4일에 걸쳐 이런저런 '사람들'과 '장소'를 다룬 영화를 상영했는데, 인상깊었던 마지막 날에 대해 짧게 말해볼까 한다. 마지막 날에 나는 4시가 조금 지나서 마로니에공원에 도착했다. 도착하고 보니 실낱같은 비가 내리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은 텐트 밑에서 준비된 의자에 앉아 영화를 보고 있었다. 상영작은 이었는데, 책자에서는 영화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밀양투쟁을 바라보는 외부인의 시선에서 점차 밀양에 거주하면서 삶의 문제로서 송전탑을 바라보는 주민들의 시선으로 옮겨가면서, 편견이나 오해로 왜곡되..
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마지막 화에, 타마코가 자신이 우사기야마 상점가에서 살아온 시간을 말하며, 여기서 태어나고 사람들과 마주하며 자란 게 정말로 기쁜 일이라고 말했을 때, 나도 만약에 타마코처럼 교토의 한 상점가에서 태어났다면, 그녀와 같은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그랬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다른 생각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자일 확률이 훨씬 더 높았을 것이다. 한국에서, 어느 한 곳에 정착해 유년기의 전부를 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부산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6개월 정도를 이문동에서 살았고, 그리고 부평으로 건너가 거기서 어린이집 시절을 보냈다. 어린이집의 기억은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아버지가 밤에 혼자서 놀고 있는 나를 데리고 온 것만은 어렴풋이 기억난다...
다들 잘 할 거라고 생각하는 게 우습다. 다들 잘 하지 못한다.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모른다. 허세를 부린다. 자신이 믿고 있는 것만을 의지하려 한다. 편한 길을 노리고 있다. 전혀 편하지 않은 길인데도. 며칠 전에는, 불가의 계율을 어겼다. 안정적인 길 바로 밑에는, 갈라지는 소리를 내는 절벽이 있다. 돌이 몇 개씩 우수수… 떨어진다. 그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건너고자 한다. 돌이 계속해서 떨어진다. 대조적으로, 길은 전혀 미동도 없이 저 앞까지 펼쳐져 있다. 나는 걸음을 재촉한다. 계속 걸으면, 빛이 나올까? 절벽은 이제 굉음을 내며 무너지기 시작한다. 길은 조금 흔들리기는 하지만, 무너질 기색은 없다. 절벽이 무너지는 소리는 내 가슴을 아프게 한다. 하지만, 이미 나는 '길' 위에 있는걸. 내가 ..
이로리 주변을 뱅그르르 돌며 뛰어노는 아이들이 셋 있었다. 녀석들은 서로의 꽁무니를 잡으려고 열심히 마룻바닥을 소리 없이 뛰어다녔다. 나는 편의상 이들을 “봄의 전령”이라 이름붙였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봄의 전령이 나의 집에 가져다 준 작은 기적에 관한 이야기다. 재미없더라도 부디. 나는 심하진 않지만 만성적으로 앓아야 하는 폐병에 걸려 다니던 학교를 휴학하고 집에서 쉬는 생활을 계속해 오고 있었다. 집에서 쉬는 것은 어머니의 잔소리와 눈치를 항시 받아야 하기에 그다지 건강에 좋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일단 내가 병에 걸린 이상 잔소리와 눈치를 큰 걱정으로 마주할 필요는 없었다. 여자—물론 모든 여자가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란 병에 걸린 사람을 보면 갑자기 모성애가 솟아나 곁에서 돌봐주거나 평소라면 절..
최근 을 리뷰한 글을 읽었다. 거기서, 필자는 소설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이란 꿈이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신있게 비관할 수 있는 건 줄거리가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홀든은 D. B. 같이 변절하는 어른의 세계를 혐오하고 피비와 앨런 같은 아이들을 순수의 결정체로 이상화하지만 그 이분법적 오류는 마지막에 가서 깨지고 만다. 혹자의 착각과 달리 이 이야기는 쉽사리 희망을 말하지 않으며, 아주 작은 성장의 처참한 실패기이기도 하다. 정신병원에 갇힌 홀든의 마지막 결말은 이 사회가 아이들의 팔다리를 잘라 무기력하게 만드는 풍경이자, 동시에 홀든 스스로도 자신의 알 껍질을 깨지 못하고 좌절하는 비극의 풍경이다. 우리가 보통 상상하는 성장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용감..
마이니치신문 독자투고란 번역 대학생 고순미 21세 (도쿄도 토요시마구) “특별영주가 뭔가요?”그 날, 친구와의 술자리를 마치고, 귀가길에 올랐다. 역을 나온 곳에 서 있던 순사 2명에게 신분증의 제시를 요구받았다. 동안인 내가 미성년으로 보였기 때문일 거다.“출신은?”“한국입니다.”재일 코리안인 나는 숨기지 않고 전했다.“특별영주에요.”“특별영주가 뭔가요?”순사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또한, 계속 일본에 있는 건가, 왜 있는 건가 하고.“양친도 재일입니다. 조모가 전쟁이던 때 한국에서 왔습니다.”“전쟁이라면?”이 순사는 역사를 모르는 건가. 역사가 알려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자만이었던 건가. 자신을 타이르지 않으면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한국을 비판하지 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왜..
이맘때가 다가오면 광장에서 다시금 노숙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고개를 쳐 드는 것이다. 한낮의 뜨거운 햇빛을 반사하던 유리빌딩, 벌집처럼 구멍이 송송 나 있는 어느 고급 호텔의 겉벽, 점심시간이 되어 식당으로 향하는 회사원들과 분수에서 뛰놀던 아이들. 더웠지만, 밤에는 시원했고 사람들이 사라진 광장엔 이따금 취객이나 일터에서 돌아오는 노동자가 광장을 뱅 돌아 거리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그리고 기나긴 정적. 광장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선 지하철로 가거나 빌딩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러나 용변을 해결하는 일은 사소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더 큰 문제는 바로 하루 걸러 열리는 그놈의 '행사'였다. 며칠 전에 연락이 오면—심지어 행사 당일 아침에 말을 걸어오는 경우도 있었다—텐트민들은 되도록 사..
'자유로움'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부자유한 것이지만, 잘 생각해 보면 자유의 문제는 그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이 인간의 조건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서로를 조건지음으로써 서로에게 부자유를 부과한다. 서로가 부자유하기 때문에 '질서'가 생겨나는 것이며, 질서를 유지할 수 있어야 '사회'가 탄생한다. 즉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언사는, 처음에 이 말을 한 사람이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인간은 부자유하게 살기를 타고난 존재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날 때부터 '자유로운' 인간은 적어도, '사회'에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현재 일본에는 수많은 니트들이 있다..
결국 무덤에는 나 혼자 남은 셈이었다. 왠지 이 상황이 기분 좋았다. 굉장히 아늑하고, 평화로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순간 내가 무엇을 봤는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돌이 쌓여 있는 바로 아래, 벽의 유리 부분 밑에 빨간 크레용으로 이라고 쓰여 있었던 것이다. 정말 문제였다. 어디서도 아늑하고 평화로운 장소는 절대로 찾을 수 없다는 것 말이다. 그런 곳은 없는 것이다.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곳에 일단 가 보면 우리가 보지 못하는 틈을 타서 어떤 자식이 바로 코밑에다 이라고 써놓고는 사라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가 죽어 무덤에 묻히고, 비석 같은 것에 라는 이름을 새겨 넣으면, 출생연도와 사망연도가 쓰여진 아래로 누군가가 이라고 몰래 써넣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 차례 격렬했던 겨울이 지나고 나서, 최근에는 할 일이 갑자기 사라진 것도 있고, 앞날이 불투명한 것도 있고 해서 완전히 넉다운돼 있었다. 과장해서 말할 일은 결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 그런 일이 있었지." 라고 하기에는 또 애매한, 물과 수은 사이에 있는 쇠공과도 같이 가라앉은 침잠. 나는 가만히 쇠공을 바라보는 일에도 싫증이 나 있었다. 그러나 예전처럼 "죽고싶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살고 싶지 않다", "살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야 매번 들지만, 그것이 "죽고싶다"는 결의로 이르는 데에는 몇 가지 요소가 필요한 법이다. 그래서 대신 "죽고싶다"는 결의를 하고 실행에 옮긴, 혹은 실행에 옮긴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글을 읽었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이 바로, 「무를 향한 도정..